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133화 (133/154)
  • #133

    “그리고 또?”

    “또?”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봐요. 내일 해 놓게요.”

    “아……. 뭐…….”

    권재진이 고개를 돌리며 마지못해 대꾸해 주었다. 아무거나 떠오르는 대로 말해 주고 서의우를 빨리 재울 생각이었다.

    “감자 조림, 두부 부침, 고추장 불고기…….”

    “네. 그래요. 기억했어요, 하하.”

    서의우가 즐거운 웃음을 흘리며 권재진을 세게 끌어안았다. 곰 인형을 껴안듯 재진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서늘한 눈을 들었다.

    초점 잡힌 예리한 회색 눈동자에 잠기운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재진 씨.”

    “왜 또.”

    “지금도 나 사랑해요?”

    “…….”

    “그새 마음 바뀌진 않았나요?”

    “아니 뭘…….”

    재진이 당혹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밑으로 내리깔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잡시다. 좀 자라고 좀.”

    “잘 대답해요.”

    서의우가 미소 띤 낯으로 눈을 휘었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눈매가 다정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이 얼핏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웠고, 눈빛은 그의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까마득했다.

    별안간 서의우가 훌쩍 깊어진 것 같았다.

    어쩌면 성장했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재진이 잠시 뜸을 들였다.

    감자조림, 두부 부침, 고추장 불고기처럼 적당히 대꾸하고 재울까 했지만, 생각처럼 말이 쉽게 내뱉어지지 않았다.

    오래도록 가슴 밑창에 고여 진득하게 농축된 마음은 한 방울 짜내는 것조차 버거운 감정노동이었다. 벽돌 같은 이 덩어리를 쉬운 말로 토해 낼 방법 따위 권재진은 알지 못했다. 한번 시도할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고.

    입을 벌려도 어려운 한숨이나 연거푸 튀어나올 뿐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온갖 고뇌가 다 들었다. 질문을 모른 척 무시해야 하나, 화제를 돌려 회피해야 하나, 그냥 피곤해서 잠들어 버린 시늉이라도 할까…….

    한참을 망설인 끝에, 부스러기만 조금 입 밖에 끄집어냈다.

    “하…… 차라리 죽는 게 빠르겠다 싶긴 합니다.”

    “재진 씨는 죽어 봤잖아요, 이미.”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죽음이 빨랐다. 변심보다.

    “대답했으니 됐지? 이제 자는 겁니다. 입 닫고 눈 감읍시다.”

    재진이 이불 틈새로 손을 꺼내 서의우의 입을 덮고 턱을 꾹 밀었다. 서의우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권재진의 손바닥에 대고 픽 웃어 버렸다. 뜨거운 숨결과 입술의 감촉이 움직임이 무른 손바닥을 거쳐 선명히 느껴졌다.

    “이게요, 조금 알 것 같긴 하네요.”

    “서의우 너 자라니까…….”

    “재진 씨가 왜 나더러 애새끼 같고, 풋내 난다고 했는지. 이해가 돼.”

    서의우는 한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이며 권재진의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가락 사이에 입술을 맞추며 눈을 위로 올려 떴다.

    짙은 회색 눈망울에 숨 막히는 열망이 투영되어 보였다.

    “그동안은 재진 씨랑 이러고 있으면 마냥 행복하다고 느꼈거든요. 들뜬 어린애 같은 기분이었어요.”

    좋고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지금은 내가 녹는 것 같아요. 녹아서 스며들고 있어요. 그리고 나도 놀랄 정도로 진득하고 끈적한 게 내 밑바닥에 고여요. 무게추처럼 가라앉는 무언가가 있네요.”

    “…….”

    “마냥 행복하다기보다는, 저릿하고 좀…… 질병 같아요.”

    차분히 뇌까리던 서의우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성마른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일반인들은 누구나 평범하게 연애한다니, 죄다 행복하겠다, 부럽겠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리 쉽사리 일축해서 판단할 만한 게 아니었다.

    질병 같다는 무게추의 존재를 자각하고 짊어지자, 감정의 깊이가 심해처럼 깊어졌다. 저 아래 본질적인 근원까지 닿았다.

    “하나씩 돌이켜 보면 재진 씨 말이 전부 다 옳았네요.”

    “…….”

    “내가 참 안이했다. 그쵸?”

    서의우가 재진을 푹 끌어안고선 천천히 심호흡했다. 열띤 들숨과 날숨이 생생했다.

    잠시 그러고 멈춰 있다가 두 눈을 내리감으며 웃음기를 거두었다.

    “할 말 끝났어요. 이제 잘게요.”

    “……아, 어.”

    “잘 자요, 재진 씨.”

    “그래. 너도…….”

    이제야 서의우가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삽시간에 침실에 어둠과 적막이 드리워졌다.

    그렇지만 권재진은 그날 새벽까지도 귓가에 어른어른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깊은 물속에 잠긴 듯한 서의우의 목소리로, 사랑해요, 재진 씨, 사랑해요, 하는 울림이…….

