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87)화 (87/154)
  • #87

    “재진 씨, 나 어떡하지. 연애를…… 제대로 된 연애가 이런 건지 몰랐어요.”

    서의우가 정신없이 뇌까렸다.

    “가이딩도, 나 제대로 된 가이딩 몰랐었잖아요……? 그러다 재진 씨 덕에 처음 알았잖아. 지금 기분이, 딱 그때 같아.”

    제대로 된 가이딩을 처음 받았을 때 느낀 환희와 희열이, 제대로 된 연애를 알게 되어서 느끼는 감정과 몹시 닮아 있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서의우가 권재진을 품에 가둔 채 허공에 떠올랐다. 그의 이능이 전시실 곳곳으로 확산하며 둘이 공중을 함께 날았다.

    “그래. 재진 씨랑 나랑은 뭐든 제대로 해야 해요.”

    “서의우, 잠깐, 의우야! 이능 조절 잘합시다. 그림 훼손되면 아깝습니다. 저거 다 진품인데.”

    “대답부터 해요. 내 말 알겠어요? 우리는 죄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알겠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해! 연애, 제대로 하자고. 원래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응. 4년 후에도 하지 못했다는 진짜 연애, 나랑 다 해요. 하나도 빠짐없이. 재진 씨랑 내가 둘이 하는 거야.”

    “글쎄, 그럴 거라고 말했잖습니까…….”

    “재진 씨.”

    “예…….”

    “재진, 재진 씨…….”

    서의우가 처음 보는 얼굴로 웃었다.

    기다란 눈이 아름답게 휘며 누그러지고, 뺨은 서의우 특유의 익숙한 빛깔로 물들었다. 분명 아는 표정인데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가뜩이나 어둑한 공간에서 그 혼자 빛나던 얼굴이 더욱 환하게 보였다.

    돌연, 시야가 밝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서의우를 중심으로 세상의 명도와 채도가 달라진 것 같았다.

    “하아…… 속이 벅차요.”

    “…….”

    “나 왜 울컥하지? 이거 희한하네요. 지나치, 지나치게 좋으면 울 것 같아지는 건가 봐요.”

    서의우가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전시실 한복판에서 보란 듯이 재진을 껴안고 느릿하게 돌았다. 망망대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르골 위의 장식처럼. 이능으로 원을 그렸다.

    둘이 함께 느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재진의 시야에 하얗게 페인트 발린 벽을 따라 띄엄띄엄 걸린 명화가 눈에 들어왔다. 예술에 조예가 없어 4년을 보았더라도 흥미가 생기지 않던 그림들인데, 지금은 풍부한 색채감과 깊이 있는 묘사 같은 세세한 특징이 시선을 끌었다.

    왜인지 배경에 보이는 그림 하나하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짙푸른 풀밭을 묘사한 그림은 싱그러웠고, 군상을 묘사한 그림은 역동적이었다. 노란빛은 경쾌하며 자줏빛은 무게 있었다.

    “…….”

    권재진은 어제보다 조금 더 환하고, 조금 더 선명해진 세상에 가만히 녹아들었다.

    새로운 그 세상의 중심에 서의우가 있었다.

    권재진을 위해 거리낌 없이 몰살을 말하는 서의우. 창창한 인생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말하는 서의우. 제대로 진짜 연애하자고 협박하듯 말하는 서의우.

    이상하게도, 권재진 또한 조금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았다. 오열할 정도는 아니고, 양파를 다질 때처럼 아주 슬며시 눈가가 뜨끈해졌다.

    4년간 막막한 처지에 놓여 홀로 벽 치고 가슴앓이하며 쌓인 응어리가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스르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루아침에 돌연변이가 되어 살처분당할 위험에 떨었던 공포는 권재진 죽이려 드는 각성자를 망설임 없이 몰살하겠다고 말한 서의우로 인해 풀어졌고,

    26년간 살아왔던 일반인의 인생을 빼앗긴 설움은 20년간 살아온 각성자의 삶을 고민 없이 버리고 부랑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서의우로 인해 풀어졌고,

    애증에서 비롯되어 빈말로도 정상적인 연애라곤 말할 수 없던 1회차 서의우와의 뒤틀린 관계는 제대로 연애해야 한다고 미치광이처럼 흥분해 날뛰는 서의우로 인해 풀어졌다.

    그러자 환했다. 무대에 막이 오른 것처럼.

    공포와 설움과 애증으로 뒤섞여 억눌려 있던 삭막한 트라우마가 걷히고 눈부신 빛이 내리쬐었다. 서의우가 마치 떠오르는 태양 같아 보였다.

    지나치게 대단해서,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첫 데이트. 시작부터 엉망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완벽했다. 더 바랄 것 없었다.

    ***

    전시실에서의 그 난동 같던 소란이 있은 끝에, 권재진은 거의 과호흡이 올 정도로 광분한 서의우를 달래고 또 달래야 했다.

    20년 동안 산책 한 번 못 하고 목줄에만 매여 있던 대형견이 난생처음 풀밭에서 뛰놀게 되어 좋다 못해 펄쩍펄쩍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니, 저렇게까지 좋아하면…… 미안해지잖아.’

