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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149화 (149/154)
  • #149

    권재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심으로. 다만 죽음과 더불어 삶도 함께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권재진은 매 순간에 충실하고자 했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까지 허투루 지나칠 수 없었다.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고. 나 없다고 정신 놓지 말고……. 지금은, 너한테 내가 전부겠지만…… 앞으로는 안 그랬으면 한다.”

    “…….”

    “너는, 너 아직 어리니까. 새파란 스물이니까, 살다 보면 다른 가이드…… 다른 애인…… 또 만날 수 있어. 다른 사람 생길 거야.”

    “…….”

    “그리고…… 내가 너한테 부탁한 거 있잖아.”

    권재진의 목소리가 점점 가물었다.

    말하기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건 잊어.”

    <서의우 씨. 부탁 하나만 합시다.>

    <만약 제가 정말로 잘못된다면 말입니다. 4년 뒤건 언제건,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오면…….>

    <제 숨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 떠올릴 수 있게, 돌려주십시오.>

    “됐어, 기억…… 이제는, 너만 있어도…….”

    “…….”

    “그냥…….”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속삭임이었다.

    권재진이 팔에 힘을 풀었다.

    손이 툭 떨어지며 몸이 기울었다.

    서의우는 멍하니 무릎을 꿇고 앉아서 권재진을 받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의 옷과 살결이 선홍색 핏물로 물들었다. 목덜미는 검게 번지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온기가 빠져나갔다.

    마지막 순간에 서의우에게 미소 지어 주려고 했지만, 차게 식은 입꼬리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권재진은 먹혀들어 가는 목을 비틀어 짜서 고백했다.

    별것도 아닌 말인데. 감추지 말고 더 자주 말해 줄 걸 그랬다.

    서의우처럼 앞뒤 안 가리고 솔직해져 볼 걸 그랬다.

    대책 없는 애새끼처럼, 멋모르고 달려들어 볼 걸 그랬다.

    권재진은 왜 그렇게 늘 겁이 많고 신중했을까.

    뭐가 그리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을까.

    고집은 또 엄청 세서…… 서의우가 다른 사람한테 해 주는 가이딩 싫다고 했는데, 질투 난다고 했는데, 단둘이 좋다고 했는데, 애 마음고생이나 잔뜩 시키고…….

    이럴 줄 알았다면…….

    1회차도. 2회차도.

    그냥 다…….

    “너 사랑했어……. 계속…….”

    핵이 갈라졌다.

    흐르던 시간이 멎고, 새카만 우주로 정신이 내동댕이쳐졌다.

    별이 권재진을 맞이했다.

    ***

    검은 공간이었다.

    권재진의 머리 위에 토성의 고리가 떠 있었다. 그리고 앞에, 당연하다는 듯 서의우가 서 있었다.

    24살, 1회차 서의우가.

    느릿하게 다가온 그가 권재진과 함께 걸었다. 어디인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여정을 시작하는 듯했다. 발길이 닿는 곳이 어둡고 깊었다. 재진이 눈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니 크리처의 사체처럼 보이는 검은 것들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뭐야.”

    조용히 중얼거리자, 서의우가 답했다.

    “뭐가요?”

    “여기 뭐냐고……. 대체 어디야.”

    “재진 씨의 꿈이요.”

    “아니잖아.”

    권재진은 죽었을 텐데.

    죽은 후에도 꿈을 꾼다는 게 말이 되나?

    “응, 사실 꿈 아니에요.”

    권재진이 허탈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편안히 행동할 수 있었다. 핵이 부서지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긴 그냥 통로예요. 우리가 맞닿아 있는.”

    “…….”

    “재진 씨랑 내가 연결된, 내가 만든 통로.”

    “……네가 만들었다고?”

    “네. 제가요.”

    서의우가 손끝을 까딱였다. 그러자 새까맣게 어두운 저 끝에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빛이 권재진을 파고들었다. 정확히는 이마, 중앙을.

    권재진은 이 감각을 이미 느껴 본 바 있었다.

    정신계 이능이었다.

    서의우가 기억 속에 들어왔을 때. 그를 받아들였을 때. 그 순간 깊게 밀려 들어오던 감각과 일치했다.

    강력하고 순수한 힘의 덩어리가 권재진을 감싸고 그의 기억 끝자락에 닿았다.

    “그때 있잖아요. 우리 집 마당에 게이트가 터지고, 재진 씨가 휘말려 숨이 끊어지던 때 말이에요.”

    “…….”

    “재진 씨가 정말 심하게 다쳤죠. 힐링 팩터로도 회복할 수 없었어요. 이미 핵이 부서져서…….”

    “……그래. 그랬지.”

    “되돌려야 했어요.”

    서의우가 담담히 고했다.

    그의 표정도 냉정했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날카로운 눈빛이 당시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 서의우가 권재진과 같은 기억의 편린에 멈추었다.

    권재진의 죽음. 그리고 1회차 삶의 끝에서.

    “없었던 일로 만들어야 했죠. 재진 씨가 죽는다니, 내겐 불가능한 상황이잖아요.”

    “너…… 대체 뭘 한 건데.”

    “보다시피. 되돌렸어요. 과거로.”

    “…….”

    “그러니까, 재진 씨와 나의 처음으로.”

