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93)화 (93/154)
  • #93

    <도망칠 수 없어요. 재진 씨는.>

    <도망쳐선 안 돼요.>

    서재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재진이 멍하니 눈을 내리깔았다. 톡, 톡, 규칙적으로 들리는 손톱깎이 소리를 배경으로 짧은 상념에 빠졌다.

    ‘하…….’

    요 며칠간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서의우와 관계는 최고조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도 권재진은 날마다 비슷한 흉몽을 꾸었다.

    24살의 1회차 서의우가 우주 저편을 가리키고, 시커멓게 우글거리는 크리처 떼가 위압적으로 몰려오는 꿈이다.

    꿈속 마물 군단은 기세가 남달랐다. 하루가 지날수록 눈에 띄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첫날에는 눈살을 찌푸리고 살펴야 했을 정도로 작은 곰팡이 같던 것들이, 이제는 각각의 형태나 특징을 알아볼 정도로 또렷하게 보였다.

    권재진은 당혹스럽고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제 좀 잘 살아 보겠다는데 꿈 따위가 뭐라고…….’

    가뜩이나 재진은 바쁘고, 신경 쓸 것도 많았다.

    농사법, 파종 시기, 모종 시기, 병충해 방지법, 버섯 재배법, 유정란 부화 과정 등, 알아봐야 할 정보가 산더미고 아무리 익혀도 준비가 끝날 기미조차 없었다. 하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건축법이나 상하수도 설비 지식, 아궁이와 벽난로 구조 등, 온갖 공부가 필요했다.

    이런 와중에 서의우와 연애도 해야 했다.

    기념일 챙겨야지, 편지 써야지, 선물 뭐 줄지도 골라야 하지, 미감이 뛰어난 서의우가 심혈을 기울여 구상한 수십 가지의 맞춤 반지 제작 샘플을 보고 ‘예, 좋습니다.’, ‘예, 그것도 좋습니다.’, ‘예, 그……건 좀 화려하군요.’, ‘이건 괜찮습니다.’ 등의 반응도 해 줘야 했다.

    그리고 집 데이트도 해야 하고, 데이트를 위해 차림새도 갖춰야 하고, 삼시 세끼 서의우가 작정하고 정성껏 차려 내는 식사도 때맞춰 먹어야 하고, 권재진 곁에 떡하니 달라붙어서 떨어질 기미 없는 서의우에게 한눈팔다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으려 노력도 해야 했다.

    바쁘다.

    권재진은 정말 바빴다.

    정신 바로 차리지 않으면 서의우가 들러붙어서 키스나 하고 자빠졌고, 서로 말없이 눈이나 애틋하게 쳐다보면서 속수무책으로 옷이 벗겨지곤 했다. 그러면 그냥 또 하루가 금세 지나가 버리고, 똑같은 흉몽을 꾸고 마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봄은커녕 여름에도 못 떠나겠군.’

    해야 할 일과 연애를 병행하는 게 어렵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뭐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집에서 하루 24시 붙어 지내니 더 문제였다. 이 와중에 흉몽까지 꾸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꿈은 무의식의 표현이다.

    권재진의 심리 상태가 꿈속에 녹아난 것이라면, 재진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허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빈틈을 찾아 메꾸지 못한 불안에 같은 꿈을 꾸는 것이고 말이다.

    ‘정말 어딘가 내가 살피지 못하고 놓친 뭔가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대체 무얼 놓쳤기에 그런 불길한 꿈을 반복해서 꾼단 말인가.

    답답한 숨을 삼킨 재진이 검지로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눈 마사지하듯 반복해서 지분거리자 권재진의 손톱을 깎아 주고 있던 서의우가 넌지시 속살거렸다.

    “재진 씨, 피곤해요? 졸린가…….”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좀 쉬어야 하는 것 아녜요? 계속 검색하고, 논문 읽고, 다큐멘터리 찾아봤잖아요. ‘자연의 축복, 대나무’인가? 5부작 시리즈 다 봤으면서.”

    서의우가 둥글게 잘라 둔 손톱을 매만졌다. 중지까지 모난 곳 없이 예쁘게 잘린 것을 확인하곤 약지에 손톱깎이를 가져다 댔다. 또각거리며 약지 손톱이 잘려 나갔다. 참고로 이건 재진이 직접 하겠다며 몇 번이고 사양했는데도 서의우가 극구 권재진 손톱을 잘라 주고 싶다며 고집부린 결과였다.

    “대나무는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생장이 무척 빠른 데다가, 속이 비어서 활용법이 무궁무진하고, 죽순은 요리에 쓸 수도 있습니다. 꼭 심어야 합니다.”

    “하하, 그래요. 대나무밭에서 살게 되겠네요, 우린.”

    “예, 게다가 키가 커서 담장처럼 가려 주는 효과도 있으니 숨어 지내기도 좋을 겁니다.”

    서의우가 약지 손톱까지 자르고 새끼손톱으로 넘어갔다. 새끼손톱은 작아서 자르기 아깝다는 듯 괜히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길었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새끼손톱까지 잘 잘라 마무리한 서의우가 ‘이제 오른손이요.’ 했다. 재진이 태블릿 화면을 끄고 순순히 오른손을 내주었다.

