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하.’
어느덧 창밖에서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안개를 뚫고 오색 찬연한 아침 햇살이 침실 귀퉁이를 어른어른 밝혀 주었다.
‘하하.’
불현듯, 애써 고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권재진이 가겠다고 하면 서의우는 설령 그곳이 불구덩이라 해도 따라올 놈이다. 처음부터 그런 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 하러 시간을 끌었는지.
[알겠습니다.]
권재진이 손가락에 힘주어 태블릿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문자를 입력했다. 화면에 뜻을 담은 글이 문장의 형태를 이루는 순간이 좀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벅차올랐다.
가슴 깊은 안쪽이 주체할 수 없도록 맹렬하게 쿵쿵 뛰고 있었다.
진정하고 싶어서 잠시나마 숨을 멈춰 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재진은 조금 꼴사납게 헐떡이며 작성한 문장을 확인했다.
[당장 떠나는 건 어렵겠고. 봄에 갑시다. 그때까지 준비 철저히 해서.]
예비할 게 많겠지. 계획도 세워야 하고. 사전 조사도 철저히 해야 하고. 농사법 축산법 두루두루 알아 둬야겠고. 추적당하지 않을 법한 물품을 선별해서 짐을 꾸리고…….
문자 내용을 서너 차례 곱씹어 읽어 본 권재진이 뒤늦게 한 줄 덧붙였다.
[그리고 서의우 씨는 장기 휴가 내고, 앞으로 임무 나가지 마세요.]
서의우의 느른한 목소리와 가라앉은 눈빛, 참담한 표정이 뇌리에 아련히 떠올랐다.
<가기 싫어요…….>
<가기 싫다고요.>
<난 진짜 싫어요. 이렇게 지내는 거.>
저렇게 애틋하게 자꾸 그러면 받아 줄 수밖에 없지 않나. 권재진도 서의우를 억지로 사지에 내모는 건 원치 않는다. 애초에 국가에서 정해 놓은 휴가다. 쓰라고 있는 휴가 쓰는 것뿐인데 별다른 문제 없을 것이다. 문제가 있더라도 이젠 됐다. 조만간 떠날 거니까.
권재진이 문자를 전송했다.
살짝 긴장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연이어 도착하는 흥분해 날뛰는 서의우의 답신을 읽고선 재진의 눈매가 천천히 누그러졌다.
미래를 그린다는 건, 그것도 서의우와 함께 같은 미래를 그린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했다.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만 푹 자고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좀 새로운 삶을 살아 보는 것 같았다.
***
서의우는 그날로 냅다 장기 휴가계를 제출하고서 귀가했다. 권재진이 조금만 다른 판단을 내렸어도 각성자들이 시체 산을 쌓으며 떼로 죽어 나갔을 위기가 무사히 넘어갔다는 뜻이다. 마태오 소령, 장태산 중령, 그들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잡아 죽이려 하는 돌연변이가 바로 그들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었다.
“재진 씨!”
하얀빛을 뿌리며 나타난 서의우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권재진을 찾았다. 오죽 마음이 급한지 좌표이동실에서 나오자마자 들고 있던 소총은 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 머리에 쓰고 있던 고글도 홱 벗어 던졌다.
때마침 권재진은 2층 서재에서 태블릿으로 ‘초보라도 키우기 좋은 채소 종류’를 검색하는 중이었다.
핵의 공명을 느낀 서의우가 곧장 서재로 향했다. 장신의 키로 위협하듯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지만, 그의 얼굴만큼은 여간 화사한 게 아니었다. 가뜩이나 잘난 얼굴이 지금은 온 세상을 다 홀릴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본을 떠서 만든 것처럼 조형적인 눈매가 한껏 휘어져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고, 흠결 없이 날카로운 뺨은 서의우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딱복 서의우다. 게다가 시원스러운 입술은 어찌나 기분 좋게 웃고 있는지. 깊게 파인 입동굴이 관능적이고, 뺨에 쿡 찍힌 볼우물은 무심코 만져 보고 싶게 생겼다.
재진이 태블릿 화면을 끄고 물었다.
“휴가 신청했습니까?”
“네. 다 했어요.”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장 중령이 좀 탐탁잖아 했는데, 뭐 그냥. 항명하고 떨쳐 냈어요.”
“항명?”
“됐어요. 지난 일이야.”
서의우가 곧장 권재진의 허리를 끌어안고 달라붙었다. 기세가 지나쳐서 재진이 마호가니 책장에 등을 쿵 소리 나게 박았다.
“윽.”
서의우는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권재진을 채근했다.
“재진 씨, 우리 이제 진짜 연애해요?”
“……예, 그럽시다.”
“봄에 떠나는 거고요?”
“예, 아무래도 지금은 날이 추워서.”
“하하하! 좋아요.”
권재진은 한껏 기뻐하며 웃는 서의우를 보고 속으로 많은 말을 삼켰다. 최악의 경우 집부터 직접 지어야 할 수도 있다. 서의우의 이능이 있으니 땅 고르고 벌목하고 그런 건 어렵진 않을 테지만, 설계 자체는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 할 터다.
