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83)화 (83/154)
  • #83

    다 죽이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렇게까지 놀랍지 않았지만, 다 버리고 도망가자는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의우는 늘 권재진을 가둬 두려고 했으므로.

    밖은 위험하고, 집 안은 안전하고. 그는 항상 그 논리로 일관했다. 그렇기에 재진을 묶어 놓기까지 한 거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모두가 혈안이 되어 S등급 돌연변이 가이드를 색출해 내려 한다. 가뜩이나 특수 거주지구는 각성자들로 우글거리는 적진인데, 그들이 권재진을 목표 삼고 뒤쫓고 있으니, 재진의 처지가 전에 비할 수 없도록 위태로워진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달라진 서의우의 상태도 문제다. 예전이야 권재진을 숨겨 놓고도 서의우가 냉정하게 임무에 임했다지만, 지금은 저 지경으로 불안해하니 걱정될 따름이었다. 전투에 집중하지 못해서 잘못될까 싶은 것도 문제고, 몸담고 있던 각성자 사회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도 문제다.

    이대로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계속 흐지부지 지내다간 서의우가 끝내 살인까지 저지를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사망자로는 아마도 마태오 소령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얼마나 기다려요? 곧 교대 시간 끝나가는데……. 많이 못 기다려요.”

    서의우가 투정 부리듯 재진의 목덜미에 뺨을 문질렀다. 마음이 급한데 재진에게서 답이 없으니 조바심 났다. 권재진이 난감한 한숨을 삼켰다.

    “그러면, 그럼 일단…… 서의우 씨는 부대로 복귀합시다. 지금 당장 결정 내릴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요. 이유가 뭔데요. 도망치자는 거 실망스러워요? 연애 못 할 것 같아?”

    “그게 아니고, 생각 좀 해 봐야겠습니다……. 서의우 씨 퇴근하면 다시 차근히 얘기합시다.”

    재진이 우선 시간을 벌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고민하고 생각해 보고 싶었다. 아마도 일생일대의 결정이 될 문제일 테니. 이는 서의우와 권재진이 인생이 전부 걸린 기로였다.

    한번 도망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적어도 그 정도 각오를 내릴 시간은 필요했다.

    “하, 그럼 재진 씨 깼으니까 키스하고 갈래요.”

    “의우야…….”

    “입 벌려 줘요. 한 번만요.”

    “웃.”

    “옷 벗겨도 돼요?”

    “안 됩니다. 옷은 안 돼.”

    “조금만 만질게요. 진짜 쪼끔.”

    연신 달라붙는 서의우를 겨우 달래 돌려보내고, 홀로 빈 침대에 남은 재진이 공허한 옆자리를 쓸었다. 곧 서의우를 뒤따라 사라질 그의 온기를 붙잡아 보기라도 하려는 듯 침대보를 슥슥.

    버석했다. 아쉬웠고.

    아무래도 서의우의 주문이 참 대단한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보고 싶었다.

    ***

    언젠가 서의우가 물어본 적이 있다. 무슨 계절이 좋냐고.

    권재진은 봄 또는 가을이 좋다고 답했다. 냉방비 난방비가 들지 않아서.

    그러자, 서의우는 이렇게 말했다.

    <권재진 씨는 현실적인 사람이네요.>

    그렇다. 재진은 그런 사람이다.

    도망치자는 말. 다 버리고 떠나자는 말. 제6 거주지구에 가서 재진의 가족과 과거의 삶을 알아보자는 말. 일반 사회에 숨어 평범한 일반인들처럼 제대로 연애해 보자는 말.

    다 좋았다.

    다 좋은데…… 그러면 어떻게 지내게 되는 걸까.

    무작정 떠나면 거처는 어쩌고, 생활은 어쩌고, 직업은 어쩔까……. 쫓기는 중이니 권재진의 신원은 사용할 수 없을 게 뻔하고, 서의우의 신원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에서 주민 등록 되지 않은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할 수 없다.

    주소 등록, 계좌 거래, 근로 계약. 다 불가능해진다.

    그러면 그냥 떠돌이 부랑자가 되어 이곳저곳 전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권재진은 본래 금융업에 종사했었다. 서의우가 가진 예금을 현금화해서 싸 간다고 해도 일반 거주지구에서는 사용할 수 없을 줄 안다. 격리 체제 때문에 각성자의 계좌에서 인출한 화폐는 특수 거주지구 밖으로 반출할 수 없도록 일련번호로 구분되어 있고, 금괴나 귀금속으로 바꿔 가져간다 해도 금괴 역시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으며 귀금속 등은 보증서가 붙어야 제값을 받는다. 전부 추적된다.

    그렇게 치면 제약이 너무 많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강도질을 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건가?’

    어디 인적 드문 산골…… 주인 없이 다 스러져 가는 오두막 같은 곳에서 서의우랑 둘이 오순도순 지내는 거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식량은 서의우더러 야생 동물이라도 사냥해 오라고 하고, 권재진은 텃밭 가꾸고 농사짓고, 닭이랑 병아리 키우고, 버섯 재배하고, 뭐 그렇게……?

    ‘되려나. 그 정도는 괜찮으려나.’

    내심 한 번쯤 그런 한적한 곳에서 평화롭게 살아 보고 싶긴 했다. 소박한 전원생활 같은 거 말이다. 푸르른 녹음이 짙게 깔린 자연을 곁에 두고, 자유롭게 밖에 나가 산책도 하고, 따사로운 햇볕도 쐬고, 씨 뿌리고 흙 만지고, 장작 패고 아궁이 눌은밥 짓고, 서의우랑 같이…… 그러면 또 좋기는 좋겠다.

