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권재진이 느릿느릿 서의우의 머리에 손을 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잘생긴 이마가 드러나게끔 매만졌다.
“너는…… 너무 나만 보는 것 같아. 가끔 다른 것도 좀 봅시다.”
“싫어요. 내가 왜.”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말입니다.”
“혹시 뭘 몰라요.”
“아니 그냥…….”
불의의 사고로 권재진이 잘못될 수도 있는 거고…….
1회차 때처럼 되어 버릴 수도…….
권재진이 뒷말을 뱉지 못하고 삼켰다. 그냥 서의우의 머리카락만 쓸어 만졌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있으려니 격정적인 생각이 몰아쳤다.
1회차 서의우의 피폐한 눈동자가 떠올랐고, 그전에 거침없이 총을 쏘아 크리처를 사살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그간 겪은 장면이 머릿속에 역재생되었다.
아비규환이던 긴박한 전투 상황, 찢겨 죽은 특임부대원들, 폭주한 젊은 에스퍼의 절규, 검은 핏물이 흐르던 땅…….
‘……각성자의 삶은 그런 거였구나.’
이제야 비로소 생생하게 와닿았다.
서의우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서의우의 인생이 어땠을지.
그전까지는 그냥 막연하게 당연히 힘들었겠거니, 괴로웠겠거니, 기댈 사람 하나 없이 홀로 고독했겠거니 생각했지만, 직접 전투를 겪어 보니 칼을 수십 자루 삼킨 것처럼 속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안쓰럽고 가엾은 정도가 아니었다.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서의우와, 그를 비롯한 이 땅의 각성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 주고 싶었다. 고생했겠다고, 아팠겠다고, 애써 왔다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재진 씨, 지금 무슨 생각 해요?”
서의우가 커다란 손으로 권재진의 뺨을 붙잡아 눌렀다. 코끝끼리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권재진의 눈을 빤히 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뭔데 그래요.”
“아…… 그냥 이것저것 복잡해서 말입니다. 그 잔혹했던 전투 현장도 그렇고, 폭주한 에스퍼도 그렇고…….”
“……그럴 줄 알았어.”
그의 회색 눈동자가 권재진의 얼굴을 꿰뚫듯이 직시하며 질척하게 일렁거렸다.
“재진 씨가 마음에 걸려 할 줄 알았다고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런 거.”
“그런 거라니?”
“뭐가 됐든 그만 생각해요. 돌이킬 수 없는 거잖아요. 재진 씨만 힘들어져.”
“…….”
“사망자는 되살릴 수 없어요. 폭주한 에스퍼도 되살릴 수 없어요. 이미 끝난 거라고요.”
끝난…….
그래, 그건 그렇긴 하지…….
1회차 서의우와도 끝난 거긴 하다…….
권재진은 1회차 서의우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부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4년 후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와 함께할 방법도 없었다.
“……그렇겠지.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1회차 서의우는 어디까지나 쓰라린 과거일 뿐이었다.
권재진이 함께할 수 있는 건 2회차 서의우다.
권재진이 뒤바꿀 수 있는 것도, 2회차 인생이고…….
오직 지금, 생생히 살아 있는 현재뿐이다.
“그래도 애도는 하고 싶습니다. 각성자는 유족도 없는데, 그들을 슬퍼할 사람 하나 없을 것 아닙니까. 기억해 줄 사람도 없을 거고.”
확실히, 첫 전투의 후유증은 권재진의 영혼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앞으로 평생 권재진의 뒤를 따라다닐 망령이 될 터였다. 그렇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었다.
“동료를 잃고 실의에 빠지면 안 된다면서요. 임무에 지장이 가기에 기억을 지운다면서……. 그건 살아남은 자들뿐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못 할 짓입니다.”
“재진 씨…….”
“역시 잘못됐습니다. 이렇게는 안 됩니다.”
크리처 웨이브는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될 것이다.
전사자는 끊이지 않을 것이고 똑같은 비극이 반복될 것이다.
1회차 서의우가 무얼 기다리라는지 모르겠다. 권재진에게 뭘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권재진은 고민하며 망설이기보다는 당장 현재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아무래도 저는 이런 실상을 가만두고 보진 못하겠습니다. 모른 체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고…….”
권재진이 강건하게 읊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서의우가 권재진의 뒷덜미를 잡아 눌렀다.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세게.
“됐어요. 그만 생각해. 머릿속 비워요, 지금.”
“뭐……?”
“재진 씨가 어떻게 해결하려고요. 저번처럼, 에스퍼들 가이딩이라도 해 주고 싶다는 거예요? 그렇게 바꾸겠다고?”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옵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럼요? 그럼 뭔데.”
서의우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더니 종국엔 거의 짐승처럼 그르렁댔다. 서슬 퍼런 기세가 살벌했다.
“재진 씨가 한 생각이 뭐였냐고요.”
“아니, 난…….”
“내가 이래서 재진 씨 두고 가고 싶었던 거예요. 재진 씨는, 재진 씨는 항상…….”
그의 숨결이 날뛰는 것처럼 거칠었다. 불규칙하게 헐떡대던 서의우가 권재진을 계속해 불렀다.
“재진 씨. 재진…… 재진 씨.”
“……왜, 왜?”
“나 좀 불러 줘요.”
