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머릿속을 메우던 흐린 안개가 걷히니 서의우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망설이지 않는 맹목의 화신. 권재진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독점해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지배자로.
“그때 재진 씨가 말했죠. 커플링, 커플룩, 러브 레터 알고 있냐고.”
<데이트, 커플링, 커플룩, 러브레터……. 제가 지금 말한 이 단어 중에 서의우 씨가 아는 것 하나라도 있습니까?>
딱 한 번 말해 준 것인데도 저 비상한 서의우는 권재진의 희망 사항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뇌에 녹음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씩 전부 설명해 줘요. 커플링은 뭔가요?”
“아, 예…… 커플링은…….”
대번에 태도가 180도 바뀐 서의우를 보고서 재진이 조금 숨죽였다. 알 수 없는 위기의식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서의우가 권재진을 향해 다른 차원으로 맹렬히 덤벼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던 육체적 결합을 넘어서 그 이상을 바랄 것 같았다.
“네, 재진 씨. 커플링은요?”
“…….”
“커플링은?”
“그…….”
왜인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재진은 자신이 상상 이상으로 충격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서의우에게 제대로 사귀어 보자 말은 했지만, 속내로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사실은 반신반의했다.
데이트건 뭐건 적당히 겉핥기식으로 흉내만 내고, 그냥 이제껏 그래 왔듯 또 어느 정도는 권재진이 포기하고 접어줘야 하겠구나 싶었다. 실제로 조금 아까 서재에서도 서의우가 막무가내로 좆부터 세우고 짐승 새끼처럼 덤벼들 뻔하지 않았던가?
물론, 서의우의 본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서의우가 권재진을 미치도록 열망하는 것쯤은 당연하게 알고 있다. 다만 둘이 자라 온 환경과 배경이 너무도 다르기에,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당연한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노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에도 어쩔 수 없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하리라고 믿었다.
서의우와 권재진은 죽을 때까지 같이 지낼 수는 있을지언정, 같은 마음으로 지내는 건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서의우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해도, 권재진이 제대로 연애해 보자고 선언했어도, 이 관계의 본질까지 바뀌긴 어렵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의우가 이러면…… 이렇게 단박에 차이를 분별하고 이해했다는 듯 굴면, 야트막한 기대가 싹트지 않겠는가.
어쩌면 서의우와 연애를,
타협하고 순응하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연애를,
같은 마음으로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커플링은 반지를 뜻합니다.”
재진이 묵묵히 서의우를 올려 보았다. 따스한 색감의 간접 조명이 반사되어 고운 턱선과 콧날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한 올 한 올 유려하게 펼쳐져 있고, 그로부터 길게 뻗은 속눈썹 그림자도 고혹적이었다.
“연인과 왼손 약지에 나누어 끼는 반지 한 쌍. 대개 같거나 유사한 디자인으로 고릅니다. 여기엔 각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각별한, 어떤 의미?”
“상징적인 겁니다. 약지에 커플링을 착용한 한 쌍은 연인이거나 부부 관계라고, 오래전부터 관습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반지를 볼 때마다…….”
“볼 때마다, 재진 씨가 내 애인이라는 증표가 되겠네요?”
서의우가 야행성 맹금처럼 눈을 번뜩이며 재진의 왼손을 낚아챘다. 가뜩이나 어둑한 전시실에서 서의우가 저러니 눈빛이 유독 강렬했다. 서의우는 재진의 왼손을 쥐고서 대놓고 약지를 더듬었다. 손마디를 집착적으로 지분거렸다.
“그래, 알겠어. 이를테면 각성자들 인식표 같은 거잖아요. 다만 우리 둘이서만 하는, 몸에서 한시도 떼어 놓으면 안 되는 신원 증명이에요. 그렇죠?”
“……예, 그런 겁니다.”
서의우가 매섭게 추궁하듯 읊조렸다.
“하하, 뭐야. 재진 씨, 나한테 숨기는 거 없기로 했으면서. 이런 걸 말 안 해 주면 어떡해요. 바로 얘길 했어야지. 안 그래요?”
“숨긴 적 없습니다. 시기를 봐서 말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지금 말하고 있고.”
재진의 해명을 듣고도 서의우는 성화였다.
“변명하지 마요. 난 재진 씨 왼손 약지가 그렇게 중요한 곳인지도 몰랐잖아요. 얘기 안 들었으면 평생 몰랐잖아요, 이거!”
“서의우…….”
“재진 씨 손가락을 매일 보면서도 몰랐어요. 이 손가락 내가 물고 빨고 다 했는데, 그랬는데도 몰랐다고요. 그렇게 중요한 손가락인지 알았으면 내가…… 내가 더 특별하게 더 예뻐해 줬지. 너무해요. 재진 씨 나한테 정말 너무해…….”
서의우는 거의 흥분이 극에 달해 있었다.
‘권재진 몸통, 여기까지 벌어지는 거였어……?’라고 말하며 결장 안쪽을 뚫던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으윽, 안 되겠다. 우리 당장 반지 맞춰요. 어떤, 반지 어떤 재질로 할까요? 보석은? 재진 씨는 뭐가 좋아요?”
