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새벽녘. 짤막한 환몽을 꾸었다. 토성과 그 위성이 줄지어 등장하는 우주 꿈이다. 타이탄, 엔셀라두스, 미마스, 디오네, 이아페투스, 테티스, 히페리온, 에피메테우스……. 권재진은 오래간만에 다시 나타난 82개의 위성을 겸연쩍은 눈길로 훑어보았다.
‘왜 또 이런 꿈을…….’
거대하고 장엄한 상위 세계. 에스퍼나 가이드가 없는 세계. 게이트 임팩트나 크리처, 인류의 전쟁과 무관한 세계. 권재진의 모든 고민과 걱정에서 떠나 있는 현실 도피만을 위한 공간. 그것이 바로 이 드넓은 우주였다.
권재진은 항상,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들 때만 이 꿈을 꾸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어째서……?
이유를 모르겠다.
‘모처럼 삶이 내키려는 참이다만.’
도피할 생각 따위 없다. 권재진은 서의우와 함께 현실을 살 것이다. 그러고 싶다. 그런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 순간, 눈앞에 아른거리는 형체가 응집했다. 빛이 모여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권재진이 익히 알고 있는 서의우, 그것도 24살의 서의우였다. 20살인 지금보다 조금 더 자라고 성숙한 서의우…….
그 서의우가 권재진을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별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멈춰 서서 재진을 향해 웃을 따름이었다.
권재진은 점차 마음이 침착해졌다. 부푼 거품이 사그라들 때처럼 재진의 마음도 고요히 가라앉았다.
‘……왜. 뭘.’
‘…….’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왜 이제 와서.’
권재진은 죽어서 회귀했고, 앞서 알던 24살의 서의우와 헤어졌다.
저 서의우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권재진은 실연과 이별을 받아들였으며, 20살 서의우의 손을 잡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재진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을 터였다.
‘내가 널 그리워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너는, 넌 내 기억 다 지웠으면서.’
자조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씁쓸한 원망도 뒤따랐다.
‘그 사실을 여태 숨기기까지 했으면서…….’
24살 서의우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쯤은 머리로 안다.
이전의 권재진은 필사의 각오로 서의우에게 저항했고, 전쟁처럼 싸웠고, 서로에게 너그러워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관계였다.
이 24살의 서의우와 파란만장했던 4년을 보낸 덕에 지금 20살의 서의우와 밝은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것도 안다. 그와 지낸 시간과 경험, 감정이 토양이 되어 주었기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었다.
이제는 20살 서의우와 조금도 비틀리지 않은, 건강하고 완전한 관계를 쌓아 나갈 확신이 생겼다.
그러니 고맙지 않은 건 아니다. 미안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서 24살의 서의우에게 흔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권재진의 과거였다. 현재일 수도, 미래일 수도 없었다.
‘아니요.’
가만히 웃고만 있던 서의우가 고갤 저었다. 그게 아니라는 듯. 지금 권재진이 보아야 할 건 자신이 아니라는 듯.
24살의 서의우가 느릿하게 한 팔을 들어 올렸다. 검지를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접어서 반대편을 가리켰다.
‘봐요, 재진 씨. 저기예요.’
‘……저기?’
‘네, 저기.’
갈라진 기로에서 이정표가 되어 주듯 24살의 서의우가 먼 곳을 짚었다. 재진이 천천히 그의 손끝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우주의 끝자락. 어둠뿐인 공간에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것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숨을 죽인 권재진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먼 곳까지 또렷하게 보기 위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눈썹마저 찌푸리고 한참 쳐다보자 검게 얼룩진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떼를 지어 몰려오는 마물이었다.
우글대는 수백만 마리의 크리처 무리.
보이지 않는 우주의 끝에서조차 게이트가 열리고 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지독한 사취를 풍기며 점차 다가왔다. 평화롭던 인류를 위협하고, 땅을 황폐화하고, 지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것처럼 끔찍하게.
‘이제 알겠나요…….’
등 뒤에서 두려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익히 알고 있는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할퀴듯이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며 속살거렸다.
‘도망칠 수 없어요. 재진 씨는.’
‘……서의우.’
‘도망쳐선 안 돼요.’