    “재진 씨 손톱이 대나무처럼 빠르게 자랐으면 내가 매일 잘라 줬을 텐데. 느리게 자라니까 아쉽네요.”

    늘 그렇듯, 서의우는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

    “게다가 발톱은 더 늦게 자라잖아요. 발톱도 고르게 잘라 주고 싶은데. 대체 언제 자라려나…… 기다리기 힘들어요.”

    “……그런 걸 왜 기다립니까.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 발톱까지 자르게 허락해 준다곤 안 했습니다.”

    “왜요, 발톱은 안 돼요?”

    “그야, 발은 더럽지 않습니까.”

    “뭐가 더러워요. 재진 씨 목욕 내가 시켜 주잖아요. 발끝까지 항상 꼼꼼히 씻긴단 말이에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기분상 그렇다는 거지.”

    “안 더러워요. 뽀얘요. 재진 씨 발.”

    “헛소리 좀 작작 하십시오. 아무튼 발은 안 됩니다.”

    권재진이 안 된다고 해 봤자 서의우는 해낼 때까지 밀고 나갈 테지만, 어차피 그건 나중 일이었다. 오른손까지 손톱을 깔끔하게 잘라 준 서의우가 짧고 동그래진 재진의 손가락 끝을 만족스레 훑었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손짓이었다.

    “음, 재진 씨 손톱 자른 조각…… 내가 따로 모아 두고 싶다고 하면, 그건 살짝 기분 나쁘겠죠?”

    서의우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기다랗게 휘어지는 눈이 다정하고 보기 좋은데, 말하는 내용은 그냥 미친 새끼 같았다. 서의우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곤 했다.

    “예? 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버려요. ……아니, 아니다, 이리 내십시오. 제가 직접 버리고 오겠습니다.”

    권재진이 황급히 테이블 귀퉁이에 모여 있는 손톱 조각들을 슥슥 쓸어 모아 손바닥에 담았다. 장난인 것 같긴 하지만, 서의우라면 정말로 이런 걸 수집하고 싶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서의우는 쿡쿡거리고 즐겁게 웃음을 터트리며 질겁하는 재진의 반응을 즐겼다.

    “아, 하하! 재진 씨 귀여워. 진짜…… 아하하.”

    “시끄럽습니다.”

    재진이 손톱 쪼가리를 다 모은 뒤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쓰레기통에 그냥 버렸다가는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있으니 아예 변기에 넣고 내려 버릴 생각이었다. 서재에서 나가는 재진의 뒤를 서의우가 느른하게 쫓아갔다. 긴 다리에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녀석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안 모아요. 살아 있는 재진 씨가 눈앞에 있는데, 죽은 세포를 내가 왜 모으겠어요.”

    “…….”

    “그런 거 모을 거였으면 재진 씨 머리카락부터 벌써 다 집어 모아 놨게요? 아니에요. 나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다, 진짜.”

    그 정도까진?

    그럼 무슨 정도까지인 건데…….

    화장실에 들어간 재진이 변기 속에 손톱 조각을 뿌렸다. 센서가 동작을 인식해 자동으로 물이 내려가고 변기 뚜껑이 닫혔다. 스스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애인이 손톱 모을까 봐 걱정돼서 찌꺼기를 버리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제 만족해요? 나 좀 믿어 주지. 아니라는데…….”

    문가에 선 서의우가 보란 듯이 달콤하게 눈웃음 지었다. 권재진은 세면대에서 수도를 틀어 손까지 씻고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안 믿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서의우 씨 믿습니다.”

    “그래요? 그럼 발톱 잘라 줘도 돼요?”

    “그건 좀.”

    “발톱 싫으면 면도는요? 면도해 주는 건 괜찮죠? 얼굴이니까, 응?”

    권재진은 서의우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서재로 되돌아갔다. 서재 테이블에는 사전과 식물도감이 펼쳐져 있었고, 아까까지 보다가 꺼 둔 태블릿도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손톱깎이도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었고.

    문턱을 넘어 서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게끔 발길이 뚝 멈추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뒤에서 권재진을 잡아끌고 있는 것처럼 저항감이 느껴졌다.

    “재진 씨?”

    권재진은 바빴다.

    봄이 오기 전까지 서의우와 떠날 채비를 마쳐야 했다. 그것도 손발톱 자르고 면도해 주고 싶다며 성화인 저 서의우와 연애까지 하면서 준비해야 했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다리가 굳었다. 움직여지지 않았다. 권재진은 바닥에 뿌리내린 나무가 되어 문 앞에서 소리 없이 눈꺼풀만 깜빡였다.

    그렇게 얼마간 가만히 멈춰 있던 재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서의우는 그런 재진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재진 씨, 왜 그래요?”

    “……의우야.”

    <도망칠 수 없어요. 재진 씨는.>

    <도망쳐선 안 돼요.>

    “네?”

    “그…… 갑자기 좀 궁금해져서 묻는 건데 말입니다. 크리처를…….”

    떼를 지어 몰려오는 수백만 마리의 검은 마물이 떠올랐다. 날이 지날수록 가까이 다가오는 그것들이 아무래도 눈에 밟혔다. 권재진은 이미 도망치기로 결단을 내렸고, 그 결정에 만족하고 있으며, 다가올 미래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영 신경에 거슬렸다.

    “지금 제 사격 실력으로는 어느 정도까지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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