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어차피 아직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았다.
권재진의 가이딩이 그만한 실효성이 있는지 확실치도 않다. 확증을 얻는 것이 우선이고, 실제 가이딩은 그 후에 결정할 문제였다.
‘모든 것이 확실시되면 그때는, 음…….’
그래…….
또 한바탕 개지랄이 벌어지는 건가…….
‘까짓 망나니가 별건가. 칼춤 한번 추고 말라지.’
요는 서의우가 마음 풀릴 때까지 대 주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정도는 평소에도 자주 겪던 일이고…….
그조차도 참는 거라는데 저기에 대고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약한 소리 줄줄 늘어놓으며 내빼기도 싫으니, 할 수 있는 만큼은 감당해 볼 밖에.’
어쨌든 지금은 앞만 보고 갈 때였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그럼 무균이동실로 가요.”
센터의 첫 방문은 침입자로서의 난입이었고, 두 번째는 신원 확인을 거친 정식 방문객으로서 초대받은 입장이었다.
세 번째 방문에 이르러서야 무균이동실을 거치게 되었다니. 특수 거주지구에서 가장 보편적인 이동 방법을 이제야 사용하는 게 조금 우스웠다.
‘서의우가 출퇴근하는 모습을 늘 보아 왔는데도 말이지.’
새로운 저택의 무균이동실은 기존에 지내던 해변 저택과 구조가 똑같았다. 밀폐된 두 개의 이중문이 있고, 통과하는 과정에서 멸균소독을 마치게 되었다. 들어간 내부에는 원판이 깔려 있으며, 그 앞에 호환 장치가 놓여 있었다.
서의우가 권재진의 손을 잡고 원판에 올라섰다. 호환 신호를 보내 두고 대기하는 동안 짧은 침묵이 흘렀다.
무심코 서의우를 돌아보았더니, 당연하게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서의우는 지치지도 않는지 줄곧 권재진만 쳐다보고 있었다.
재진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날 세우지 않아도 서의우 씨 옆에만 붙어 있을 겁니다.”
“…….”
“다른 에스퍼, 뭐…… 아무튼, 그러니까.”
“아무튼 그러니까가 뭐예요.”
“불 켜졌습니다. 이제 이동하라는 신호 아닙니까?”
“아무튼 그러니까가 뭐냐고요.”
“별말 아닙니다. 갑시다.”
“재진 씨.”
“하아, 조심할 테니 걱정 놓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이제 갑시다.”
서의우와 함께 무균이동실을 통하자, 센터 중앙관 7층에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한산했던 3층과 달리 7층은 임무를 받고 무균이동실을 이용하는 특임부대원들로 붐볐다.
전투복을 갖춰 입은 무장한 각성자들 사이에서, 일상복을 입고 등장한 서의우와 권재진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
둘을 알아본 각성자들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모세의 기적처럼 7층 복도 인파가 반으로 갈라졌다. 서의우는 권재진에게 이능으로 생성한 보호막을 덧씌우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쳐다보지 마요. 저 새끼들이랑 눈 마주치지 마.”
“그 얘기 대체 몇 번째입니까. 안 봤습니다.”
“잠깐, 말도 하지 말아요. 재진 씨 목소리 들려주고 싶지 않아요.”
“…….”
권재진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은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왜 자꾸 조건이 늘어난답니까. 쳐다본다고 가이딩 되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 듣는다고 가이딩 되는 것도 아닌데…….”
서의우가 엘리베이터 안에 권재진을 홱 끌고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밀폐된 곳에 단둘만 남게 되자 서의우가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권재진을 덮쳐 눌렀다. 엘리베이터 구석에 몰아세우곤 허리에 팔뚝을 감아서 꽉 끌어안았다.
집을 나선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서의우는 벌써 좌표 이동으로 권재진을 데리고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왜 또……. 아무 일도 없었잖습니까. 좀 놔.”
권재진은 서의우에게 끌어안겨져 구속당한 와중에도 겨우 팔을 뻗어 신체검사실이 있는 3층 버튼을 찾아 눌렀다.
“아무 일이 없긴요. 죄다 재진 씨 넋 놓고 쳐다봤는데…….”
“그야 돌연변이가 대뜸 나타났으니 신기해서 봤겠지.”
“아니야, 아니라고요……. 공명했을 거예요. 다 느꼈을 거라고요.”
“공명했든 말든, 남들 보는데 이러면 꼴불견입니다…… 질투도 어지간히 해야지.”
“질투……?”
“예.”
“질투했다고요, 내가?”
“그럼 아닙니까?”
서의우는 S급을 타고났다. 그렇기에 다른 에스퍼를 시기하거나 질투할 일은 그의 생에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에스퍼들이 서의우를 시기 질투 하면 했겠지.
그렇지만 권재진이 얽히면 얘기는 달라지고 만다.
이능력으로는 서의우와 결코 대등해질 수 없다 해도, 에스퍼로서의 본능은 동일했다. 가이딩을 향한 욕망 프로세스 자체가 같다. 어떤 에스퍼라도 권재진에게 가이딩 받을 수 있고, 권재진의 가이딩을 갈구할 터였다. 그러니 서의우가 살기 어린 적의를 품고서 질투하는 거였다.
