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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113)화 (113/154)

#113

샤워를 마친 후, 비상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나마 멀쩡한 지하 벙커로 내려갔다.

등록된 생체 인증으로만 개폐된다는 바로 그 비상 대피소다.

저택에 두 번씩이나 불을 지르고도 가 보지 못한 곳인데, 기어이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다니. 지난 생에 못 했던 경험을 이번 생에 다 해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벅꾸벅 눈이 감기는 권재진을 위해 서의우가 벙커 안쪽 구역에 새 시트를 깔아 주었다. 권재진은 그 위에 눕자마자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지쳐 잠들었고, 곧장 검은 우주로 빠져들었다.

재진이 잠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꿈이 시작되었다.

어김없이 토성과 그 위성이 보였고, 은하수를 넘어 다가오는 크리처 무리가 보였다.

확연히 가까워진 마물 군단에 눈살을 찌푸리기 무섭게 재진의 두 손이 묵직해졌다.

밑을 내려다보니, 손아귀에 당연하다는 듯 애착소총이 들려 있었다.

심지어는 손에 장갑이 끼워져 있고 복장도 바뀐 모습이었다.

포켓이 여럿 달린 검고 빳빳한 전투복과 가슴 위로 단단히 조여 맨 검은 가죽 하네스가 보였다. 머리엔 고글까지 완벽히 씌워져 있다.

서의우가 항상 갖춰 입던 각성자의 전투 복장을 권재진이 입고 있었다.

흠칫 놀란 재진이 목덜미를 더듬어 보았다.

곧은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늦었네요.’

등 뒤에서 서의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앳된 티를 벗고 성숙한 사내로 성장한 서의우다. 지금보다 더 커다란 키를 지녔고, 거칠고 야성적인 눈빛도 한결 갈무리되어 고요했다. 가르마는 늘 그렇듯 왼쪽이다.

그는 24살의 서의우였고, 권재진의 기억 속에만 남은 존재였다.

‘봐요, 재진 씨. 아직도 저렇게나 많이 남았어요.’

서의우가 손가락을 뻗어 크리처를 향했다. 굳이 그렇게 가리키지 않더라도 잘 보고 있었다.

‘……압니다. 이젠 도망치지도 않습니다.’

재진이 총을 장전했다. 발포 자세를 취한 뒤 하나씩 빠르게 사살해 나갔다.

이곳이 권재진의 꿈이라 그런 것인지, 명중률이 제법 올라 있었다. 두 마리고 세 마리고 거침없이 연속으로 곧잘 머리를 맞힌다.

‘잘하네요. 많이 늘었어요.’

‘이것 때문입니까? 크리처 웨이브 때문에.’

재진이 담담한 투로 물었다. 말을 건네면서도 총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감으로 쏴 맞히는 것이기에 빗나가지 않았다.

‘4년씩이나 앞선 미래를 알고도 도망치려 했던 게 한심해 보였습니까? 숨어서 연애질이나 하지 말고 나와서 싸워라…… 뭐 그런 말을 하고자 끈질기게 꿈에 나타나는 겁니까?’

앞만 보고 발포하고 있는데도 옆에서 서의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강렬한 눈빛이 권재진의 얼굴을 꿰뚫고 있었다.

‘음……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고작 이 정도로 끈질기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리고, 내가 참으라고 했죠.’

‘뭐?’

‘아직 날 원망할 때가 아니에요. 그건 멀었어요.’

서의우가 느른하게 중얼거리며 팔을 뻗었다. 사격 자세를 고쳐 주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의 메마른 손이 뺨에 닿았다. 손끝이 피부를 누르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턱의 옆면을 따라 차근히.

권재진의 얼굴 반쪽을 덧그리듯 훑은 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동그란 귓바퀴를 타고서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사르르 넘어갔다.

‘나중에요.’

‘…….’

‘다 지나고, 나중에…….’

재진이 헛숨을 들이켰다. 혀끝에 남은 씁쓸한 뒷맛을 삼키곤 매정하게 답했다.

‘……나중 같은 건 없습니다. 그때쯤엔 내가 널 다 잊었을 거니까.’

돌연, 그가 손아귀를 움켰다.

커다란 손바닥 가득 재진의 새까만 직모를 그러쥐었다. 머리카락을 잡는 모양새가 마치 권재진을 붙잡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곧 구속이 풀렸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 손을 떼어 낸 서의우가 대신 재진의 머리통에 얹힌 고글을 툭 건드렸다.

‘써 봐요.’

‘……?’

‘아니다. 내가 씌울게요.’

그가 각진 고글 테를 잡고 재진의 얼굴에 씌웠다. 콧등에 딱 맞도록 씌워 주는 손길이 머리카락을 쥘 때보다 더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뭡니까? 됐습니다. 전 이거 사용할 줄도 모릅니다.’

재진이 연이어 헛발을 쏘았다.

‘알아. 일단 해 봐요. 익숙해지면 도움 될 거예요.’

‘아니…….’

대체 뭘 어떻게 해 보라는 건지.

이 고글은 안구 움직임으로 조작하는 기기 아닌가?

