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88)화 (88/154)

#88

“서의우. 요리 중엔 불.”

“알아요.”

서의우는 재진에게서 떨어지는 대신 이능을 사용했다. 아랫면만 잘 익은 고깃덩이가 저절로 떠올라 공중에서 뒤집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용했던 도마와 애착식칼이 개수대에 줄지어 들어가 저절로 설거지되었다. 아무리 봐도 사기적으로 편리한 이능이다.

“스킨십. 처음 듣는 단어예요.”

입술이 귀에 닿아 있는 상태로 말을 하니 자극적이었다. 낮게 깔린 느른한 음성이 진동했다.

“예, 뭐. 서의우 씨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겠어요.”

“예?”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아도 알겠다고.”

“…….”

“내가 생각하는 거 맞아요?”

손을 뻗은 서의우가 뒤이어 재진의 목덜미를 건드렸다. 손바닥은 요리하느라 물기가 묻어 있기에 손등으로 지그시 눌렀다. 목선을 따라 올라간 손이 뺨을 스쳤다.

“이거…….”

“…….”

“이거예요? 응……?”

서의우가 귓바퀴를 이로 물었다. 송곳니로 찍어 누르자 말캉한 살점에 반달 모양으로 팬 자국이 남았다. 재진이 읏, 하고 들숨을 삼켜 내며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서재에서 도중에 끊어 낸 도화선이 다시 이어질 것 같았다.

“재진 씨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맞나 보네요.”

“……맞습니다.”

숨죽인 권재진이 조용히 대꾸했다.

답을 들은 서의우가 재진의 귓바퀴를 자근자근 짓씹었다. 잇자국을 문신으로 새기듯, 자신의 흔적을 깊게 남겼다. 그의 짙은 회색 눈망울에 금속을 닮은 굳건한 갈망이 투영되어 보였다.

“나랑 해요.”

“…….”

“데이트 끝내지 말고, 의우야랑 해.”

“서의우 씨, 조급하게 굴지 마세요. 식사가 먼저입니다.”

“아, 그래요. 식사하고…….”

서의우가 프라이팬을 강렬하게 쳐다보았다. 접시 하나가 스르르 날아왔고, 노릇하게 잘 구워 낸 스테이크가 프라이팬을 떠나 접시에 안착했다. 함께 구운 가니쉬도 곁들여 플레이팅을 마쳤다.

“식사하고 해. 갈까요.”

“잠깐, 잠깐만.”

“또 왜요. 뭐.”

“아직.”

재진이 정갈하게 차려 낸 접시를 보고서 엷은 숨을 내쉬었다. 호흡에 미약한 떨림이 묻어났다. 서의우와는 한두 번 몸을 섞은 게 아닌데 어째서 새삼스레 긴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와인을…… 와인 한 병 곁들입시다.”

“와인?”

“서의우 씨 주류에 정통하지 않습니까. 아무거나 가져오세요. 그냥 분위기 잡는 겁니다.”

서의우가 군소리 없이 따랐다. 계단 아래 와인 창고에서 레드 와인 한 병이 스르르 날아왔다. 와인 잔도 찬장에서 꺼내져 소리 없이 날아왔다.

“됐어요?”

“……아니, 아직.”

재진이 손을 뻗어 서의우의 허리춤을 잡았다. 검은색 앞치마 끈을 당겨 매듭을 풀었다. 요리하는 내내 그의 허리에 감겨 있던 앞치마가 근육질 몸을 타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재진이 복잡한 심경을 담아 선언했다.

“예, 이제 됐습니다. 먹으러 갑시다.”

“네, 재진 씨. 같이 가요.”

***

서의우가 만든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도중부터 한눈팔며 요리했을 텐데도 완벽하게 구워졌다. 미디엄 레어로 촉촉하게 구워진 소 안심살이 나이프를 대는 족족 두부처럼 부드럽게 갈라졌다.

거기에 서의우가 가져다 놓은 와인도 훌륭했다. 비싼 술맛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느끼는 권재진이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드라이하고 중후한 레드 와인의 묵직한 풍미가 생생하게 살아서 입 안을 힘껏 때리는 듯했다. 전시실에서도 그림이 다르게 보인다 싶더니만, 술맛까지도 각별하게 느껴졌다.

서의우는 재진의 옆자리에 앉아 권재진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와인을 따라 주거나 입가에 내밀어 주는 고깃덩이를 한 입 받아먹거나 했다. 재진이 애써 무시하고는 있었지만, 서의우는 그때 이미 발기해 있었다. 다이닝룸 테이블 밑으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매끈한 정장 바지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두텁게 융기해 있었다.

“재진 씨, 맛은 좀 어때요?”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가 귀에 쩍쩍 달라붙어 들쩍지근했다. 쳐다보는 시선 역시 예사 눈빛이 아니었다. 권재진을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 다루듯 애틋하고 귀하게 보면서도, 섬찟하게 번들거리는 음욕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맛있습니다. 육질이 부드럽군요.”

“많이 먹어요. 와인도 많이 마시고요.”

“예, 양껏 먹고 있습니다.”

“하하, 좋네요.”

이 순간, 서의우는 둘로 나누어 분별해 둔 연정과 욕정이 한꺼번에 발현할 수도 있는 거구나, 몸소 깨닫고 체험하는 중이었다.

