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다 알았으니 그만합시다. 아니면 분풀이라도 할 작정입니까?”
이 자리에서 서의우가 마태오를 짓뭉개 놓는다고 해서, 권재진의 가이딩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권재진은 가이딩으로 에스퍼의 이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확증을 얻었으니 뜻한 대로 행할 심산이었다.
서의우가 각오하라며 하도 으름장을 놓아서, 후일이 좀 걱정되긴 하다만…….
“그렇다고 제 결심이 흔들리진 않습니다. 저는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습니다.”
“알아요. 재진 씨 마음이 어떤지. 너무 잘 알아서 난 괴로워요.”
“그럼 이제 됐잖습니까. 이렇게 마 대위를 죽이려 들지 않아도……. 그만 끝맺어도 되잖습니까.”
권재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태오를 응시했다.
그와 처음 마주쳤던 날 느꼈던 공포와 불안이 지금은 해묵은 먼지를 털어 낸 것처럼 깨끗하게 가셔 있었다.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견 같은 분위기나, FM에서 벗어나지 않는 철두철미한 태도, 빈틈없이 머리칼을 넘겨 정리한 군더더기 없는 모습 등. 당시에는 그런 마태오에게 명백한 적의를 느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마태오는 또 다른 서의우일 뿐이었다.
명령받고 그에 따르는, 언제 전선에서 죽어 나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군부에서 자라난 무기다.
마태오가 아니었다면 권재진은 자신이 가이딩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영원히 알지 못했을 터였다.
재진이 목소리를 낮춰 작게 토로했다.
“……비록 당시에는 자의로 했던 가이딩도 아니었고 불쾌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두 번이나 그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렇다. 권재진이 늑대형 β크리처에게 당해 심각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을 때, 마태오가 이끄는 제7 특임부대가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살아 있을 수도 없을 터였다.
“힐링 팩터를 주사받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 후에 늑대형 β크리처 무리가 또 나타났고, 마 대위는 잡아먹히려는 저를 또 한 번 구해 놨습니다.”
“…….”
“수색 부대에 쫓길 때는 나름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이렇게 됐고……. 임무 실패로 강등까지 당한 것 같으니, 저는 이제 아무런 유감도 없습니다.”
오히려 한편으론 고마운 구석도 있었다.
권재진이 문틀 밖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데, 그가 일조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콰지지직!
서의우의 이능이 보호막을 꿰뚫어 산산이 흩어 놓았다. 다행히도 바스러진 건 보호막뿐이고, 마태오의 핵까지 부수진 않았다.
이능이 걷혔고 마태오는 쿨럭거리며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냈다. 자세가 불안정한 것을 보니 뼈가 몇 군데 바스러진 게 분명했다.
“……재진 씨가 목숨을 두 번 빚졌다고 하니 나도 두 번은 살려 놓을게요.”
“그래. 잘 생각했습니다.”
“재진 씨는 아니라도 난 유감이 가득하지만요.”
점차 주변이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급히 보낸 통신 때문에 특임부대원들이 모이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부상자인 마태오 대위를 여럿이 부축하고자 다가왔다. 그의 가슴 포켓에서 힐링 팩터를 꺼내 주사해 주었다.
마 대위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도 자세를 추슬러 권재진을 바라보았다. 구멍 뚫린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더니 곧 자조적인 빛을 띠었다.
“……권재진, S등급 판정을 받았다지. 거기 있는 서 대위와 매칭된 건가?”
그가 권재진에게 말을 건네자, 서의우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살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이래서 에스퍼란 족속은…….
서의우가 격분해서 거두었던 이능을 다시 끌어올리려는 걸, 권재진이 가까스로 말리고 간단히 대꾸했다.
“매칭을 떠나 서의우는 제 에스퍼입니다. 저는 서의우의 가이드고.”
“……그런가. 역시 그런 거였군.”
마태오가 오묘한 얼굴로 눈가를 찡그렸다. 굉장히 신 것을 삼켰을 때 보이는 표정과 다소 비슷했다.
“이제 내겐 다른 방도가 없겠군. A급으로 태어난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권재진은 서의우가 마태오의 핵을 박살 내기 전에 확실히 선을 그어 답했다.
“같은 S급이기에 서의우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서의우라서…… 서의우니까 함께하는 겁니다.”
“……서의우라서?”
“예, 설령 그쪽이 S급 판정을 받고 서의우가 F급 판정을 받는 날이 온다 해도 저는 서의우의 곁에 있을 겁니다. 이 차이를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마태오의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권재진이 말한 차이가 무엇인지 곧바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거절임은 명백했다.
마태오는 권재진의 말을 두세 번 곱씹어 보다가, 깊은 한숨을 더해 중얼거렸다.
“……고맙다는 말이나 해 두도록 하지. 그 가이딩 덕에 박호원 중위를 편히 보내 줄 수 있었다. 폭주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고.”
