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알겠습니다.”
재진은 먼저 물부터 마시고, 큐브 형태의 간이식을 씹어 먹었다. 공복이 길긴 길었던 모양이다. 음식물이 입에 들어오니 위장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퍽퍽하고 차가운 간이 식량인데도 맛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입 안에서 부스러지는 옥수수 전분이 달았다.
‘그래…… 먹으니 좀 살겠네.’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허기를 채우자 거짓말처럼 진정되었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잘 자고 밥을 잘 먹어야 하는 법이지…….’
식사에 열중한 권재진을 보고서 서의우가 눈웃음 지었다. 쌍꺼풀 없는 기다란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더 먹을래요? 많아요.”
권재진의 앞으로 간이 식량이 두 팩이나 더 날아와 포장이 절로 뜯어졌다. 재진은 개중에 가장 완벽한 정육면체 형태로 예쁘게 생긴 건조 큐브를 집어 서의우의 입가에 대 주었다.
“아.”
서의우는 사양하지 않고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간식 받아먹는 강아지처럼 재진의 손가락까지 같이 입에 물고 쪽 빨았다. 따뜻하고 말캉한 혀가 손끝에 감겼다.
서의우가 다시금 눈웃음 지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잠도 잤고, 배도 채웠다. 권재진은 이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서의우는…….
불현듯 저택에 온수가 나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서의우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
이번에는 두 사람 다 외투와 신발을 제대로 갖춰 입고서 집을 나섰다. 새하얀 빛 방울이 환하게 흩어졌고, 빛이 걷힐 무렵엔 달라진 기온을 체감할 수 있었다.
약간의 추위를 느끼며 주변을 살피자, 센터를 빙 둘러싼 격벽의 중앙 출입 관문 앞임을 알 수 있었다.
높다란 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열릴 기미조차 없었다. 지금은 개문 시간도 아닌 데다가 권재진이 인식표를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의우도 마찬가지고.
대신 관문 앞에 인솔자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대기하던 남자가 불쑥 나타난 두 사람을 향해 슬쩍 인상을 썼다. 무균이동실도 아닌데 좌표 이동을 사용하다니.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서의우의 이능 때문에 절로 표정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 대위. 그리고 권재진.”
“중령님.”
서의우는 그 인솔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권재진에겐 낯선 얼굴이었다.
어디서 한 번쯤 본 듯도 한데,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진 않았다. 적어도 뉴스에 나올 정도로 요직을 차지한 고위층 인사는 아닌 듯했다.
그는 서른 후반에서 마흔 정도의 연배로 보였고, 격식을 차린 전투제복이 아닌 현장에 쓰이는 전투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진중하고 노련한 눈을 갖고 있었으며, 바위처럼 딱딱한 근육질 몸에 덩치는 곰처럼 커다랬다.
첫인상만 보자면 완벽한 무인, 장군 같았다.
까마득한 옛 시절에 태어났으면 무과에 급제했을 상이었다.
“제1 특임부대 지휘관, 장태산 중령이다.”
소개를 듣자 비로소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서의우의 직속상관이었다.
‘……아. 내 시체를 가져오라 했다던.’
<장태산 중령 누군지 알아요? 제1 특임부대 지휘관. 내 상관. 나더러 재진 씨 죽여서 시체를 가져오래요.>
재진이 짤막하게 화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권재진입니다.”
그러자 알 수 없게도 장 중령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곁에 선 서의우가 친절히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처음은 아니죠. 봤을 테니까, 그때.”
“예? 아…….”
“장 중령님, 하필 마태오 옆에 계셨던데. 회복이 참 빠르십니다.”
그제야 권재진은 장태산 중령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듯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던 장 중령의 모습이 뒤늦게 떠올랐다.
“마태오? 서 대위답지 않게 불손한 언사로군. 눈빛도.”
장 중령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권재진의 곁에서 강력한 보호막을 일으키고 있는 서의우를 유심히 살피다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마 소령이 강등당한 소식을 전해 듣기라도 했나? 마 대위가 되었지. 자, 이걸 받아 걸도록.”
“그런 사실 있었습니까. 모릅니다.”
장 중령이 내민 것은 팔찌 형태의 고리 모양 출입증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인식표를 분실하거나 파손한 각성자들이 센터에 출입하지 못할 때 임시로 발급받는 일회성 신원증명이다.
서의우가 대신 출입증을 받아 손수 재진의 손목에 끼워 주었다. 그냥 끼워 주는 것도 아니고 팔찌를 옷소매로 꼼꼼하게 한번 닦아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레 채워 주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장 중령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 오묘해졌다. 때마침 서의우가 장 중령을 돌아보았다.
