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110)화 (110/154)

#110

숨이 막히는 정적. 침묵이 길었다.

대치가 길어지며 끊어질 듯한 긴장 상태도 한계에 달했다.

최 대장의 푸른 홀로그램은 이제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깜빡거리고 있었고, 앉은 자세로 이능에 짓눌려 굳은 장성들의 낯빛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배어 나온 진땀이 그들의 제복 등판을 흠뻑 적신 지 오래였다.

“……그런가.”

오랜 적막 끝에 송수신기를 통해 갈라진 장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들은 협상이 아닌 협박을 하려는 거로군. 응하지 않으면 판을 뒤엎어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최 대장님께서 먼저 시작한 겁니다. 판도 그쪽이 깐 판이고.”

“…….”

최 대장이 숙고했다.

한세월 군권을 쥐고 굳건한 조직을 통솔해 온 우두머리다. 보수적일지언정 범상하진 않다.

그렇기에 그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에 도달했다.

<곧, 크리처 웨이브가 발발할 겁니다.>

크리처 웨이브라는 기밀을 알고 있다는 건, 저 둘에게 다른 뒷배가 있다는 뜻일 터다. 적어도 연구개발관의 수석연구원이나 책임연구원급이다.

<‘인간은 죽을지언정 인류는 죽지 않는다’였던가……. 혹시 좌우명이십니까?>

배후자는 장성 중에도 있을 것이다. 최율 대장의 입버릇을 아는 건 장성들뿐이므로. 준장, 소장, 중장 직급 안에 누군가 반동분자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

이들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서의우와 권재진 둘을 처리하는 건 있을 수 없는 결정이었다.

지금 당장 경계경보를 울리고 총력을 기울여 전투 명령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 결과가 빤했다. 높은 직급을 차지하고 있으면 책임질 것도 많은 법이다. 좋든 싫든 이 사태의 책임은 고스란히 최율 대장에게로 돌아간다. 어떤 경우에든 각성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무능한 총책이라는 비난을 피하긴 어렵다.

최율 대장은 사태에 책임을 지고 불명예스럽게 일선에서 물러서야 하겠고, 이 난동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입맛대로 센터를 주무를 것이다. 그리고 필시 그건 서의우와 권재진 둘을 앞잡이로 내세운 일당들의 몸통일 터였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자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협상안이라도 응할 수밖에 없었다. 말뿐인 약속이라면 못할 이유 없다.

“알겠네, 자네들 뜻을 들어주도록 하지…….”

최 대장이 침통함을 삼키고 답했다.

“크리처 웨이브에 대비하겠다고 하였나? 내가 솔선하여 나서 보도록 하지.”

물론, 서의우와 권재진에겐 뒷배 따위 전혀 없다.

최 대장이 의심한 배후 그림자는 회귀한 권재진의 특이점일 뿐이었다.

“……진심입니까?”

예상을 훨씬 웃도는 협조적인 답변에 권재진이 검은 눈썹을 찡그렸다.

“되묻는 이유를 모르겠군. 장성들 목줄을 쥐고 엄포를 놓은 건 자네 아니었나? 게다가 연구 내용이 빈약하고 가설 단계일 뿐이라 부결됐던 것뿐. 크리처 웨이브 자체에 경각심을 갖지 않았던 건 아니라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

“체제 개편도 심사숙고해서 검토해 보겠네. 아예 내년 1분기 개편안을 다음 전략회의 의제로 삼아야겠군. 어차피 오랜 세월 고착되어 온 구조를 당장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없다는 사실쯤은 자네도 알고 있을 테고, 여기서 서로가 총력전을 벌여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크리처 웨이브에 집중하는 편이 이롭지 않겠나.”

“…….”

“자, 어떤가. 내가 한 발…… 아니, 두 발은 물러섰으니 자네들도 그만 군부에 협조해 주게. 이능을 거두어.”

권재진이 소리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또렷한 검은 눈동자에 의혹이 피었다.

칼자루가 넘어왔고, 원하던 결과를 쟁취했음에도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최 대장의 의도가 불분명하기 때문일 터였다.

솔직히 말해서, 최율 대장이 이토록 순순히 응할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서의우가 지적한 대로 겉으로는 회유하는 척하며 속내로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고 해도 놀라운 대답이었다.

고민하는 때, 서의우가 냉랭하게 읊조렸다.

“……재진 씨, 설마, 이대로 저자와 협상할 생각인가요?”

힐긋 돌아본 시선 끝에 닿은 서의우의 콧등에 언짢은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재진이 최 대장과 자꾸 말을 섞는 게 무척이나 불쾌해 보였다.

차게 식은 밀랍 같은 말간 얼굴에 포식자의 눈이 번뜩였다. 숫제 목덜미를 물어뜯어 죽이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래요.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필요 없잖아요. 그냥 나한테 다 맡기고…… 계획대로 해요.”

서의우의 이능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부풀었다. 보호막에 둘러싸여 있는 권재진은 무사했지만, 장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숨을 제대로 쉬는 자들이 없었다. 폐가 짓눌려 터질 듯 보이고, 온몸 혈관이 역류하는 듯했다.