데이트가 좋아 죽겠는데, 그만큼 권재진을 만지고도 싶었다.

직접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는 권재진이 좋은데, 그만큼 우물거리며 저작 운동 하는 저 무심한 입술을 더듬고 손가락을 찔러 입 속을 후비고 싶었다.

고깃덩이가 재진의 몸에 들어가 훗날 권재진의 말랑한 근육이 되겠지 상상하면 이 식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만, 지금 당장 그 말랑한 근육을 틀어쥐고 주물럭거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서의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니 밥 먹여 주면서 자지 박고 싶었던 거로구나.’

예전에는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르고 마냥 뭉뚱그려 하고 싶다고 느꼈을 뿐이건만, 이제는 상충하는 욕망의 근원을 분명하게 분석해 볼 수 있었다. 깨달음을 얻은 서의우가 씩 미소 지었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입꼬리가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깃처럼 탄력 있고 산뜻해 보였다.

“좋아해요.”

서의우가 툭 흘리듯이 고백했다. 너무 좋아 웃음이 새는 것처럼, 가슴에 진한 감정이 넘쳐서 언어가 절로 새어 나왔다.

“재진 씨 좋아해요.”

그 말에 권재진의 표정이 얼핏 풀렸다. 수백,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 번 이상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던 좋아해요 소리마저 다르게 들렸다.

본래는 감흥 없던 진품 그림과 비싼 와인 맛에 이어 서의우가 자주 내뱉는 흔한 말 한마디조차 오늘은 달랐다.

대체 왜 자꾸 이럴까. 뭐가 그렇게 다른 걸까. 연극으로 치면 제2막,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 같았다. 다시는 의심할 생각조차 말라는 듯 갖은 근거가 자꾸만 사방에서 튀어나오니 정말 새로운 마음가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의, 의우 씨, 식사 중에 그런 말을 하면 당황하잖습니까.”

재진이 조금 허둥댔다. 가뜩이나 발기한 서의우의 하반신이 신경 쓰이는 참이었다. 권재진이 알던 기존의 서의우라면 이미 좆을 들이대 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아직까진 아슬아슬하게 데이트의 형식이 유지되고 있는 참이라 신경이 곤두섰다.

“좋아한다는 말이 뭐 어때서요. 항상 말했던 거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아니면 뭐요. 내가 재진 씨 먹는 거 쳐다보면서 좆 세우고 있어서 그래요?”

“…….”

“좋아해요. 식사하는 재진 씨 보고 자지 세울 만큼. 자지 섰는데도 재진 씨 식사 끝날 때까지 참아 볼 만큼. 재진 씨가 좋아요.”

목이 탔다. 권재진이 와인 잔을 들어 안에 담긴 검붉은 레드 와인을 들이켰다. 와인이 체온을 알맞게 데웠다. 배 안쪽이 뜨끈했다.

“재진 씨가 그 접시 다 비우면, 나 재진 씨랑 스킨십할 거예요. 그러면 굉장히 다른 기분 느낄 것 같아요.”

“……다른 기분?”

잔에 든 와인을 다 마셨는데 아직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재진이 입에 닿는 와인 잔 테두리 부분을 앞니로 조금 씹으며 반문했다.

“응, 지금 재진 씨랑 닿으면 예전이랑 분명 차이 날 거예요.”

“…….”

“확신해요. 다를 거야. 완전히.”

권재진이 애꿎게 씹던 빈 잔을 입에서 떼고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웨이터도 없는데 와인 병이 저절로 떠올라 그 잔에 따라졌다.

서의우를 곁눈으로 쳐다보니 양면적인 눈과 시선이 빗맞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익히 아는 것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요했다.

그에게선 정적인 흥분이 느껴졌다.

서의우는 마치 기다려를 배운 리트리버 같았다. 이 잠깐을 참으면 그 후에 더한 보상이 있으리란 확신이 생긴 것 같았다.

권재진이 느낀 새로운 2막을 서의우도 느낀 걸까. 아니면 재진이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권재진의 마음이 저 어린 서의우에게 활짝 열리고 만 사실을 동물적인 육감으로 알아채 버린 걸까.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예…… 저도 지금 서의우 씨와 닿으면 다르긴 다를 겁니다.”

생각을 멈춘 재진이 가득히 찬 와인 잔을 들어 마셨다. 이번에도 남김없이 잔을 비우고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힘주어 내려 두었다. 그러곤 접시에 남은 스테이크 덩어리를 나이프로 자르지도 않고 포크로 세게 찍어 으적으적 호쾌하게 씹어 삼켰다. 몇 개 남지 않았던 아스파라거스와 단호박도 턱턱 찍어 바로바로 입에 넣고 삼켜 버렸다.

“다 먹었군요.”

금세 접시를 싹 비운 재진이 테이블 위에 깔린 냅킨을 들어 입가를 슥슥 닦았다. 접시 위에 냅킨을 툭 내던지고는 서의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야 두 사람의 시선이 제대로 맞았다.

서의우가 그토록 부르짖던 제대로다.

제대로 가이딩 하고, 제대로 연애하는, 그 제대로.

“의우야.”

권재진이 서의우를 불렀다. 그가 듣기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식탁에서 해 볼래? 침대 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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