    서의우가 권재진의 기억을 더욱 끌어냈다. 그의 기억과 함께 얽히자 어렴풋이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이 있었다. 1회차와 2회차의 연결, 되감기던 시계 속에서의 여정이.

    “좌표 이동이요. 이 시대에도 연구 중이지만, 4년 후에는 공간축의 좌표뿐 아니라 시간축의 좌표로도 이동이 가능하다는 가설이 제기되거든요. 물론 검증하지 못할 이론일 뿐이었지만…….”

    “그럼, 너……. 네가…….”

    “네. 해냈어요. 제가요.”

    잊힌 기억 속에서, 서의우와 권재진은 이 새까만 통로를 걸었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 둘이 함께 시간을 거스르며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걷고 또 걷고.

    오래…… 아주 오래 걷고만 있었다.

    4년을, 돌이켜야 했으니까…….

    “이제 기억나요? 재진 씨랑 나랑요. 약속했어요.”

    “…….”

    “우리 다시 시작하면, 재진 씨랑 나랑, 정말 잘해 보기로…….”

    “…….”

    “내가 잘못한 거 많고, 재진 씨한테 말 못 한 것도 많다고 하니까, 재진 씨도 나한테 그렇다고 했어요. 나한테 알려 주지 못한 게 많다고. 우리 서로 그렇다고…….”

    “…….”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말 잘해 보자고 그랬어요. 우리가 그렇게, 약속했다고요. 새로운 삶이니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고…… 더 좋을 거라고.”

    “…….”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죠.”

    권재진의 머리에 파고들었던 빛이 확 밝아지더니 거대한 시간축을 형성했다. 좌표 이동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빛 방울이 펼쳐졌다. 그 빛은 굉장히 강렬하고 또 애틋했다. 서의우의 이능이 한계까지 폭발한 결과였기에.

    “재진 씨는 무사하게 4년 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문제는 나였는데.”

    “…….”

    “나는…… 4년 전의 나는, 불균형한 이능으로 온몸이 포화 상태였기에. 그 순간으로 시간 이동해버리면, 집약된 이능이 폭주할 게 뻔했어요.”

    “아…….”

    “그러니 나는 필연적으로 기다려야만 했죠. 여기서. 혼자.”

    “아아…….”

    “재진 씨가, 먼저 돌아가서, 나를 가이딩 해 주고, 어린 내 불균형이 충분히 해소되어, 시간 이동을 감당할 수 있는 안정적인 상태가 되면…… 그때 비로소…….”

    되돌아오려고…….

    “재진 씨랑 같이 시작하려고…….”

    그랬는데…….

    권재진은 잊고 말았다.

    좌표 이동과 마찬가지로, 시간 이동 또한 찰나에 이뤄지는 것이기에. 통로 밖을 벗어나는 순간 이곳에서의 기억은 고작 한순간이었던 것처럼 축약되어 사라지고 만다.

    기나긴 꿈조차 깨어나면 일순간이었던 것처럼 잊혀 버리듯이.

    통로에서의 일도 무의식의 저편에 넘어가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권재진은 1회차 서의우와 함께 온 사실을 잊었고, 1회차 서의우가 곧 돌아올 것이란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재진 씨는, 내가 아니라, 4년 전의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버렸어요.”

    서의우가 서느렇게 중얼거렸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두려우리만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꼭 내 입으로 재진 씨에게 말했어야 할 잘못을 아무것도 모르는 그놈이 대신 밝혀 버렸어요.”

    “……의우야.”

    “나랑 했어야 했는데, 나랑 같이 연애하고, 기념일 세고, 커플링 끼고, 그거…… 나랑 했어야 했는데. 재진 씨는.”

    “의우…….”

    “우리가 했어야 할 사랑을, 재진 씨는…….”

    “…….”

    “그 멍청한 과거의 나새끼랑 도망이나 치려고 하고…….”

    “……아니야.”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재진 씨는 내가 돌아가도 기뻐하지 않겠구나. 그놈이 내 과거인데, 반대로 날 과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나를 원망하고, 나를 미워하면서, 끝내는 잊어버리겠구나……. 나는 아직도 여기에 있는데.”

    검은 공간이 일그러졌다.

    서의우의 이능으로 만들어진 통로는 그의 무의식을 반영해 시시각각 변해 갔다.

    우주가 펼쳐지고 토성이 떠오르고 떼로 몰려온 크리처의 괴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혼자 기다리고 있는데. 과거의 내 이능이 안정되는 순간을. 재진 씨에게 되돌아갈 수 있는 날을. 그때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공간이 뒤흔들리며 세찬 칼바람이 몰아쳤다.

    권재진은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24살의 서의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를 두고 왔다는 사실이, 걷잡을 수 없는 충격으로 와닿았다.

    “내가 돌아가도, 재진 씨는 이미, 그 새끼를 사랑하고 있고.”

    “…….”

    “날 더는 기쁘게 맞아 주지 않겠구나 싶어서.”

    “…….”

    “차라리 내가 이대로 소리 없이 없어지고, 재진 씨가, 그놈이랑 살게 둬야 하나 싶다가도…….”

    “…….”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고……. 나도 재진 씨랑 다시 만나고 싶은데……. 나랑, 재진 씨랑, 원래…… 원래는, 우리가…….”

    “…….”

    “먼저…… 약속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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