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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117)화 (117/154)

#117

그때, 서의우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호전적으로 대꾸했다.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이능의 향상 같은 건 없습니다. 그리고 혹여 가이딩에 그런 효과가 있었다고 한들 상관도 없습니다.”

“상관없다니?”

“권재진은 제 가이드입니다. 보다시피 S등급 판정받았으니 앞으로 저와 매칭되어야 합니다. 에스퍼의 이능을 향상시킨다? 그렇다면 뭐……, 그걸 구실 삼아 다른 에스퍼와 매칭시키기라도 할 겁니까? 대체 누구와 가이딩 시키려고?”

“글쎄…… 그건 윗선에서 결정할 일이겠지. 내겐 권한이 없다.”

“권한이 없는 건 윗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깍듯한 경어를 쓰고 있긴 하지만, 서의우는 제대로 눈이 돌아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서의우가 팔을 뻗어 장 중령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빳빳한 검은 전투복이 서의우의 손아귀에 틀어 잡혀 무참히 구겨졌다.

“중령님. 모쪼록 상부에 헛짓거리할 생각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멱살을 끌어당긴 서의우가 장 중령에게 경고를 담아 뇌까렸다. 서늘한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냉정했다.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상대가 누가 됐든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권재진 손끝 하나만 건드려도 남은 생 에스퍼 구실 못 하도록 만들어 버릴 테니까…… 아시겠습니까?”

상관에게 항명하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하극상을 벌이는 행태에 장 중령을 비롯해 검사실의 연구원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연구원들을 위압했을 때와는 달랐다. 지금 기세와 비하면 그건 장난 수준이었다.

불타오르는 서의우의 회색 눈동자가 흉포했고, 무엇보다도 진지했다.

“……예상은 했다만, 여간한 일이 아니었군.”

장 중령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서 중얼거렸다.

어지간한 각성자였다면 공포로 생각이 마비되었겠지만, 장태산 중령에겐 공포를 이겨 내는 담대함과 우직함이 있었다.

“마 대위도 그랬지. S급 가이딩을 얻을 수 있다면 상부의 명을 거역한다 해도 상관없다는 눈이었다.”

“……지금 누구와 비교하는 겁니까.”

그 말에 서의우가 더욱 광분했다.

마태오와 같은 선상에 놓였다는 점을 특히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권재진, 자네가 무슨 파란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이나? S급 가이드의 존재는 에스퍼에게 마약이라도 되는 듯하군. 그건 독이다. 서 대위, 정신을 차리도록. 서 대위를 위해 하는 말이야!”

서의우가 어금니를 부술 듯이 세게 짓씹었다. 그에게서 막대한 이능이 흘러나왔고, 검사실 바닥재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벽이 뒤틀리고 조명이 껌뻑거렸다.

장 중령도 그에 맞서고자 강화계 이능을 끌어 올려 자신의 신체를 강화했다. 곰같이 육중한 장 중령의 근육이 강철판처럼 딱딱해졌다. 그렇다 해도 서의우를 당해 낼 수 없다는 건 피차 알고 있었다.

장 중령이 또다시 눈과 귀를 비롯한 온갖 구멍에서 피를 쏟을까 싶어진 권재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장 중령님, 서의우의 말이 맞습니다. 저 역시 서의우가 아닌 다른 에스퍼와 매칭된다면 거부할 겁니다!”

S급 판정을 받고 안심했던 것이 불과 몇 분 전이었건만, 보란 듯이 파란에 휘말려 버렸다. 권재진의 삶에 끊임없이 광풍이 불어닥치는 듯했다.

“제 가이딩으로 에스퍼의 이능을 향상시키는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과가 어떻든 저는 서의우만 가이딩 합니다. 그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이능의 향상이라…….

권재진이 정말로 다른 에스퍼들의 이능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건가? 가이딩으로?

‘서의우는 가이딩해도 불균형만 해소될 뿐이었다. 그렇다면 마태오처럼 나보다 낮은 등급의 에스퍼와 가이딩 할 때만 그런 효과가 발생하는 건가……? A등급 이하, 즉 서의우를 제외한 나머지 에스퍼……?’

<에스퍼의 이능을 증폭하는 가이딩.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세상이 뒤집힌다.>

‘아니, 설마……. 그런…….’

권재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느릿하게 떴다.

어쩌면 이건 다시 없을 기회일지 몰랐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우린 크리처 웨이브에 대비할 겁니다. 몰려드는 크리처와 싸우며 대대적인 군 체제 개편을 이룰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가 필요할지, 얼마만큼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방향성은 확고합니다.>

<앞으로 돌연변이는 죽지 않을 것이고, 가이딩은 인도적인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고, 원한다면 어느 거주지역이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바뀔 겁니다.>

고개를 숙인 재진이 아래를 보았다. 서의우가 깨부순 바닥재가 들떠 발밑이 울퉁불퉁했다.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마태오가 떠올랐다.

그와 접촉했던 당시엔 치가 떨렸고, 차라리 죽고자 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크리처에게 당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입술과 혀를 만져져서 끔찍했었다. 가슴이 붙들려 돌연변이임이 발각당했을 땐 정말 모든 게 끝난 줄만 알았다.