권재진이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24살의 서의우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의 전신이 차츰 반투명해지더니만 흐릿한 빛으로 변해 온데간데없이 소멸했다. 재진이 거친 헛숨을 들이켰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껏 인상을 찡그린 권재진이 두 주먹을 단단히 거머쥐었다. 두 다리를 딛고 홀로 꼿꼿이 서서 자신의 허상으로 생성된 우주 공간을 둘러보았다.
끝에 정신을 차려 보니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24살의 서의우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우주도, 토성도, 위성도, 그리고 우글거리는 크리처 무리도 지워지고 없었다.
처음부터 텅 비어 있었던 것처럼.
악몽…… 아니, 흉몽이었다.
***
“이런 현장까지 몸소 오셨습니까, 장 중령님.”
“그래, 마태오 소령. 수색 상황은 어떤가.”
칼바람 부는 추위를 뚫고 두 장정이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으스러진 바위 아래 흙더미가 한참 쌓여 있었다. 산사태로 무너진 지형까지 도달한 수색부대원들이 삼인 일조로 추적 이능을 쓰고 있었다.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제1 특임부대 합류 이후 잔류 크리처가 제거되었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라 봅니다.”
“그렇군. 그렇다 해도 썩 희망적인 상황으로 보이진 않는군.”
“예. 일대를 재수색해 보고, 그 후에도 흔적이 발견되지 않으면 범위를 넓혀 재수색할 예정입니다. 그런 후에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특수 거주지구 전체를 수색해야 할 겁니다.”
“음…… 그런가. 끝까지 찾아낼 생각이로군.”
“예. 그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딘가에는 흔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간절한가?”
“예?”
“가이딩.”
마태오 소령이 턱을 당겼다. 장태산 중령의 시선이 한순간 묵직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뚫고 들어와 속내를 간파당하는 듯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중령님.”
“그 눈. 좀 더 조심하도록. 그건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눈빛이 아니로군.”
“…….”
“발톱은 어찌 감춘대도 불복하는 눈만은 끝내 드러나는 법이지. 마 소령 사욕을 채우고자 수색에 매진하는 건 아닌가?”
노련한 장 중령이 딱딱하게 굳은 마 소령의 표정을 읽었다. 장태산 중령은 대단히 뛰어난 육감을 지닌 자였다. 평생 명령에 불복해 본 적 없는 군견 마태오 소령의 속내쯤은 쉽사리 간파할 수 있었다. 마 소령은 이제껏 살아오며 임무 중에 거짓말 따위 해 본 적도 없고, 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므로.
“대답은 듣지 않도록 하지. 그만큼 S급 가이드가 대단한가 보군.”
대쪽같이 자라 온 자가 한번 휘어지면 그만큼 태가 나는 법이었다.
알아차리기 힘든 것은 마태오 소령 같은 자가 아니었다.
서 대위 같은 자다.
장태산 중령은 항명하고 장기 휴가를 떠나 버린 서의우 대위를 떠올렸다. S급 돌연변이 가이드, 권재진을 먼저 사살하고 시신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렸더니 장기 휴가계를 제출하고 보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영 예감이 좋지 못하다.
<서 대위. 무슨 문제 있나?>
<아닙니다, 중령님. 통신이 다소 고르지 못했습니다.>
<이번 분기 지급된 신약 효과가 탁월합니다. 상성이 맞는 모양입니다.>
<힐링 팩터 80팩?>
<염려하시는 것 같아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밀반출하려는 건 아닙니다.>
혀끝에 찜찜한 뒷맛이 항상 남아 있었다. 우려가 기우로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장 중령님.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음?”
눈을 내리깔고 고뇌하던 마태오 소령이 소리를 낮춰 말문을 열었다.
“저, 오 준장님께 아직 보고드리지 못한…….”
그런 그때, 산사태가 일어난 아래쪽 흙더미를 뒤지던 수색대원 하나가 크게 외쳤다.
“찾았습니다! 여깁니다! 찾았습니다!”
수색대원들이 두 팔을 흔들며 신호를 보냈다. 바위와 흙에 일대가 매장되어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장소다. 첫 수색에서는 소득 없이 지나쳤던 곳이지만, 재수색까지 했더니 A등급 추적계 이능력자 하나가 땅 깊은 속에서 꺼질 듯이 희미한 파동을 가까스로 잡아냈다.
“여기, 밑에, 뭔가 묻혔습니다.”
저곳에 깔린 것은 과연 돌연변이의 시신일까.
아니라면…….
마태오 소령과 장태산 중령의 눈알 두 쌍이 동시에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