    ‘그렇지만 입맛에 딱 맞는 장소가 쉽게 발견될 리 없겠지.’

    밭일도 농사일도 무턱대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닐 터다. 힘든 일, 험한 일, 마다하지 않고 바지런해야 살아남는 농축 산업이고, 얕봐선 안 되는 줄 안다. 서의우의 이능이 있으니 여간한 작업은 쉽게 한다 쳐도, 무자본으로 시작하려면 사전 지식을 갖고, 조사하고, 실패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을 때나 뛰어들 수 있다.

    더군다나 지금은 계절도 계절이다. 한겨울인데 지금 나가면…….

    ‘아…… 그래, 계절이 문제로군.’

    적어도 봄이면, 그때는 꽤 해 볼 만하지 않을까.

    날이 풀릴 때까지 겨우내 서의우와 권재진이 다방면으로 단단히 준비하고, 각오 마쳐서, 치밀한 계획하에 떠나면…… 그건 조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영 허황한 꿈은 아닐지도.

    ‘그나마 아까보다는 어느 정도 현실감이 생기는 것 같군.’

    그러면, 이제 일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면, 서의우와 권재진 단둘이…… 말 그대로 단둘이 지내게 되는 걸까…….

    이토록 참연한 세상에서, 가진 것 다 버리고, 에스퍼고 가이드고 각성자고 돌연변이고 다 떠나서,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둘만……?

    권재진이 26년 일생을 버리고 서의우와 함께하게 된 것처럼, 서의우도 20년의 일생을 버리고 권재진과 함께하게 되려나. 그걸 하고 싶다는 건가?

    이 3천 평짜리 저택이나, 곧 완공을 앞둔 대저택, 거기에 850억 원의 자산, 별도로 쌓여 있는 연금 및 포상금을 한순간에 날려도 하등 상관없다는 것인가?

    거기에 그가 타고나고 쌓아 올린 눈부신 영예와 화려한 공적, 다가올 찬란한 앞날까지도, 전부 휴지 조각처럼 내다 버릴 수 있다는 뜻인가……?

    서의우는 그래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걸까.

    ‘아니, 그런 것까지 고려하지 않았겠지……. 서의우는 일반 사회를 모르니 어느 정도로 열악하게 지낼지 알지 못할 거다.’

    각성자들은 등급과 계급이 높을수록 고액연봉자다. 서의우는 태생부터 부유했다. 그러니 흙바닥 오두막에서 지내는 것을 반기지 않을 수 있었다.

    ‘하……. 그래, 뭐……. 모르겠다.’

    밤새워 잠 못 이루고 침대에서 뒤척이던 재진이 태블릿을 들었다. 서의우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 볼까 했지만, 어차피 잠이 오지도 않으니 포기해야겠다.

    재진이 까만 태블릿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화면을 켜서 문자를 툭툭 입력했다.

    [서의우 씨. 뭐 좀 물어봅시다.]

    답장은 무척 빨랐다. 마치 권재진이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재진 씨 이제 일어났어요? 잘 잤어요? 뭔데요?]

    [아니, 잠은 안 잤습니다. 물어볼 건 다름 아니고.. 도망치자는 얘기 말입니다.]

    [네네]

    [서의우 씨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일반 거주지구로 가면 불분명한 신원으로 도피 생활 해야 해서 아마 높은 확률로 빈손으로 살아야 할 겁니다. 집도 재산도 없이.]

    [네]

    [그래도 아무 상관 없습니까? 다 버리고 가자고?]

    서의우의 답장은 정말 빨랐다. 단답이기도 했거니와 확고했다.

    [난 좋아요]

    좋다니. 뭐가. 어떻게.

    재진이 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문자가 또 하나 도착했다.

    [재진 씨만 있으면 다른 건 상관 없어요]

    권재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타자 치는 손동작이 조금 격양되어 있었다.

    [아니 상황을 정확히 알고서 얘기하는 것 맞습니까? 만일의 경우 맨땅에서 노숙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지내야 해도 상관없는 겁니까?]

    [음.. 있죠. 상황을 확실히 모르는 건 재진 씨예요.]

    [예?]

    [평소 개척지구로 장기 임무 나가면 노숙이고 야영이고 당연해요. 게이트 한 번 들어가면 맨땅이 아니라 사체투성이인 늪지대에서도 먹고 자야 하고..]

    ……아.

    그런가.

    각성자는 평소 더 험한 꼴을 겪는 건가……?

    [일반 거주지구 어딜 가든 개척지구나 게이트 내부보단 상황이 좋지 않나요? 아니 설령 그보다 더 열악하더라도 난 문제 없어요. 재진 씨만 걱정이지.. 재진 씨 너무 연약해서...]

    [그건 아닙니다. 개척지구.. 보다는 나을 겁니다. 아마.]

    [뭐야! 그럼 됐네요!]

    [그게 된 겁니까..]

    아니…….

    됐다고……?

    결정 끝이라고? 이렇게 간단히?

    ‘저 녀석, 어떻게 한 번을 망설이질 않아.’

    한 번을. 진짜 딱 한 번을.

    권재진 걸린 일에 주춤하는 꼴을 못 본다.

    서의우는…… 그가 바라보는 곳은, 어느 때건 변함없으므로. 결심에 고민할 필요도 없고, 결단에 시간을 들일 이유도 없다.

    맹목적이다 못해 광신도 같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신이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