현실에서 경험해 보지도 못한 장비를 꿈속에서 착용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

거절이 무색하게끔 권재진의 얼굴에 꼭 맞게 고글이 씌워졌다. 귀가 집히지는 않았는지, 머리카락이 끼이진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한 서의우가 고글 옆면을 눌러 화면을 켜 주었다. 그러자 눈앞에 크리처와 푸른 홀로그램이 떠올라 보였다.

‘처음이니까 자동모드로 둘게요.’

‘뭔…….’

도통 모르겠다.

이것도 꿈이고, 권재진의 무의식인가?

현실 도피를 하고자 이런 꿈을……?

아니, 처음 우주와 토성 꿈을 꾸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현실 도피임이 분명했지만, 어느 즈음부터는 거기서 빗나간 듯했다. 갈수록 꿈의 내용이 수상쩍어지고 있었고, 이제는 이 꿈이 정말 권재진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고글 화면에 홀로그램이 정신없이 펼쳐졌다. 크리처의 수와 종, 거리 등 각종 정보가 차례로 떠올라 보였다.

어지럽고 낯설다.

‘윽, 정신 사납습니다. 이게 뭐야.’

‘하하.’

‘……그 얼굴로 웃지 마십시오. 꼴 보기 싫습니다.’

재진이 조금 신경질을 내며 난폭하게 총을 쏴 갈겼다. 그렇게 내키는 대로 마구 쏘는데도 이젠 자세나 반사 속도, 집중력 전부 흠잡을 곳 없이 숙련되어 보였다. 정예 전투원과 비교하면 아직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민간인의 솜씨는 결단코 아니었다.

새카만 우주에 크리처가 흘린 검은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쓰러진 사체를 밟고 크리처가 튀어 오르고, 또 그 뒤로 다른 크리처가 튀어 오르고, 아무리 쏘아 죽여도 끝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권재진은 땀을 흠뻑 흘리며 사격에 빠져들어 열중했다.

주변 소리도 들리지 않고, 24살 서의우의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를 향한 원망이나, 잊어버린 가족, 센터, 최율 대장 등, 머릿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여러 문제도 차츰 휘발되어 날아갔다.

정신이 맑아졌다.

헐떡이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눈앞의 목표만이 분명하고 또렷해졌다.

***

꼬박 하루 가까이 잠들었다 깨어났다.

푹 자고 일어난 덕인지 몸 상태가 한결 나았다. 살짝 미열이 남았고 목도 좀 칼칼하긴 해도 개운했다.

재진이 고개를 뒤척이며 잠자리를 확인해 보는데, 평소와 다르게 낯선 풍경이 보였다. 침대가 아니었고 바닥에 깔아 둔 시트에 누운 상태였다. 벽도 벽지 발린 벽이 아니라 두꺼운 철판처럼 보였다.

그제야 지난날 기억이 떠올랐다.

‘아, 그래…… 저택이 부서졌지. 지하로 내려와서 잤고.’

차근히 상황을 돌이켜보는 권재진을 서의우가 불렀다.

“재진 씨.”

서의우는 늘 그렇듯 권재진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다만 평소처럼 나란히 누워서 허리를 끌어안은 자세는 아니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다리 사이에 권재진을 눕혀 두고 있었다. 베개 대신 그의 가슴을 베도록 내어 주면서. 습격이라도 당하면 언제든 일어나 반격할 준비가 된 자세였다.

재진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잠기운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초점 잡힌 회색 눈과 시선이 맞았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지나치게 깔끔하게 들렸다.

숙면하고 일어난 권재진과 달리 서의우는 아예 한숨도 안 잔 것 같았다.

“……의우야, 너 계속 이러고 있었던 겁니까?”

“응? 아, 네.”

“잠은? 안 잤고?”

“난 불면이 익숙하니까요. 그보다 재진 씨 잠자리 불편하지 않았어요? 자꾸 뒤척이던데.”

서의우가 재진의 겨드랑이 밑에 팔을 꿰어 제 쪽으로 당겼다. 누워 있던 권재진의 몸이 이불째 묵직하게 들려 올라가면서 그의 품 안으로 쑥 들어갔다.

성인 남성의 무게도 손쉽게 다루는 서의우의 근력은 몇 번을 겪어 봐도 적응이 안 됐다.

“바닥 딱딱했죠. 춥기도 했을 거고……. 근육통은 없나요? 저리진 않나? 내가 허리 주물러 줄까요?”

“아…… 괜찮습니다. 잘 잤습니다.”

“그래요? 그럼 배는, 안 고파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은 게 없잖아요.”

서의우가 슥 눈짓하자 지하 벙커 다른 구역에 보관되어 있던 간이 식량과 생수가 날아왔다. 포장이 저절로 뜯기고 물 뚜껑이 따졌다.

“주방은 망가졌더라고요. 일단 이거라도 먹어요. 먹고 나가야죠.”

나간다…….

‘나간다’……!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동사 하나가 귀에 콱 들이박혔다. 머리카락이 삐죽 서면서 잠이 확 깼다. 그렇다. 밖에 나가는 것이다.

등급 테스트 일정이 잡혀 있다.

어제 갔던 센터에 다시 가야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정식으로. 그러니까 다시 말해…… 정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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