“뭐라고?”
“빨리! 의우야, 해 줘요.”
“갑자기 뭘…… 어?”
“의우야, 의우야, 지금 불러 달라고요.”
난데없는 요구였다.
서의우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도통 맥락을 읽을 수가 없었다. 권재진은 당황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며 입술을 빠끔 열었다.
“의…… 의우야.”
“또. 또 해 줘.”
“의우야……?”
“네, 재진 씨. 계속요.”
“아니,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계속 부르라니까요! 계속!”
“예? 의우야아…….”
권재진이 얼떨떨하게 의우야를 6번쯤 불러 주었다. 그래도 서의우는 부족하다는 듯 권재진을 꽉 껴안고 달라붙어서는 연신 채근해 댔다. 만족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이제 나 좀 봐요.”
서의우가 권재진의 턱을 그러쥐어서 서로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보게 했다. 권재진은 아직도 얼떨떨해서 서의우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보고 있는데.”
“아니, 제대로 보라고요.”
“그러니까…… 보고 있다니까.”
“안 보고 있어. 재진 씨,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만 했잖아요.”
“……?”
“다른 각성자들, 다른 에스퍼들, 그 밖에 다른…… 온갖 잡생각만 해 댔잖아요!”
서의우가 고통스럽게 윽박질렀다. 그 말을 듣고서 권재진은 멍해졌다.
“재진 씨 나한테 왜 그래요? 지금 우리 둘이 있는데도, 왜 계속 그래……?”
“…….”
“재진 씨 눈에 나는 들어오지도 않아요? 내가 아까, 헷갈린다고 말했잖아요. 나중에 말하겠다고 했잖아……. 그게 뭔지 묻지도 않고. 안 궁금해요? 잊어버렸어?”
“아니…….”
“이제 나한테는 아무 관심이 없나요? 나 질렸어요?”
서의우가 두서없이 소란을 피웠다. 권재진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또 예기치 못한 서의우의 발언에 그저 넋이 나갔다.
무수한 크리처 군단과 맞서고, 숱한 생명이 죽고, 하물며 에스퍼 하나가 폭주하는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서의우는 그보다 권재진이 자신에게 집중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집착했다.
서의우에게 권재진 외의 일은 모조리 뒷전이었다.
항상 권재진이 1순위고, 권재진도 자신에게 그러길 바랐다.
서의우가 권재진의 옷자락을 쥐고 긁었다. 등을 휘감은 전투복이 서의우의 앞발질에 구겨졌다. 코팅된 재질이라 겉면에 묻은 빗물이 그의 손등을 타고 흘렀다.
“나는, 재진 씨가 이러면, 못 견디겠단 말이에요. 헷갈린다고요.”
서의우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어둑한 혼란에 젖은 눈동자가 아래로 내리깔렸다.
권재진이 어, 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서의우를 말렸다.
“잠깐만 좀, 의우야. 뭐가 헷갈린다는 겁니까?”
“……내가, 내가 자꾸.”
“예…….”
“……재진 씨에게 심한 짓을 해 대고 싶어져요. 그런 충동이 들어.”
“예……?”
“……지금은 재진 씨를 좀 가둬 놓고 싶어요.”
지옥불 같은 치정이 서의우를 더글더글 들볶았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그의 뱃속 깊은 곳에서 처절한 아우성을 내질러 댔다.
가이딩은 부족하지 않고, 원하는 때 언제든 손 뻗으면 권재진을 품에 끌어안을 수 있는데도.
권재진과 연인으로 맺어졌고, 이제는 순조롭고 부드러운 눈빛을 받게 되었는데도.
원했던 모든 것을 다 얻어 냈는데도.
서의우는 아직도, 여전히, 지난한 결핍에 시달렸다.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혼란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권재진과 이렇게만 지낼 수 있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겠다 싶게끔 지금이 좋은데, 한편으론 이 땅의 생명체를 몽땅 다 죽여 없애 버리고 싶은 격정적인 충동이 치솟곤 했다.
차라리 다 없애 버리고 가루로 만들면, 폐허가 된 황무지에서 권재진과 단둘이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끝없는 모순이 서의우를 고뇌 속에 빠트렸고, 독점욕과 구속욕, 질투가 자꾸만 끓어올랐다.
그러니까 치정이다.
욕정, 연정, 그리고 치정.
이제는 권재진이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 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서의우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하는 것조차 싫었다.
자꾸만 세상 밖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제게로 가둬 두고 싶었고, 구속하고 옭아매서 싶었다.
차라리…… 권재진을 통째로 삼켜 버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진 씨가 나만 보고, 나만 생각하면 좋겠어요. 가이딩이든 뭐든, 다른 인간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누가 폭주를 하건 말건 그냥…… 나 말고는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오로지 나만……. 재진 씨가 나만, 봤으면 좋겠다고요.”
“…….”
“자꾸 위험한 충동이 일어요. 재진 씨가 다른 새끼들 가이딩 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정신이 나가 버렸던 것처럼……. 미칠 것 같아요.”
서의우가 답답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어떤 말로 표현하더라도 그가 느끼는 이 음험하고 위태로운 감정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애정하는 상대에게 폭력적인 충동을 느끼는 게 정상인가? 서의우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고, 권재진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불안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