    한순간이라도 서의우를 의심했던 게 좀 그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의우라면, 구멍 빨고 좆 처박고 오줌이나 싸게 하는 자극적인 행위에 눈 돌아 있는 서의우라면, 데이트나 커플링 같은 수수한 애정 표현에는 별반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괜히, 하아……. 진짜, 괜히…….’

    재진이 반성하는 마음으로 서의우의 두툼한 등을 다독였다. 매끄러운 정장의 감촉이 빳빳한 전투복과 달라서 생소했다.

    “의우야. 서의우. 이제 그만 진정합시다.”

    “네, 네…… 재진 씨.”

    “그리고 잠깐 잊은 것 같아서 말하는데, 우리 아직 데이트 안 끝났습니다.”

    전시실을 끝까지 다 돌아보지 못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었는데, 서의우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아, 네, 그렇죠. 안 끝났죠.”

    서의우가 파뜩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다운라이트 조명을 받으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였다.

    “재진 씨 뭐 먹고 싶어요?”

    “뭐…… 먹고 싶냐니.”

    “좋은 옷 입고, 좋은 곳 가고, 좋은 것 먹는 게 데이트라면서요.”

    입고 갔으니 남은 건 먹는 것뿐이다.

    “내가 해 줄 거예요. 재진 씨 먹을 음식. 요리책도 많이 읽었고, 연습도 많이 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주방으로 향했다.

    서의우는 계속해서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고, 재진은 가장 첫 데이트스럽고 흔한 메뉴를 골랐다. 스테이크다.

    “스테이크?”

    “재료는 다 있을 겁니다.”

    재진이 잠시 멈칫했다.

    이거 또, 미리 얘기 안 하면 나중에 서의우가 난리 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첫 데이트 때 스테이크나 파스타를 주로 먹곤 합니다. 먹는 모양새가 깔끔해서.”

    “그래요? 그렇구나. 재진 씨는 뭘 먹든 깔끔히 먹던데.”

    “그런 소린 처음 듣습니다. 그냥 사람같이 먹는 거겠지.”

    “좀 더럽게 먹어 줘도 좋을 것 같아요. 한 번쯤 그런 것도 보고 싶어요.”

    “서의우 씨는 왜 자꾸 제 추접한 모습까지 다 보려고 합니까…….”

    “재진 씨니까요.”

    무슨 대답이 저런지 모르겠다. 아무튼, 서의우는 정장 상의를 벗고 검은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개수대에서 손을 깔끔히 씻는 뒷모습이 이젠 주방일에 제법 익숙한 태가 났다.

    서의우가 두껍게 썰린 안심 소고기에 오일과 허브, 소금으로 마리네이드하며 넌지시 말했다.

    “요리는 즐거워요. 난 아직도 식욕 없지만, 이 음식이 재진 씨 몸으로 들어간다고 된다고 생각하면 그래요.”

    “누누이 말하는데 저희 아직 4달째입니다. 반년 넘어가기 전에는 서의우 씨도 식욕 생길 겁니다.”

    “나는 딱히. 식욕 있든 없든 재진 씨 먹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그는 뒤이어 가니쉬로 쓸 아스파라거스와 단호박, 당근, 토마토를 씻어서 정갈하게 썰었다. 서의우의 손에 들린 식칼이 눈에 들어왔다. 권재진의 애착식칼이 왜 떡하니 서의우의 손에 들려 있는지 선후 관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봐요, 내가 지금 만드는 건 스테이크가 아니에요. 권재진이죠. 이 음식이 곧 재진 씨의 피와 살, 뼈, 세포가 되는 거잖아요.”

    “그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랍니까…….”

    “내가 손수 미래의 재진 씨를 만들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니 정성을 다해야지 않겠어요?”

    “예, 예…….”

    “가만있어 봐요. 의우야가 맛있게 해 줄게요.”

    올리브유를 흠뻑 뿌린 프라이팬을 연기가 날 정도로 센 불에 달구고, 큼직한 고깃덩이를 터억 얹자 맛깔스러운 냄새가 확 퍼졌다. 무소음 환풍 기기가 자동으로 열을 감지해 가동했다.

    서의우는 스테이크가 익도록 잠시 그대로 두고 뒤로 물러섰다. 고기를 뒤집을 때까지 찰나의 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기 싫다는 듯, 슬쩍 다가와 재진에게 귓속말했다.

    “그래서, 이 식사 끝나면 데이트도 끝인가요?”

    “끝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더 할 게 남아 있나요.”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재진이 흘긋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귓속말하던 서의우의 아랫입술에 재진의 귀 끝이 살짝 스쳤다.

    “아.”

    재진이 움찔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고개를 비틀어 피했거나 그대로 굳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진이 느리게 턱을 들어 올렸다. 서의우의 입술에 자신의 귀가 좀 더 눌려 붙도록.

    부드러운 살갗끼리 쵹, 하고 접촉했다.

    “……마음 맞으면 스킨십할 수도 있고.”

    “…….”

    “딱 이렇다 하고 정해진 건 없습니다.”

    슬슬 팬에 놔둔 스테이크를 뒤집을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서의우는 권재진에게 떨어지질 않았다. 태워서 재료를 낭비할까 싶어 재진이 고갤 치워 붙여 두었던 귀를 다시 떼었다. 그러자 서의우가 뒤쫓아 재진의 귓바퀴에 입술을 깊게 파묻고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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