    ***

    다음 날은 하루의 시작부터 훌륭했다. 보랏빛 안개 낀 어스름 너머 아름답게 비치는 서광에 눈이 뜨였고, 경이로운 일출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조금 이른 아침을 맞이하며 상념에 잠겨 있으려니, 서의우가 뒤이어 일어나 권재진을 짓뭉개고 간지럽혔다. 간단히 세안하고 씻고서 진한 커피를 내려 마셨고 서의우는 그 옆에서 아침상을 차렸다.

    새 저택, 새 침실, 새 주방.

    발을 디디고 선 곳 어디든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고 권재진에게 꼭 맞아떨어졌다. 낯선 장소인데도 평생을 살았던 것처럼 편안한 설렘이 있었다.

    잠시나마 일상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웬일로 꿈을 꾸지도 않았고.

    ‘며칠 전에는 폭우가 퍼붓더니, 오늘은 날씨까지 화창하네.’

    식사 마치면 서의우에게 잠깐 외출이라도 다녀오자고 말해 볼까……?

    그러고 보니, 슬슬 센터 측의 상황을 알아보기도 해야 할 터였다.

    등급 테스트 마친 후에 불쑥 사라졌고, 전투 끝난 후에도 바로 좌표 이동해 버렸으니. 혹시 모를 분란이 발생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찾아가 두는 게 나을 수 있었다.

    ‘하긴, 미적거릴 시간이 없긴 하지…….’

    크리처 웨이브는 현실이다. 장성들도 지금쯤 경각심을 느꼈을 테고. 어지간한 등신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크리처 웨이브를 앞두고 서의우를 적대하려 들지는 않을 터였다.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웃으며 손잡을 수밖에 없다.

    아니, 제정신이 박힌 사령관이라면 아집을 버리고 빳빳한 고개를 숙여서라도 서의우를 환대해야 마땅했다.

    ‘가이딩도 그렇고…….’

    권재진의 가이딩이 정말 에스퍼의 이능을 향상시키는 힘이 있는 것일까? 한 번은 명확하게 검증해 보고 싶었다. 사실 여부를 분명하게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생각을 마무리 지으며 재진이 커피를 비웠다. 카페인이 머리를 개운하게 틔워 주었다. 주방에서는 식욕을 돋우는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오고 있었다.

    어젠가 시답잖은 소리로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서의우가 소갈비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갈비탕을 냄비째 보글보글 끓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감자조림, 두부 부침, 고추장 불고기도 정갈하게 차리고 있고. 밥솥에선 흰 쌀밥이 알맞게 지어지고 있었다.

    권재진이 다 마신 커피잔을 개수대에 두고서 슬쩍 서의우의 곁으로 갔다.

    주방에서 분주히 요리하는 건 늘 권재진의 몫이었고, 서의우는 그런 권재진을 항상 방해하곤 했는데, 이젠 오히려 권재진이 서의우를 방해하게 생겼다.

    “재진 씨, 아침 거의 다 됐어요.”

    앞치마를 두른 서의우가 권재진을 돌아보았다.

    그가 느른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숨이 잠시 막혔다가 휙 틔었다.

    눈을 마주친 순간 이상하게 당혹스러웠다.

    깊게 팬 눈두덩이에 박힌 투명한 회색 눈동자.

    수없이 보아 왔던 서의우의 눈인데 어째서 새삼스레 긴장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서의우는 유려한 눈을 휘어 미소 짓고 있었고, 그건 마치 화사한 어둠처럼 보였다. 짙은 머리칼에 대비되는 색소 옅은 흰 얼굴이 흑백으로 칠한 캔버스처럼 선명했고 또 관능적이었다.

    “갈비 잘 익었는지 간 좀 봐 줄래요?”

    “어? 어……. 그래.”

    잠시 멍해 있던 재진이 식기를 찾아 눈을 돌렸다. 서의우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이능을 사용해 수저를 가져왔다.

    깨끗한 새 숟가락 하나가 그의 손으로 스르르 딸려 들어갔고, 서의우는 뜨겁게 끓고 있는 냄비에서 가장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흐르는 고깃덩이 한 점을 골라 담았다. 이능을 써서 숟가락만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잠깐만요.”

    서의우가 후, 후 숨을 불어서 고기를 식혔다.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게 눈에 보였다.

    “자, 아 해요.”

    “……아.”

    입을 벌리고 있는데,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순간순간이 시간을 잡아 늘인 것처럼 길게 느껴졌고, 시각, 후각, 촉각 등 오감도 예민해졌다.

    정말 별것 아닌 일상의 한 순간일 뿐인데,

    평범한 아침 식사 준비로 고기 간을 봐 줄 뿐인데,

    이런 게 왜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서의우의 모습이 망막 깊숙이 꿰뚫고 들어왔고, 맛있게 풍기는 냄새가 풍미를 돋구었다. 벌린 입 안에 들어온 갈비 조각을 씹는 순간 미각도 함께 반응했다.

    잘 무른 살점이 씹는 순간 부드럽게 찢어졌고 쫄깃하고 담백하게 맛있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이었다.

    “……맛있어. 잘 익었습니다. 되게…… 어, 무척 맛있습니다.”

    “그래요? 요리가 잘 됐나 보네요. 어쩐지…….”

    “어쩐지?”

    “오늘따라 음식물이 유독 먹음직스러워 보였거든요. 보통은 나무토막처럼만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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