서의우가 권재진의 약지를 눈높이까지 들어서 유심히 관찰했다. 권재진의 몸은 어느 부위건 빠뜨리지 않고 보아 와서 이 약지의 굵기나 모양, 빛깔까지도 전부 눈에 익었지만 커플링 얘기를 듣고 나니 모르는 손가락처럼 새롭게 보였다.
서의우가 재진의 약지를 핥고 씹듯이 뜯어보았다. 손가락은 권재진을 닮아 꼿꼿했다. 툭 불거진 마디가 굵고, 혈색은 건강하고, 취미로 한 암벽 등반 덕에 굳은살이 고루 박여 있었다.
“……전 적당한 거면 됩니다. 착용감 생각하면 디자인 단순한 게 좋고, 보석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
“없어도 된다니요. 반지잖아요. 있어야죠, 보석.”
“굳이 넣을 거라면…… 눈에 띄지 않도록 작은 다이아몬드 하나만 합시다.”
손을 내준 재진이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서의우가 이렇게까지 들떠서 날뛰니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커플링을 설명했을 때, ‘반지요? 그렇게 비효율적인 물건을 왜 맞추는 거죠? 반지는 됐고 자지 넣을래요.’라는 답변이 돌아오진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서의우는 무슨 연애 못 해 한이 맺힌 악령처럼 굴고 있었다.
“알았어요. 단순한 디자인, 다이아몬드……. 도망치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네요. 지금이라면 나 돈 썩어나게 많아. 우리 커플링 얼마가 들든 다 할 수 있어요.”
“…….”
“자, 이제 커플룩은, 러브 레터는, 다 뭔데요. 빨리요.”
“……커플룩은 옷입니다. 이 또한 연인끼리 같거나 유사한 디자인의 옷을 입는 겁니다. 매번 그러는 건 아니고 가끔 이벤트성으로 하는 겁니다. 러브 레터는 연애편지고, 보통 기념일에 편지를 써서 선물과 함께 주고받거나 합니다.”
“응, 그렇구나. 그런데 기념일이라면? 기념일은 또 뭐야.”
“사귀기로 한 날부터 날짜를 세는 겁니다. 50일, 100일, 200일, 300일, 1주년. 이런 식으로 숫자 단위가 바뀌는 날을 둘이 기념하곤 합니다.”
“므, 미쳤다. 날짜까지 센다고요? 아, 오늘 며칠째지.”
순식간에 머리를 팽팽 돌려 날짜를 역산한 서의우가 본래부터 디데이를 헤아리고 있던 권재진과 동시에 말했다.
“16일.”
“16일.”
서로의 목소리가 한데 겹치자 재진이 속수무책으로 두 눈을 깜빡였다.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 어색했다.
이게 대체 무슨……. 얼떨떨하다.
이런 날이 오다니…….
서의우와 이런 걸 하다니…….
정말 널리고 널린 흔해 빠진 연인들처럼 이렇게……. 말도 안 된다. 꿈인가?
사실은 아직도 권재진이 침대에 홀로 누워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서의우가 교대 시간에 무단 이탈 한 것도 꿈이고, 다 죽이자느니 도망치자느니 했던 것도 꿈이고, 이 비현실적이고 충격적인 연애 놀음도 꿈이 아닐까?
“16일이구나. 그럼, 이제 20일 되면 기념일 하는 건가요? 단위 바뀌는 날이잖아. 편지 쓰고, 선물 주고? 재진 씨랑 나랑 둘이?”
“아니, 아닙니다…… 20일 같은 작은 단위는 안 챙깁니다.”
“왜요? 왜 20일은 차별해요? 딱 떨어지고 좋은 숫자잖아요.”
“그…….”
“나도 20살이고. 우리 2명이고. 좋은데. 그냥 기념일 하면 안 돼?”
“…….”
“나 재진 씨 편지 받고 싶단 말이에요. 재진 씨 편지, 글, 아니, 씨발, 뭐야……?”
대뜸 서의우가 인상을 콱 찌푸리고 욕설을 뱉었다. 미친놈 같았다. 완벽하게 광기 어린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나, 나…… 권재진 씨 글씨체도 모르네요……? 이러면 안 되지.”
재진은 그냥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재진 씨 글씨는 알아야 하잖아! 안 그래? 편지 써요. 꼭 써. 응? 쓰라고요!”
“아, 알겠습니다. 기념일 합시다. 20일 기념하자고.”
“네, 해요. 하는 거야. 말 바꾸기 절대 없어.”
서의우가 약지를 뜯어보느라 줄곧 잡고 있던 권재진의 왼손을 제 쪽으로 당겼다. 자연스레 딸려 오는 재진의 몸을 가슴으로 받아서 허리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고상하고 빼어난 검은 셔츠에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서 와락 껴안으니 안긴 느낌이 평소 같지 않았다. 서의우는 꼭 불덩이를 깎아 조각한 수천억짜리 예술품 같았다.
열이 오른 것처럼 그의 온몸이 몹시 뜨거웠고, 맞닿은 가슴팍 너머로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