“출입증은 하나입니까? 저도 인식표를 소지하지 않았습니다만.”
“무슨 소린가, 그게.”
“그냥. 갈아 버렸습니다. 출입증, 없습니까?”
“……?”
다행히 장 중령이 예비용 출입증을 하나 더 지참한 참이었다. 고글로 센터와 통신해 서 대위의 정보를 연동한 후 즉석에서 출입증을 추가로 발급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처리가 끝난 출입증을 서의우가 팔목에 찼다. 그 모습을 보며 장 중령이 미간을 찡그렸다. 딱딱한 이마에 깊은 골이 팼다.
오래전부터 장태산 중령은 서의우를 대할 때마다 어딘가 비틀리고 어긋난 감을 느끼곤 했었다. 서의우의 언행에서 묘한 의구심이 들었고, 그렇기에 부러 시간을 할애하여 그의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러나 의심은 언제나 의심으로 막을 내릴 뿐, 확실한 물증이나 정황을 발견한 적은 없었다.
장태산 중령이 알기로 서의우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타인을 속이는 것이 무척 능숙한 자였다. 그렇기에 S급 돌연변이 권재진을 빼돌리는 대담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서의우는 영 딴 사람 같았다.
심속을 알기 어렵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고, 권재진을 지키고 선 뒷모습만 보더라도 대놓고 흉악한 경고의 의도가 느껴졌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며 살기를 뿌리는 듯했다. 반면 권재진을 향할 때의 태도는 또 정반대였다.
“재진 씨, 출입증을 착용했으니 이제 관문이 열릴 거예요. 어때요, 준비됐으면 들어갈까요? 아니면 좀 둘러보다 갈래요?”
서의우의 말투가 기이할 정도로 사근사근했다.
게다가 눈빛은 부드럽게 풀려 말랑하게 녹아내려 있었다.
저것이 정녕 서의우가 맞는지, 아니면 서의우의 인두겁을 뒤집어쓴 타인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대로도 좋습니다. 준비됐으니 들어가겠습니다.”
팔에 찬 출입증을 한번 슥 내려다본 권재진이 서의우에게 가자는 신호를 주었다. 서의우는 ‘네, 재진 씨.’ 하고 답하며 장 중령이 생전 본 적 없는 환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권재진은 놀랍지도 않는지, 서의우의 저런 표정이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고 무심하게 그를 뒤따랐다.
“허…….”
장 중령도 미간에 골이 팬 낯으로 동행했다.
세 사람이 출입 관문 앞 인식기에 다가서자 자동으로 인식표와 출입증 정보가 각각 식별되었다. 화면에 세 명의 신원과 소속이 떠올랐고, 기계음으로 또박또박 읽히기까지 했다.
-중령 장태산, 제1 특임부대. 대위 서의우, 제1 특임부대. 무계급 권재진, 무소속.
그 후, 관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문처럼 좌우로 열리는 구조였다.
서의우와 함께 좌표 이동으로 침입할 때는 손쉽게 본부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정식 절차를 밟으려니 이제야 부지 안으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고개를 든 권재진이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다시 찾은 센터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아니, 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보다 더 위용이 대단했다. 아래쪽에서 보니 부지를 에워싼 격벽이 높아 고개가 뒤로 꺾일 정도였고, 구획별로 나뉘어 겹겹이 에워싼 벽과 건물의 모습은 그야말로 성채였다.
또한 밑에서 보니 중앙관, 교육훈련관, 연구개발관 외에도 소규모 건물들이 단지를 이루며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기고나 물류창고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건물들 같았다.
“군용차량에 탑승하여 가도록 하지.”
격벽 안쪽에 장태산 중령이 타고 나왔던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운전석에 운전병으로 보이는 앳된 외모의 각성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장 중령은 앞자리에 타고 서의우와 권재진은 뒷자리에 탑승하여 센터 중앙관까지 이동했다. 재진이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풍경과 저 멀리 펄럭이는 신정부의 깃발을 보았다. 서의우는 혹시 모를 기습이 있지는 않을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직선으로 난 도로의 끝, 중앙관 앞까지 도달했다. 이곳에도 인식기가 있는지 계단을 올라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세 사람의 정보가 식별되었다. 다행히 이번엔 기계음으로 읽어 대진 않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현대적인 건축물에 내부 설비도 최신식임을 알 수 있었다.
1층 홀만 봐도 위압적인 넓이였고, 층고도 대단히 높았다. 홀 전체가 원통형으로 위까지 쭉 뚫린 구조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막힌 천장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