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장 중령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을 떼고 손바닥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피식, 실없는 웃음이 새었다.
저 둘을 데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의우에게 중징계를 내리고 윗선에 보고나 올리러 가야 할 마당에…….
오묘하게 일그러지는 장 중령의 표정을 보고서 서의우와 권재진의 시선이 맞았다. 권재진이 먼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서의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른하게 입을 열었다.
“중령님, 답을 벌써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서의우가 담백하게 되물었다. 장 중령과 오랜 세월을 복무하며 그를 눈속임해 왔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규율이야 예전부터 어기고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가이딩 결핍 말입니다. 저는 훈련생 시절부터 불균형으로 엉망인 몸뚱이를 감추고자 숱한 거짓을 일삼아야 했습니다. 발각당하면 처분될 테니……. 이런데 군부에 따를 생각 같은 게 있었겠습니까?”
“허…….”
“군의 규율대로라면 저는 죽어야 했습니다. 재진 씨도 마찬가지고.”
장 중령의 턱이 굳었다.
눈을 부릅뜬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의우를 쳐다보았다. 서의우는 말갛고 하얀 낯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은 거짓 없이 자연스러웠다.
권재진이 그의 곁에 있을 때는 매번 그랬다.
심중을 숨기는 데 능한 서의우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타인을 경계하고, 마구잡이로 이능을 써재끼기도 하고, 격분해서 화도 내었다.
그러다가도 권재진을 볼 때면 누그러진 눈빛을 띠고, 다정하게 굴기도 했다가 초조해하기도 했다가, 어린애처럼 속내가 그냥 훤히 들여다보였다.
“솔직히 환멸 났습니다. 돌연변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진 씨를 잡아 죽이려는 군부에.”
“…….”
“홧김에 각성자들을 몰살해 버릴까도 싶었는데…… 그래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재진 씨가 자꾸 뜯어말려서…….”
“의우야, 그런 얘긴 하지 맙시다.”
“아니, 상관없다. 계속 듣지.”
“저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각성자들이 아니라 크리처라는데, 틀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래서 수색 부대 전원 살려 보낸 거였나.”
장 중령이 참담하게 두 눈을 내리감았다.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고 탁한 한숨을 내뱉었다.
수색 부대의 임무가 실패했을 때,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 임무에 참여한 모든 대원이 자신의 죽음을 보았다.
그런데도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자뿐이었다.
그날, 장 중령은 권재진에게 목숨을 빚졌던 것이었다.
장태산 중령이 권재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허탈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선에 나서 총을 쏘던 권재진의 모습을 보고 느낀 감상에 확답을 얻은 듯했다.
권재진의 총구는 처음부터 크리처를 향해 있었다.
“그럼 효율 중시 가이딩을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나? 크리처와 싸울 목적이라면 가이딩을 더욱 적극 활용해야 할 텐데.”
“아니, 그건 아닙니다.”
권재진이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말은 침착하게 내뱉어졌고 표정도 평온했지만, 가슴속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 효율만 좇는 군의 사고방식 때문에 돌연변이를 비롯한 각성자들이 여태 죽어 나갔던 것이니까요.”
누가 말해 주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 각오할 때였다.
권재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사무실에 각종 서류와 공문서가 정돈되어 있었다. 벽에는 상패 등이 단출하게 걸려 있었고, 장 중령의 개인 총기와 관물대가 있었다.
창문 밖, 저 멀리 날아가는 수송선이 보였다. 별것 아닌 풍경들을 눈에 새겨 넣으며 재진이 한차례 심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각성자식 가이딩은 비인도적입니다. 정신계 이능으로 전사자의 기억을 지우거나, 교육 훈련관 미수료 생도들을 살처분하는 행태도 다분히 비인도적입니다.”
“대체, 자꾸만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를 모르겠군.”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을 테니.”
권재진의 앞에는 장태산 중령이 앉아 있고, 옆에는 서의우가 서 있다.
재진이 검은자위를 돌려 서의우를 힐긋 곁눈질했다. 그의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천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듯 내미는 손길에 서의우가 덜컥, 동요하는 감정을 내비쳤다. 회색 눈동자 안쪽에 어두운 불길이 번지고 집착 어린 음험한 시선이 쏟아졌다.
권재진은 재차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서의우를 받아 냈다. 그러고는 장 중령에게 가이딩을 제안했다.
“잡아 보십시오. 손.”
“…….”