여러모로 막막하긴 하다만, 그래도 뭐…… 당장은 서의우처럼 기뻐하고 싶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하지 않겠나. 그리고 뭐, 잘 알아보면 새로운 신분을 구할 방법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돈 빼돌릴 방법도 있을지 모르고.
“하…… 의우야.”
재진이 서의우의 옆얼굴에 손을 얹으며 불렀다. 서의우는 어떻게 귀까지 잘생긴 건지 모르겠다. 귓바퀴를 만지며 넌지시 물었다.
“너……. 너, 내가 그렇게 좋아……?”
꿀처럼 다정한 대답이 들렸다.
“네. 좋아요.”
“연애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나랑 그렇게 연애하고 싶어?”
“네……. 제발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나만 있으면 돼?”
“보면 모르나요?”
“알든 모르든. 말해 보십시오.”
서의우는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닿은 재진의 손바닥에 머리를 문지르며 웃었다. 앳된 얼굴이 달게 녹아 있었다.
“있잖아요. 재진 씨가 나한테 반말하면 그거 진짜 듣기 좋아요.”
“뭐?”
“의우야라고 불러 주면 더 좋고.”
“…….”
“나 그렇게 부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재진 씨만 그래요.”
항상 보아 왔던 서의우의 회색 눈동자가 오늘은 유리구슬처럼 빛나 보였다. 서늘하지도 않고, 살기 어리지도 않고, 번들거리지도 않고, 그냥 마냥 예쁘게만 보였다.
“재진 씨가 내 전부인 것 같아요. 아닐 수가 없어요.”
“…….”
“재진 씨 생각만 하고, 재진 씨 걱정만 하고, 항상 재진 씨만 다……. 내가 온통 재진 씨로 이뤄져 있는데, 자명한 거 아니에요?”
결국 서의우가 쿡쿡 웃는 소릴 내었다. 너무 좋은지 웃음이 샜다.
“아, 재진 씨가 나 좋아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재진 씨가 나랑 연애해 줘서……. 안 그랬으면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짓을, 뭘 했다고…….”
“글쎄요. 그냥 다 죽였겠죠. 아님 재진 씨 질질 끌고서 억지로라도 떠났거나……. 그런 일 벌어지지 않아서 참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허…….”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나 많이 미치게 하지 않고 조금만 미치게 해 줘서. 재진 씨 정말 좋아요.”
이게 무슨 괴상한 고백인지 모르겠다.
권재진은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서의우가 아슬아슬한 말을 하는데도 꺼림칙하기는커녕 묘하게 귀엽게 보였다. 이것도 참 문제다.
“예, 그래요, 서의우 씨……. 저도 서의우 씨 좋습니다.”
“의우야라고 해요.”
“……어, 의우야. 나도 너 좋다고.”
“그럼 재진 씨도 나처럼 그래요? 나만 있으면 되고, 내가 전부예요?”
“그거는…….”
이런 노골적이고 낯간지러운 말을……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대화를 하고 있다니. 요즘 초등생들도 이렇게 유치하게 고백하진 않을 것 같다.
“왜요. 아니에요? 나처럼은 아니야?”
“뭐 꼭 아니라고 할 만한 건 아니고…….”
“응? 뭔데요.”
“제 눈에 서의우 씨가 귀엽긴 합니다.”
“나 귀여워요? 이상하다……. 귀여운 건 재진 씬데.”
“여러모로 놓고 보나 서의우 씨가 귀여운 겁니다. 저는 아니고.”
재진이 말을 하고 있는데, 고작 그새를 못 참겠다는 듯 서의우가 입술을 찍어 눌렀다. 권재진은 입술이 눌렸다 떼어졌다 하면서 부정확한 발음으로 계속 말했다.
“서의우 씨 나이도, 읍, 어린 게……. 감정 숨길 줄도, 웁, 모르고……. 어른 곤란하게만 만들고…….”
“하하, 누가 어른이에요. 권재진 씨 내 아기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바로 그런 점이 곤란…… 으읍.”
아, 그놈의 아기 타령. 지긋지긋하다. 세뇌당할 것 같다. 보고 싶다 주문에 걸린 것처럼 저 주문에도 걸리면 어떡하나 싶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서의우가 입술을 한껏 겹쳐 핥기 시작했고, 더는 말할 겨를이 없었다. 권재진은 그의 귀를 지분거리며 입맞춤에 응해 주었다. 간지러운지 서의우가 목울대를 움찔거리며 혀를 놀렸다. 아랫입술을 양껏 핥고는 입 안쪽으로 파고들어선 혀끼리 얽어 빨았다.
서의우는 권재진의 혀가 달콤한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탐닉했다. 그가 혀뿌리를 문지를 때마다 비음이 새었고, 서의우는 그 소리를 더 듣고 싶은지 숨을 쉬지도 못하게끔 집요하게 굴었다.
“흐으…….”
“응, 으…….”
서의우는 재진의 눈이 풀릴 때까지 키스했다. 하반신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의 굵은 좆이 바지 안에서 명확한 형태를 이루었다. 서의우는 발기했는데도 우선 입맞춤에만 열중했다.
끈덕한 타액을 빨아 먹으며 서의우가 속살거렸다.
“재진 씨…… 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