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85)화 (85/154)
  • #85

    “재진 씨…… 어서요.”

    “어서……?”

    “제대로 연애하는 거 알려 줘요. 안 그러면 나 자지 넣는 것만 할 건데.”

    “어? 아…….”

    서의우가 한 팔로 책장을 짚고 권재진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가까워 거친 숨결이 닿았다. 들짐승 같은 성긴 회색 눈동자도 바로 보였다.

    저 비슷한 눈빛을 본 적 있었다. 권재진이 기억 돌려놓기 전에는 가이딩 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던 때, 서의우가 욕망을 참던 눈이었다.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서 굶주림을 견디는 포식자의 갈망 어린 시선이다.

    “사실 지금 처넣고 싶어요. 좆 박아 넣자마자 쌀 것 같아…….”

    서의우가 다리를 끼웠다. 검고 빳빳한 전투복 바지 안쪽, 굵은 허벅다리 중반까지 두둑이 부푼 좆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느적느적 비비면서 그가 허덕였다.

    “지난번처럼 구멍만 처박아 대면서, 재진 씨가 뭐라 해도 다 무시하고 안 빼 주고 싶은데……. 이건 연애 아니라면서요. 재진 씨 또 나랑 헤어지고 싶을 거잖아.”

    헤어지잔 말 한 번 들었다고 서의우는 꽤 신중해져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이미 눈이 돌아 옷을 찢어발기듯 벗기고 있었을 터였다. 아니다. 아예 좌표 이동으로 귀가한 직후 별다른 말을 섞지도 않고 권재진부터 덮쳤을 것이다.

    그만큼 서의우는 간절했다. 4년 후의 자신조차도 하지 못했다는 제대로 된 연애란 것을 갈구하다 못해 정신적 허기를 느꼈다. 육체적 갈망을 정신적 갈망이 압살했다.

    그렇다곤 해도 본능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기에 서의우는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우고 허리를 치덕치덕 쳐올렸다.

    “재진 씨, 빨리. 늦기 전에.”

    “아, 알겠습니다. 저도 말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일반적인 데이트부터 설명을…….”

    “으응……. 다리 사이가 왜 이렇게 부드러워요? 자지 끼우고 싶어.”

    서의우가 재진의 오른 다리를 들어 올렸다. 무릎 아래 손을 끼우고 벌어진 하반신에 노골적으로 자신을 파묻었다.

    “큿, 아흐, 서의우.”

    “왜요, 넣진 않았잖아요. 옷도 안 벗겼어. 됐잖아요.”

    “아니, 이러고 뭘 말하라는 겁니까. 놔, 일단 놓고. 얘기부터.”

    “알아요. 안 해. 안 할 거예요.”

    “음, 읏.”

    “못 멈출 거 뻔히 아니까……. 후으, 그래서 데이트가 뭐라고요?”

    “데이트는, 데, 연인 사이에 하는 만남이나 약속…….”

    “뭐야? 깜찍한 좆 세우지 말아요. 가뜩이나 만지고 싶은 거 겨우 참는데……. 하으, 재진 씨 엉덩이 내 얼굴에 얹어 놓고 빨고 싶어요.”

    “뭐, 뭔…… 들을 마음이 있긴 한 겁니까?”

    “있어요. 진짜 안 한다니까? 나 좀 믿어. 그러는 재진 씨야말로 느적대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해 봐요, 어? 애끓어서 돌겠어.”

    “으흑……. 아, 씨이…….”

    옷자락끼리 쓸려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바지가 크게 주름 잡히며 서로의 허벅다리와 둔부 윤곽이 도드라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천 안쪽으로 후끈한 열기가 들이찼다. 게다가 프리컴으로 질척해져서 브리프 안쪽이 열대 기후처럼 고온다습해졌다.

    권재진이 뒤로 손을 뻗쳐 책장을 잡고 버텼다. 원목 책장의 선반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심지어 한 다리로만 서 있는 데다가 애매하게 치받아 대는 서의우의 묵직한 체중을 견디려니 쉽지 않았다. 갈수록 숨결이 불규칙하게 어지러워졌다.

    “윽…… 서의우.”

    권재진이 헐떡거리며 눈가를 좁혔다. 이러다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재진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 방법을 바꿔 말했다.

    “지금, 당장, 갑시다…….”

    “으응? 가자니요, 어디를……?”

    “데이트하러.”

    “네……?”

    “아무래도 서의우 씨는,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직접 해 보자는 겁니다. 데이트.”

    그제야 서의우가 치덕대던 허리 짓을 멈추었다. 바지 안쪽이 여간 찝찝해진 게 아니었다. 재진이 문가를 향해 보란 듯이 턱짓했다.

    “따라 나오십시오. 옷부터 갈아입읍시다.”

    “지금 당장……?”

    “예. 제가 그렇게 말했잖습니까. 멀뚱히 있지 말고 비키세요.”

    “앗, 응, 어어?”

    기념할 만한 첫 데이트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

    마네의 진품. 드가의 진품. 제리코의 진품. 그리고 서의우.

    2층 미술품 전시실 가운데 우뚝 선 그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 같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다운라이트 조명 아래 그저 서 있기만 할 뿐인데도 자태가 남다르고 예술품보다 더 예술품다워 보였다.