“이런 방식으로 가이딩 할 수 있다고 알려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각오를 끝냈고, 결의도 마쳤는데 이상하게 손끝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서의우가 치정으로 점철된 눈을 흉흉하게 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그가 보는 앞에서 가이딩 하자니 죄를 짓는 것보다도 더 곤혹스러웠다. 솔직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내뱉는 호흡마저 어수선했다.
장 중령은 심상치 않은 기세의 서의우와 권재진을 번갈아 응시하고는 마지막으로 천장을 한차례 올려다보았다.
“군에서는 규정된 점막 접촉 외 가이딩은 허가하지 않는다. 알고 있나? 하물며 이곳은 지정된 가이딩실도 아니지.”
“예, 그래 보이는군요.”
“하…….”
장 중령이 느릿하게 장갑을 벗었다. 검은 장갑 한 짝을 내버리고서 권재진의 손을 맞잡았다.
둘이 짧게 악수를 나눴고, 접촉한 손바닥의 피부를 통해 가이딩이 이뤄졌다.
“……!”
장 중령이 근엄한 표정을 흩트리며 흠칫 놀랐다.
그의 가슴 속 핵이 강렬하게 떨렸고, 삽시간에 몰아치는 가이딩의 이끌림에 에스퍼로 타고난 본능이 전율했다.
권재진의 가이딩은 저 깊은 곳, 잠재의식에 파묻혀 있던 이능까지 너끈히 닿았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깊숙한 곳에 축적되었던 불균형까지 일시에 조화를 이루며 자리를 찾아갔다.
영원 같던 찰나가 지났고, 서의우가 장 중령의 손목을 난폭하게 잡아 떼어 냈다.
손목을 거의 부러뜨릴 기세로 세게 붙들려 떼어졌지만, 장 중령은 고통 따위 느끼지 못했다. 아직 가이딩의 여파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이래서 이능이…….”
장 중령이 빈손을 허망하게 움켜 허공을 쥐었다.
넋이 나간 듯한 그를 두고, 권재진이 전해야 할 말을 내뱉었다.
“이런 식이라면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존엄을 해치지도 않습니다.”
“…….”
“효율은 떨어지더라도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런 것인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장 중령의 눈빛을 마지막으로, 권재진의 시야가 빛으로 뒤덮였다.
좌표 이동이 이뤄지는 순간까지도 권재진은 장 중령의 손모가지가 뜯겨 나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켜보았다.
다행히도 피 분수가 터지지는 않았고, 잔혹한 꼴 볼 일 없이 무사히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새 저택의 침실이다.
통유리창 너머에 펼쳐진 바다. 천장을 덮고 있는 유리창. 오래도록 지내 왔던 해변 저택을 빼닮아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온통 새것뿐이라 새 출발 하는 듯한 저택 침실이었다.
‘……헉.’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가슴 속이 술렁거리다 못해 휘청거렸다.
누군가 권재진의 가슴 속에 팔뚝을 찔러 넣고 휘저어 대는 것 같았다.
재진이 잠시 멈추어 숨을 골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곁에 서 있는 서의우를 보았다.
어려운 마음이었다.
당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서의우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서의우가.
‘가이딩을…….’
솔직히 서의우가 참지 못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손이 닿기 직전 장 중령이 이능에 휩쓸려 날아가거나, 권재진이 좌표 이동 당해서 귀가하게 될 가능성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다.
통제당한 각성자들의 사고를 직관적으로 깨 줄 수 있는 방식이고, 다른 누구도 아닌 S급 돌연변인 권재진만 할 수 있는 방식이라지만,
고작 손을 잡는 것뿐이었고, 그것도 아주 짧게 잠깐뿐이었지만,
그래도 가이딩은 가이딩이었다.
조금 전 서의우가 무엇을 참았는지, 어떤 심정으로 지켜보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그렇게 싫다고 날뛰었는데……. 가이딩은 절대 안 된다고 부르짖었는데…….’
그걸, 권재진의 뜻을 위해, 참아 주었다.
서의우가…….
그 서의우가 어떻게…….
‘이러면 이젠 빈말로도 애새끼라고 말할 수 없잖아…….’
어리고, 불같은 마음만 앞서고, 충동적이고, 맹목적이고, 집착에 질투에 원하는 건 끝내 전부 가져가고야 마는…… 그런 게 서의우라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달라져 버렸다.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된다…….
언젠가 주워듣기를, 연인 사이에선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했다.
권재진은 늘 지는 쪽이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꺾이고, 포기하고, 받아 주고, 체념하고, 늘 그랬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서의우가……. 이번에는 서의우가…….
권재진에게 완벽하게 져 주었다.
그 사실이 못내 감격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