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82)화 (82/154)

#82

“당장 각성자들이 일시에 몰살당하면, 크리처와는 어찌 싸우고 게이트는 어찌 처리합니까. 부족한 인력을 차출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남은 자들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아직 훈련 교육생에 불과한 어린 각성자들이 최전선에 투입될지 모른다.

더는 보호받지 못하게 된 일반인들은 아비규환에 빠질 것이다.

인류는…… 그 미래는…….

훤히 보이는 결과를 알면서도, 서의우에게 찬동할 순 없었다.

“그럼, 재진 씨는요? 재진 씨는 어떡하고요.”

“뭘 어떡합니까. 저는 서의우 씨가 잘 숨겨서 지켜 주기로 했잖습니까.”

“아니. 재진 씨는 이걸 어떻게 견디냐고요.”

서의우가 욱신거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까부터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아 눈동자가 메말라 있었다. 눈알 혈관까지 곤두섰다.

“나만 해도 이렇게 억울하고 답답한데……. 재진 씨는 어떻게 참아요?”

“…….”

“돌연변이라서 죽어야 한다는데, 죄다 재진 씨 죽이려 드는데, 그거 어떻게…… 어떻게 견뎌 내요? 회귀하기 전에는요? 4년씩이나 이걸 감당했어요? 미치지 않고 어떻게 살았어요? 여차해서 들통나면 그냥 죽어 버릴 생각이었나요? 그래서 번번이 기회만 되면 쉽게 죽으려 들었던 거예요?”

어떻게 견뎠냐고……?

어떻게 살았냐고……?

입술이 스르르 닫혔다. 말문이 막힌 권재진이 혓바닥에 힘을 주었다.

말갛고 앳된 서의우의 얼굴이 보다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절박함의 끝에서 서의우는 권재진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권재진은 서의우가 이해할 만한 답을 내려 줄 수 없었다.

“그야…… 그때는…….”

그러게.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살았더라……?

“서의우 씨가…… 살려 놨으니까.”

죽으려고 했는데, 서의우가 부득불 살려 놨다. 권재진이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굴고, 실제로도 큰일이 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고, 기억을 지워 버리고, 묶어 놓고, 매달리고, 울고, 빌고, 사귀자고 보채고, 몸으로 감정으로 수차례 부딪쳐 대서……. 그 대단하고 비범하고 강력한 서의우가, 만인의 경외를 받는 불세출의 영웅 서의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오직 권재진만 원하는 것처럼 굴어서…….

그게, 그러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뭉개져 버린 거다.

사실은 권재진도 아직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그냥 권재진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 생각보다 별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던 것 같다.

한순간에 납치당해서, 사내 좆이나 박히면서, 눈앞에 있는 건 말도 안 통하는 개새끼고, 집 밖에 있는 건 총 든 각성자들이고, 그런데…… 그랬는데도…… 가끔씩 눈에 보이곤 하는 거다.

구겨진 침대보나, 환하게 켜진 전등,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란 바다, 유리창 밖에 빗물 맺히는 풍경. 그냥, 그런 게 쌓인 거다.

실제 총을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감, 계절이 바뀔 때 미묘하게 달라지는 냄새, 집밥 먹고 싶어서 어찌어찌 만들다 다 태워 버린 계란말이가 죽을 만큼 맛이 없었을 때나, 서의우에겐 절대 당해 낼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팔굽혀펴기를 해 댔을 때, 그 팔굽혀펴기를 어제보다 오늘 두 개 더 했을 때, 그냥 식칼이 애착식칼로 거듭났을 때, 깊게 자고 일어나서 개운했을 때, 뭐……

슬쩍 스친 서의우의 귀가 생각보다 몰캉했고, 동그랗게 말린 곱슬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서의우가 웃으면 귀엽고, 울면 갑갑하고, 얼굴이 눈에 밟히고, 눈빛이 생각나고. 그런 별것 아닌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이게 이유가 될까?

이걸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모르겠다. 아직도.

그래도 권재진은 그냥 그렇게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서의우는 항상 권재진을 그런 기분으로 만들곤 했다.

권재진이랑 연애하고 싶다고, 이십 년이나 동고동락한 각성자들을 다 죽이겠다는 이 서의우를…… 얘가 이러는데…… 권재진이 이걸 대체 어쩔 수 있을까.

어떻게 이기겠나. 못 이기지.

서의우는 언제나 권재진을 뛰어넘었다.