    가뜩이나 정교하게 깎인 근육질 신체를 지녔는데, 그 위에 칠흑처럼 검은 셔츠와 검은 정장 바지를 입고 있으니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번쩍이는 구두, 허리띠, 손목의 커프스, 값비싼 시계, 그리고 묵직한 레더와 우디 계열 향수까지 얹으니 사람이 다르게 보일 정도였다.

    차림새가 사람을 바꾼다더니. 망나니 짐승 새끼 같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작정하고 겉껍질을 꾸며 갈아입혀 놓으니 제법이었다. 탁월하다. 군계일학이다.

    “데이트는 이런 겁니다.”

    흰 셔츠와 정장 바지로 갈아입고, 그 위에 서의우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회색 재킷을 걸친 권재진이 서의우를 두고 전시실을 느긋이 둘러보았다.

    적막하고 어두운 공간, 층고 높은 벽을 따라 진품 명화가 걸린 방 안에 둘뿐이니 퍽 그럴싸한 분위기가 났다.

    “대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에 가고, 좋은 것을 먹습니다. 더 나아가 여러 체험을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입고, 가고, 먹는다고요…….”

    “요지는 연인과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겁니다.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쌓는 것이 주목적이라 보면 됩니다.”

    삐딱하게 다리를 짚은 서의우가 다시금 혼잣말로 ‘입고, 가고, 먹는다’를 되뇌었다. 그러더니 알 것 같다는 식으로 단정한 눈을 고요히 휘었다.

    “아, 그래. 재진 씨랑 바다 갔을 때처럼 말이죠? 그때도 우리 옷 입고 바다 위에 가서 커피 마셨잖아요.”

    “……예. 바로 그겁니다.”

    망망대해 위에서 마셨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이 아직 잊히지 않았다. 재진이 긍정해 주자 서의우가 픽 소리 내 웃어 버렸다.

    “하하, 어쩐지. 자꾸 가고 싶더라니. 내가 재진 씨한테 계속 바다 가자고, 협곡 가자고 졸랐잖아요. 재진 씨가 거절했지.”

    “아니, 음……. 그건 저도 후회 중입니다. 특히 그 협곡 경치가 장관이더군요. 서의우 씨와 가 볼 걸 그랬습니다.”

    권재진은 지난 4년간 해변 저택에서 바다만 보며 지냈다. 그런 재진이 산속, 아홉 줄기로 굽이치는 계곡과 두 쌍으로 겹친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얽힌 풍경을 얼마나 인상 깊게 봤을지는 구태여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그 협곡은 권재진의 인생을 바꾼 장소였다. 그곳에서 겪은 사건과 후회가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서의우의 관계를 통째로 뒤엎어 놓았다. 뜻깊은 장소다.

    그렇다곤 해도 다시는 갈 수 없겠지.

    “재진 씨, 거기 가고 싶어요?”

    “아니요. 이젠 됐습니다. 위험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무모한 사람 아닙니다, 저는.”

    “재진 씨가 가고 싶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든 사람 치워 볼게요.”

    “아닙니다. 섣부른 짓 금지입니다. 그리고 이 집도 데이트 장소로는 충분합니다.”

    사람을 치운다니, 뭘 어떻게 치울 건데.

    재진이 서의우를 말렸다. 어차피 서의우의 저택에는 어지간한 데이트 장소 뺨칠 만한 공간이 많았다. 이 전시실도 그렇고. 서재나 수영장, 파티룸, 하물며 지하에는 트레이닝룸이나 사격장도 있어 어디를 가든 아쉽지 않았다. 게이트가 터지는 참사가 벌어졌던 마당에도 각종 정원수가 심겨 있고 분수대나 조각 등 다양하게 볼거리가 많은 줄 안다.

    “사실 그동안이 이상했던 겁니다. 이렇게 넓은 집을 놔두고 매번 침실에만 박혀 있었던 게.”

    처음엔 눈만 마주치면 가이딩 하느라 바빴었다. 회귀 사실을 알리고 관계가 나아질 무렵에는 화재 때문에 별장 저택으로 이사해 버려서 여긴 다시 올 일이 없었고.

    “봄 되면 떠나게 될 테니 그 전까지 집 데이트 다녀 봅시다.”

    “그래요…….”

    서의우가 턱을 괴고 손끝으로 도드라진 턱관절을 두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끔 그의 눈동자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데이트였구나. 여태 내가 권재진 붙잡고 하고 싶던 게 데이트였다고요……. 어쩐지, 그럼 그렇지…….”

    캔버스 위, 짙게 남은 마네의 붓터치를 지켜보던 서의우가 낮고 서느렇게 읊조렸다.

    “어, 재진 씨. 나 바로 이해됐어요. 우린 키스하고 섹스하고 데이트도 해야 해요. 그리고 나머지도 다.”

    한순간에 서의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건 무지의 알을 깨고 동굴 밖으로 나온 자의 눈이었다.

    서의우가 덩어리진 욕망의 실체를 분별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요한 회색 눈동자에 이지가 깃들고, 권재진을 향한 거대하고 질척한 카오스적인 감정을 일부 구분해 나갔다.

    서의우가 깨우친 것은 욕정과 연정의 차이였다.

    애정 표현은, 키스하고 섹스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이제야 서의우도 획연히 수긍할 수 있었다.

    서의우는 권재진과 바다에 가고 싶고, 협곡에 가고 싶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옅게 웃음 짓던 그 얼굴이 다시 보고 싶었다. 데이트. 바로 그걸 원했다.

    서의우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의 의식이 전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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