“흐큭……!”

“윽…….”

눈을 부릅뜬 장성들이 몸을 덜덜 떨었다. 각성자 출신인 자들은 상대적으로 잘 견디고 있다고 해도 일반인 출신들은 바지를 척척하게 적시고 있었다. 더 시간을 끌다간 서의우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압니다. 서의우 씨가 나서면 어떻게 될지.”

권재진이 고개 돌려 서의우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했다.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도록 나직하게 낮춘 목소리였다. 장성들은 누구 하나 이야기를 엿들을 겨를이 없어 보였지만, 최 대장에게는 들릴 테니 유의해 둘 필요가 있었다.

장성들을 납치하고, 정신계 이능으로 뇌를 헤집고. 쫓기고, 싸우고, 최율 대장을 잡으러 가고……. 부딪치는 길을 택하면 최 대장과 굳이 입씨름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정신계 이능으로 장성들의 사고를 조작하러 센터에 온 것도 맞다. 그것이 본래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계획은 이미 틀어진 마당입니다. 조용히 무마하긴 글렀습니다. 이대로 센터와 전면전을 벌이면 우리도 위험해지고, 다른 각성자들도 위험해지잖습니까.”

최 대장을 신뢰하는 건 결단코 아니지만, 그의 말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무익한 피를 흘릴 필요 없다.

지금까지는 기적적으로 사망자가 없다지만, 센터와 총력전으로 불이 번지면 어찌 될지 모를 노릇이었다. 장성들을 전부 납치해서 뇌를 조작하고, 그 상태로 센터 측과 싸우며 최 대장을 잡아야 하는 건 사실 너무나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곧 크리처 웨이브를 앞둔 마당이었다.

가까스로 장성들 뇌를 전부 조작하는 데 성공하고 최 대장까지 잡아낸다 쳐도, 센터 측에서 군수품을 모두 소진해 버리고 각성자들이 심한 피해를 입으면 이후에 크리처 웨이브는 어찌 감당할 것인가?

수없이 몰려드는 마물들과 전쟁을 앞둔 상황에 섣부르게 희생을 부를 순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여기선 최율 대장의 손을 잡아 두는 편이 나을 터다.

서로 뒤로는 칼을 품은 줄 알면서도, 앞에서는 정답게 악수하는 것이다.

“임시 휴전일 뿐입니다. 오래 가지 않을 겁니다.”

길어야 크리처 웨이브가 지나갈 때까지겠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크리처 웨이브를 넘길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면…….”

“아니, 안 돼요.”

서의우가 거칠게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대꾸했다.

“그렇게 너그러워지지 말아요. 이 새끼들 전부 재진 씨 죽이려 했던 놈들이라고요……. 수색부대를 만들고 재진 씨 잡아서 해부하라는 명령 내렸어.”

“…….”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손잡는 격이에요. 재진 씨 곁에 불안 요소 남겨 둘 수 없어. 그냥 끝내요.”

서의우가 곁에 선 권재진의 허리를 잡아채듯이 난폭하게 끌어안았다. 시퍼렇게 형형한 눈빛이 매섭다 못해 날카로웠다. 살기 어린 눈이었다.

“어차피 터질 폭탄, 그냥 지금 터트려 버리자고요…….”

맞닿은 몸이 뜨거웠고, 부딪친 팔뚝이 딱딱했다. 옷 아래 가려진 서의우의 근육이 툭 불거져 곤두서있었다.

“협상, 결렬이에요.”

서의우가 그 말을 내뱉는 동시에 본부실 전체가 크게 진동했다. 테이블이 뒤집히고 의자들이 휙 떠올랐다.

위태롭게 헐떡이던 장성들의 몸이 전부 허공에 들려 올라갔으며, 아차 싶은 찰나 한 뭉텅이로 포개어져 거대한 인간 공을 이루었다.

서의우는 장성들에게는 굳이 보호막을 써 주고 싶지 않다는 듯 불쾌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이능을 끌어 올렸다. 그들 모두와 함께 좌표 이동할 작정이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최율 대장이 난색을 보였다.

서의우가 블러핑한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세차게 깜빡거리던 홀로그램이 확 꺼졌다.

송출되는 목소리도 지직대며 드문드문 끊어졌다.

“이……! 어떤가. 그럼…… 확정…….”

“서의우! 아직, 섣부르게 행동하지 맙시다!”

“권…… 자네…… 족에게…… 한 보상…….”

“의우야, 의우야!”

권재진이 다급히 서의우의 어깨를 잡아 붙들었다. 메마른 손가락에 그의 옷자락이 걸렸고, 걸린 신축성 있는 검은 목폴라가 늘어났다. 옷이 당겨져 서의우의 목덜미가 드러나 보였다. 그곳엔 군번줄 인식표가 없었다.

“그만해요. 나 분명 안 된다고 말했어요. 안 된다고…….”

“아니…… 말소리가.”

“뭐요?”

“들립니까? 들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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