박호원 중위……. 그날 폭주한 에스퍼의 이름이 박호원이었구나.
“전선에 선 모습도 훌륭했다. 그간 돌연변이를 제거해 온 군부의 결정에 회의를 느낄 정도로.”
“…….”
“부하였다면 칭찬해 줬을 거다.”
권재진이 소리 없이 눈을 깜빡였다.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서의우를 보니, 콧잔등에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했다. 얼굴만 봐도 나, 질투함. 이라고 적혀 있었다.
눈 마주치는 것도 싫고, 목소리 들려주는 것도 싫다고 했던가? 안타깝게도 죄다 해 버렸다. 그것도 마태오를 상대로.
‘그러게 누가 먼저 소란을 피우랬나…….’
그만하라고 말렸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던 건 서의우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 센터에 온 것인데, 사건만 더 만들고 가게 생겼군. 이건 또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그때, 몰린 인파 뒤쪽으로 아는 얼굴이 보였다. 장태산 중령이 험악한 인상을 쓰고서 세 사람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특임부대원들이 그에게 경례하며 뒤로 물러섰다.
장 중령은 엉망으로 박살 난 3층 복도 바닥과 벽, 그리고 나뒹구는 연구원들을 훑어보고는 알 만하다는 듯 성긴 눈썹을 찡그렸다.
“어김없이 난장판이로군. 마 대위는 의무실로 이송하고. 서 대위, 권재진. 따라오도록. 나머지는 해산이다.”
***
“알고 있을 테지만, 센터 내부에서 이능 사용은 중징계 사유다. 서 대위.”
“그러면 제게 징계를 주시고자 부른 겁니까?”
“아니. 터놓고 말하도록 하지. 시간도 없으니.”
장 중령을 따라 도착한 곳은 제1 특임부대 전투대기실이었다. 그 안쪽에 장 중령의 개인 사무실이 있었다. 숱하게 드나들었던 곳인지라 서의우는 자연스럽게 권재진을 안내했다.
원목 탁자 앞에 앉은 장태산 중령이 피곤한 눈을 찡그리고 거친 손으로 관자놀이를 쓸어 올렸다.
“자네들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가. 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고?”
“…….”
“처음엔 서 대위가 S등급 가이딩에 정신이 팔려 본분을 저버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지. 돌연변이를…… 그래, 그랬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장태산 중령은 권재진이 탐탁지 않았다. 서의우나 마태오 다 S등급 가이딩에 눈이 먼 것이라고 여겼다. 하물며 군 수뇌부 측까지도…….
수색 부대는 돌연 해체되었고, 군 수뇌부들은 무슨 결단인지 권재진에게 특례를 적용해 정식으로 등급 테스트를 받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일반적이지 않은 행보였는데, 등급 테스트를 마치자마자 권재진은 각성자식 가이딩은 할 수 없다는 괴상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만, 인도적인 방식의 가이딩이라면…… 점막 접촉 아닌 피부 접촉, 손을 잡는 가이딩이라면 할 의향이 있다고 하면서.
장 중령으로서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S등급 가이드가 가이딩을 거부한다니.
손잡는 행위로 가이딩을 대체하겠다니.
가당키나 한 소린가?
이는 가이드의 의무와 책임을 휴지 조각처럼 내던지는 발언이었다.
생살이 뜯기기 싫어, 생사가 걸린 전장보다도 일신의 안위를 우선하겠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효율 중시 가이딩을 거부하는 건 전선에 나서 목숨을 걸고 전투하는 각성자들을 우롱하는 비겁자 같은 짓이었다.
그렇기에 장 중령은 권재진이 서의우의 가이드가 될 자격이 없노라 여겼다. 정식 각성자가 될 자격도 없다고 여겼고…….
그런데, 권재진은 보란 듯이 전선에 나타났다.
가이드의 본분인 가이딩은 거부했으면서, 전투복을 갖추고 능란히 소총 사격했고 심지어 군용 특수 보급품인 HMD 고글까지 제대로 다루었다. 겁먹지도 않고 크리처를 수없이 쏴 죽이며 결연히 참전했다.
하물며 전투에 나선 권재진에게서는 어떤…… 비장한 사명감마저도 느껴졌다.
“나는…… 그래, 자네들의 본의가 알고 싶다.”
장 중령은 본래부터 감이 뛰어난 자였다.
군세를 이루어 떼로 몰려온 크리처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도 당연하게 깨닫고 있었다. 군부에서 무언가 벌어지고는 있는데, 아는 바가 없어 갑갑할 따름이었다.
“서 대위, 어째서 거듭 규율을 어기는 것이지? 군부에 따를 생각이 없어진 건가? 그리고 권재진 자네는…… 그때 내게 했던 말은, 어떤 의미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