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서의우가 김이 나는 냄비 속을 가만히 응시했다. 음식을 볼 때면 항상 무감했던 눈빛이 오늘은 다소 흥미롭게 반들거리고 있었다.
“그건, 너 혹시…….”
권재진이 홀린 듯 오랜 습관을 따랐다. 잘 익은 고깃덩이를 하나 골라서 식히곤 서의우에게 내밀었다.
입술 바로 앞에 내어진 갈비 조각을 서의우는 사양하지 않았다. 단정한 입술을 열어 순순히 살코기를 받아 물었다. 육즙과 식감을 음미하며 오래도록 씹고, 목구멍 뒤로 천천히 삼켜 넘겼다.
곧게 뻗은 목에서 목울대만 조용히 오르내렸다.
권재진은 가만히 숨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의우의 뿌리 깊은 불균형 세 가지.
첫 번째는 불면이고, 두 번째는 불식이었다.
잠은 초반부터 곧잘 자게 되었지만, 식욕은 생길 기미도 보이지 않고 아직까지도 차도가 없었다. 그래도 반년 넘어가기 전에는 식욕이 생기리라 막연히 기다렸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꾸준히 가이딩 받으며 엉겨 붙어 지내다 보니 어느덧 두 번째 고비까지 지나온 것이다.
“하…….”
서의우가 나른하게 감탄했다.
오래도록 만성적으로 지속되었던 불균형이 비로소 조화를 이루며 퍼즐 조각처럼 알맞게 맞아 들어갔다.
식욕이 일어 음식을 섭취하는, 모든 동물이 당연하게 여기는 단순한 행위가 서의우에게만큼은 대단한 기적이었다.
그가 입술을 가늘게 떨었고, 눈매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길고 청순한 눈꼬리가 휘어지며 환하게 기쁨이 피어났다.
평생을 없이 살았던 식욕이 이제야 겨우 싹텄다.
고대하던 이 순간을 잠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의우가 경탄과 환희를 담아 권재진을 응시했다. 아침 햇살이 사선으로 내리쬐며 두 사람 사이에 빛으로 이루어진 다리가 생기는 듯했다.
“재진 씨, 나 지금…….”
“예, 지금…….”
“와, 이런, 하하…… 신기하네요. 섭취 과정이 곤혹스럽지 않았어요. 맛있어요.”
“그렇…… 잠깐, 뭐라고?”
곤혹스럽지 않았다니.
그럴 정도였단 말이야……?
“아니, 그냥요. 난 교육 훈련생 시절부터 억지로 배식을 비워 내야 했으니까. 그런 기억이 좀.”
“아…….”
“어릴 땐 남몰래 숨어서 속을 게우곤 했어요. 커서도 가끔은 그랬고.”
불균형한 몸에서는 음식이 받지 않는데, 생존을 위해선 억지로 영양분을 채워야 하고, 하물며 그런 사실을 주위에 들켜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나가듯 털어놓는 이런 단편적인 얘기만 들어도 서의우의 유년기가 어땠을지 그저 암담하고 착잡할 따름이었다.
“……몰랐습니다. 그런 정도였는지는.”
여태껏 식사 때마다 몸에 밴 습관을 따라 서의우에게 한 입씩 내밀어 주곤 했는데, 대체 왜 생각 없이 그랬는지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그냥 식욕이 없을 뿐이라고만 알았지, 곤혹스러운 수준인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절대 아무것도 먹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서의우는 권재진을 위해 요리를 배우겠다고 나섰고, 그럴 때조차도 전혀 싫은 내색 하지 않았다.
음식을 억지로 먹고 토해 냈던 과거가 있으면, 요리하는 것도 상당히…….
아니, 음식 자체가…….
꽤 역겨웠을 것 같은데…….
“왜 저한테 그런 건 말하지도 않고, 아니, 요리 배우고 싶다고……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겁니까?”
권재진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눈썹이 아래로 처지고 입도 살짝 벌어졌다. 유독 최근 들어서는 표정 관리에 자주 실패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이유를 꼭 물어봐야겠어요?”
서의우가 쿡쿡 웃으며 느른한 동작으로 허리춤에 맨 검은 앞치마를 풀었다. 조리대 옆에 걸어 놓고 개수대에서 손을 깨끗이 씻었다. 물기를 닦은 뒤, 걷어 올린 양쪽 소매를 하나씩 내리며 권재진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재진 씨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죠. 뭐 대수라고.”
손을 뻗은 서의우가 권재진의 귓가를 쓸었다. 동그란 귓바퀴 둘레를 따라 손끝으로 간지럽히듯 훑었다.
귀에 닿는 촉감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싫은 내색은 했어야지 않습니까…… 서로 감추는 것 없어야 한다고 그렇게 길길이 날뛰었으면서.”
“싫지 않았는데 어떻게 싫은 내색을 해요.”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난 다 즐거웠어요.”
서의우가 귓불을 꼬집듯이 손톱으로 슬쩍 찍어 눌렀다. 말랑말랑한 살점에 활 모양으로 손톱자국이 남았다. 서의우는 비슷한 위치에 세 개쯤 같은 자국을 눌러 찍으며 기분 좋은 티를 한껏 냈다.