하물며 서의우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에스퍼들도 권재진을 통해 깨달을 기회가 있었다. 연애가 뭔지, 연애 감정이 뭔지. 모두가 권재진을 통해 깨닫게 된다면 에스퍼로서뿐 아니라 연적으로서도 대등해질 터였다.
그렇기에 질투 대상이 되는 거고, 끊임없이 위협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이게 질투하는 거구나.”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는데도 서의우는 내릴 기미가 없었다. 공연히 문이 한 차례 열리고 닫혔고,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의우가 눈을 번뜩이며 광기를 뿜었다.
엘리베이터 양쪽 벽면에 붙은 거울로 서의우의 살벌한 눈빛이 반사되어 보였다.
“질투 맞는 것 같아요.”
“예……. 알았으면 이제 내립시다.”
“나 질투해요.”
“알았다니까…….”
솔직히, 이 정도면 정신 상담이라도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 하는 데 거부감 느끼는 건 이해하겠는데, 가만 보면 서의우의 집착은 그런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는 것 같았다.
“3층입니다. 내려야지.”
“응, 그래요. 가요…….”
3층 신체검사실를 찾아온 이유는 지난번에 끝마치지 못했던 검사를 이어 하기 위해서였다. 권재진의 등급테스트가 끝난 뒤, 장 중령은 다음 차례로 서의우도 이능 검사를 해야 한다고 안내했었다.
그날은 무산되었지만, 오늘 검사를 받아 보면 권재진의 가이딩이 에스퍼의 이능 증폭에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3층 복도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권재진?”
무슨 우연의 장난인지 심히 낯익은 자였다.
마태오 대위가 당혹스러운 눈을 일그러트리고 권재진과 서의우를 보았다. 그의 뒤로 연구원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서의우가 이능을 터트렸고, 마태오는 황망히 보호막을 둘렀다. 연구원들은 뒤로 떠밀려 가 복도에 고꾸라졌다.
권재진이 다급히 서의우를 뜯어말렸다.
“서의우! 기다려!”
이 씨발, 하필!
왜 여기서 마태오가 튀어나오나…….
‘아니, 차라리 잘됐다.’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권재진이 서의우의 이능을 받아 내느라 사력을 다하는 마태오를 살피며 서의우에게 소리쳤다.
“잠깐만, 의우야. 얘기 좀 합시다. 그만두십시오.”
멈추라는데도 서의우는 듣지 않았다. 마태오가 신음하며 괴로워했다.
“크윽…….”
“마태오 대위, 제 가이딩이 그쪽 이능을 끌어올렸다는 얘길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3층에 있던 연구원들이 경보를 울리고 상부로 통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일이 커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서의우는 이능을 거둬들이기는커녕 새하얗고 냉랭한 낯으로 마태오를 압살하고 있었다. 마태오가 서 있던 자리가 둥근 보호막째로 움푹 파였다.
“서의우, 멈추라니까! 대답을 듣게…….”
“재진 씨…… 저런 놈 대답 들을 것도 없어요. 붙어 보니 바로 알겠네요.”
서의우가 짜증스레 미소 지었다. 분명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는데도 언짢고 불쾌해서 심기를 어찌 억눌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 하하, 차라리 허튼수작질이었으면 했는데 말이죠.”
이능 향상이고 나발이고 개잡소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방어계 A급. 기존 수준보다 월등히 강해졌어요.”
서의우가 피식거리며 이능을 송곳처럼 뾰족하게 모아 세웠다. 한 점을 노려 마태오의 보호막을 파고들자, 완벽한 원구 형태였던 보호막이 찌그러지며 눌렸다.
비눗방울 같은 다채로운 표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퉁이가 불안정하게 깨져 나갔다.
“원래라면 쓰러졌을 걸, 재진 씨 가이딩 덕분에 아직도 버티는 거라고 생각하니 상당히 열 받네요 이거.”
“그럼…… 전부 사실이란 겁니까.”
“네, 보다시피.”
“……그렇군요.”
확답을 얻었다. 그것도 서의우에게서.
어떤 검사보다도 그가 더 믿음직했다.
“그래…… 그런 거군요.”
아.
이럴 수가.
혹시나, 어쩌면, 했는데…….
사실은 아직도 모든 게 얼떨떨했다.
등급테스트 때조차도 S등급 판정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 없던 권재진이었다. 말로는 S등급이라 들었지만, 실제로 자기 확신을 얻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권재진의 손에는 처음부터 구조를 뒤흔들 힘이 쥐어져 있었다.
서의우처럼 전지전능한 이능력을 뿜어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무력은 아닐지언정, 그에 못지않은 절대적인 힘이었다.
재진이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여러 생각이 찰나에 빠르게 뒤섞여 지나갔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마태오의 보호막이 절반 가까이 깨지고 있었다. 저대로 놔두면 곧 형체를 잃고 사라질 것 같았다. 권재진은 한결 가라앉은 마음으로 서의우의 팔꿈치를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