그때와 비하면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 칼자루는 권재진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지금 권재진은 선택할 수 있었다.

‘그때 마태오가 그 정도 접촉만으로 이능이 향상됐다면, 그렇다면…….’

재진이 앞으로 한 발 나아가며 말했다.

“……기존 방식의 가이딩이라면 그렇습니다. 서의우가 아닌 에스퍼에겐 결단코 응하지 못합니다.”

나아가는 동시에 손을 살짝 내밀었다.

“다만, 인도적인 방식의 가이딩이라면…….”

<돌연변이를 사살할 게 아니라, 각성자식 가이딩을 바꾸면 될 일입니다. 점막 접촉 아닌 피부 접촉만으로 가이딩은 이뤄집니다. 손만 잡더라도 될 것을…….>

“점막 접촉 아닌 피부 접촉. 손을 잠깐 잡는 정도라면 가이딩 해 볼 의향 있습니다.”

만약 권재진이 지금 제 손에 들린 칼을 휘두른다면, 새로운 방식의 가이딩, 새로운 역사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지 않을까.

그걸로…… 바뀔 수도 있지 않나……?

***

<점막 접촉 아닌 피부 접촉. 손을 잠깐 잡는 정도라면 가이딩 해 볼 의향 있습니다.>

권재진이 그 말을 뱉은 직후, 새하얀 빛이 번쩍거렸다.

사방으로 빛 방울이 폭발하듯 강렬하게 흩어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저택 지하, 벙커다.

오전에 자고 일어난 모습 그대로 바닥에 하얀 시트가 깔려 있고, 주변에 포장지가 뜯긴 간이 식량과 빈 물통이 놓여 있었다.

“아니 이게…….”

권재진이 얼떨떨하게 서의우를 돌아보았다. 그가 왜 갑자기 좌표 이동을 사용해 저택으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권재진은 아직 하얀 가운 형태의 검진복 차림이었다. 탈의실에 옷을 놔둔 상태로 이동해 버리다니…….

“의우야?”

권재진이 느끼지 못한 위험한 전조가 있었나?

그 즉시 자리를 피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나?

재진이 의아한 눈을 뜨고 서의우를 살펴보았다. 침착한 검은 눈동자에 서의우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창백했다. 마치 시체처럼.

“……왜, 왜 그랬어요.”

고개를 푹 숙인 서의우가 권재진을 추궁했다. 흩어진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린 탓에 그의 눈동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재진 씨,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무슨, 제가 뭐가 말입니까.”

“손, 잡는다고, 왜!”

“어……?”

“손을…… 아니, 손…… 잡겠다고? 정말?”

서의우가 발작하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제정신을 차리질 못하는 것 같았다. 크게 심호흡하며 헐떡인 그가 고개를 홱 쳐들고 무서운 눈으로 권재진을 몰아세웠다.

재진이 뒷걸음질 쳤고, 차가운 벽에 등이 닿았다.

“예, 뭐……. 그게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그냥 악수하는 것뿐인데.”

“재진 씨 정신 나갔어요?! 가이딩이잖아요!”

서의우가 맹렬하게 고함쳤다.

너무 격렬한 반응에 재진이 흠칫 놀라 굳었다. 서의우가 권재진을 상대로 저렇게 미친 듯이 화를 내다니 믿기지 않았다. 재진이 무얼 그리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잘 모르겠다.

“가이딩인 건 압니다! 알지만 그냥 손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닙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걸 계기로 다 바뀔지도 모르잖습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에스퍼의 이능이 향상되는 가이딩이다.

고작 손을 잡는 것만으로 그런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면, 오랜 세월 통제당해서 생겨난 에스퍼들의 고정관념이 산산이 깨질 것이다. 점막 접촉을 하지 않더라도 가이딩 받을 수 있고, 효율만 따져서 구멍에 처박아 댈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손 정도는……?”

피식 헛웃음 친 서의우가 권재진의 손목을 거머쥐고 당겼다.

“손 정도는?”

주먹 쥔 재진의 손을 억지로 펼쳐서 손가락 사이에 손깍지를 꼈다. 격분한 서의우가 힘주어 잡아 누르는 탓에 손마디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럼 질문 하나만 할게요. 재진 씨 손을 잡으면서, 에스퍼가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요?”

“윽, 아. 잠깐.”

“대답해요. 의우야가 묻잖아요.”

서의우가 벽에 눌린 권재진에게 바짝 붙어 섰다. 서로 가슴이 맞닿았고 허벅다리가 얽혔다.

“몰라요? 대답 안 해? 그럼 지금 재진 씨 손 잡고 있는 난 무슨 생각 할 것 같나요?”

“…….”

“재진 씨, 아직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서의우가 권재진의 손을 맞잡은 상태로 몇 번 주물럭거렸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서의우는 발기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무방비한 거예요……. 내가 몇 번이나 말했죠. 에스퍼는…… 에스퍼란 족속은, 하나같이 가이딩에 눈이 벌게서 추잡하다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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