“재진 씨를 먹이는 것도 좋았고, 재진 씨가 먹여 주는 것도 좋았어요. 지금도 그래요. 나한테 식욕이 생겨서 기쁘긴 하지만, 그보다도 재진 씨랑 같아져서 더 기뻐요.”
“…….”
“아, 이제 재진 씨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네요. 식사 때마다 남들은 무슨 기분인지, 왜 그렇게 배식을 기다리는지 좀 알고 싶었거든요.”
“……그렇습니까.”
도저히 뭘 어떻게 당해 낼 수가 없겠다.
권재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그냥 이렇게만 답했다.
“그럼 오늘 아침부터 같이 먹읍시다.”
“네에, 그래요.”
착잡한 권재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서의우가 픽 웃으며 귀를 지분거리던 손을 천천히 치워 주었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재진의 셔츠 깃을 바로 세워 주고 옷 주름을 펴 주었다.
“같이 식사해요. 재진 씨가 먹는 그대로 똑같이 먹어 볼래요.”
***
아침 식사를 마치고 권재진은 조심스레 의견을 전했다. 센터에 한번 다녀와야지 않겠냐고.
서의우는 상당히 언짢다는 듯 콧잔등을 구겼지만, 권재진을 잡아 가두고 싶다며 성질을 부리진 않았다.
“재진 씨는 거길 꼭 가야겠어요? 하필 오늘.”
“……시간 끌어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사태 파악을 해 둬야 그에 따른 대응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요. 재진 씨는 집에서 기다려요.”
“아닙니다. 저도 관련된 일인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같이 갑시다.”
권재진은 나름대로 긴장하며 서의우를 설득했다.
언제 또 서의우의 눈이 뒤집혀 난동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다.
꽤 가슴을 졸였는데, 예상외로 서의우는 순순히 재진의 뜻을 들어주었다.
“하, 알겠어요. 그럼 가요.”
아니, 답변은 순순했지만 살기 어린 눈빛이 이글대는 것을 보면 본심은 전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센터 따위 쳐부숴 버리고 권재진과 집 안에 틀어박혀 물고 빨고 싶은 욕망이 두 눈에 선연히 담겨 있었다.
예전 같았더라면 싫다고, 곧 죽어도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온 집 안이 이능으로 뒤집혀 진동했을 테지만, 이제는 그렇진 않았다.
서의우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고, 이제는 멈출 수도 망칠 수도 없어졌다. 독점욕에 이가 갈리고 질투로 눈이 벌게지더라도 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대신, 내 옆에만 붙어 있어요. 다른 에스퍼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아요.”
서의우가 터져 나오는 음험한 욕망을 필사적으로 눌러 담아 어금니를 짓씹고 당부했다.
이건 악질적인 덫이자, 낫지 않는 병이었다.
“다른 새끼 쳐다보는 것도 안 돼요. 나만 보고 있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 재진 씨를 건드리려고 하면 경고 없이 바로 뭉개 버릴 거예요. 난 미리 얘기했으니까 놀라지 말아요.”
“……그래.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이딩은…….”
“예…….”
“재진 씨가 검증해 보고 싶다는 건 알겠어요. 크리처 웨이브가 임박한 것도 알겠고.”
“예…….”
“무얼 위한 결심인지도 다 알겠는데……. 그 뜻을 실제로 행하겠다면, 그만한 각오도 해야 할 거예요.”
각오를……?
“나도 가능한, 참아 보려고 애쓰긴 하겠지만, 솔직히 지금은 전혀 자신 없어요.”
서의우가 권재진의 허리에 한쪽 팔뚝을 휘감아 힘껏 끌어안았다. 으스러뜨릴 것처럼 붙들고 험악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조각상처럼 정교한 이목구비에서 흉포한 충동이 넘실거렸다.
“재진 씨가 싫다는 온갖 개 같은 짓, 다 해도…… 아, 모르겠어.”
“그, 음…….”
“정말 가이딩 한다면, 재진 씨가 바닥을 네발로 기면서 울고 빌 때까지 좆질만 해 대도 안 풀릴 것 같아요. 힐링 팩터 스무 개씩 써 재끼면서 밤낮없이 좆 박아도 될까 말까 모르겠어요.”
“어…….”
“그러니까, 나한테 자지 박힌 채로 좆물오줌 질질 싸고 밥 먹어도 괜찮겠다 싶으면, 유리막대로 좆구멍 후벼지고 볼기짝 얻어맞아도 괜찮을 것 같으면…… 그만한 각오가 된 거면, 가이딩 해요.”
“…….”
“재진 씨가 바라는데 내가 어쩌겠어요. 이게 양보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저기.”
“네. 재진 씨.”
“양보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게 맞는 겁니까……?”
“맞지 않나요? 나 이것도 정말 많이 참는 건데. 상대방 잡아 죽이진 않는 거잖아요. 재진 씨 가둬 버리거나 기억 지우지도 않는 거고.”
“그렇게 말하면 그렇기는 한데…….”
“나 어떡해요 그럼. 방법이 없잖아요.”
“…….”
“재진 씨 사랑하는데 어떡해.”
권재진은 차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의우가 미친놈 같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그의 진심 어린 최선인 것도 사실이었다. 많이 참는다는 말도 진지하게 내뱉은 것일 테고.
저만한 짓 당할 각오 없이는 권재진더러 가이딩 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원래도 물러설 수 없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물러설 수 없어져 버렸다.
심사숙고한 끝에 재진이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