가슴이 미어지고, 영혼이 떨리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저를 송두리째 흔드는 상대를 두고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안 그런가……?

누군들 안 그럴까……?

그러니까 권재진은 이제 좀 잘 살아 보고 싶지, 헛발질하고 싶진 않았다.

“……서의우 씨가 저를 살린 겁니다. 서의우 씨는 제가 어떻게든 견디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괜찮은 거예요……?”

“예, 뭐. 그럭저럭.”

“나도 전에는 괜찮을 줄 알았어요. 이렇게 지내는 거.”

“서의우 씨가요?”

“재진 씨를 잘 숨겨 두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았어요. 발각되지 않으면 그만이잖아요. 어차피 난 거짓투성이니까. 누구도 모를 비밀 하나 추가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서의우가 손바닥의 부드러운 면으로 권재진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권재진과 함께 있는 한순간 한순간이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마저도 아깝게 여기는 듯한 손길이었다.

“안 들킬 자신 있었고, 심지어는 꽤 쉬울 것 같았어요. 할 만했죠, 전에는. 다 괜찮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

“환멸 나요.”

“…….”

“응, 환멸. 딱 그거인 것 같아.”

그가 재진을 바짝 끌어당겼다. 겨드랑이에 팔을 걸어서 제 몸 위에 올려놓았다. 권재진의 체중을 오롯이 받으며 서로의 가슴이 딱 붙게 했다.

재진이 느끼지 못하는 핵의 공명을 서의우만이 느꼈다.

“난 진짜 싫어요. 이렇게 지내는 거.”

권재진의 시신을 가져오란 지시를 들었을 때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권재진을 찾기 위한 목적인 줄 알면서도 수색부대가 찾아낸 크리처를 모조리 죽여야 했다. 그런 짓을 앞으로도 반복해야만 한다.

“재진 씨가 괜찮대도 내가 안 괜찮아.”

더군다나 서의우는 타고난 힘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부서뜨릴 이능이 있다. 전에는 그 힘을 다룰 수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하다. 시간이 흘러 권재진과 함께하고 가이딩 받을수록 서의우는 더욱 강력하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 어떡해요?”

참을 수 있을까. 이걸.

“재진 씨, 나 어떡해?”

멀쩡히 견딜 수 있을까. 이걸……?

권재진이 좋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다 갖고 싶다. 권재진의 모든 것. 그의 전부를. 몸과 마음, 과거와 미래, 권재진의 인생을 통째로 모조리. 다 가지고서 소중하게 대하고 싶다. 세상에 서로뿐인 것처럼. 단둘뿐인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권재진만 아낄 수 있으면 서의우는 세상이 어떻게 참혹하게 무너지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른 건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환멸 나고, 찢어 버리고 싶고, 그저 진심으로 죄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우리…… 우리 그냥 도망칠까요?”

서의우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속삭였다. 들리는 목소리는 담백했지만 문장에 담긴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도망쳐요. 나 각성자 안 할래요. 여기에 섞여 있고 싶지 않아요.”

권재진이 두 눈을 부릅떴다.

도망치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의우가 저런 말을 한다고?

“그냥 다 버리고 가면 어때요? 멀리. 응?”

“어디, 어디로…….”

“어디든. 다 좋아요. 제6 거주지구여도 좋겠네요. 재진 씨가 살던 곳…… 가 보고 싶어요.”

“뭐……?”

“재진 씨가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고, 재진 씨도 알고 싶어 했잖아요. 가족.”

서의우가 세찬 태풍처럼 몰아쳤다.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권재진을 어지럽혔다. 또다. 또 영혼까지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재진 씨가 나더러 되찾아 달라고 했잖아. 권재진 유년기. 구멍 난 머릿속 기억은 못 돌려줘도 제6 거주지구 가 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잠깐만……. 서의우, 잠깐만.”

“어디든 숨어 사는 건 똑같아. 여기서 숨나 저기서 숨나. 그러니까 가서, 아무도 모르게 우리 둘만 가서, 제대로 연애해요.”

“아…….”

“재진 씨 그러고 싶다면서요. 평범한 일반인들 하는 흔한 연애 하고 싶다면서요. 진짜로 일반인들 틈에 섞여서 우리 그렇게 해 봐요. 이것도 안 되겠어요? 내가 이러자고 하면…… 헤어지고 싶어요?”

“아니…… 갑작스럽습니다. 잠시만요. 기다려, 기다려 보라고.”

재진이 서의우를 붙들었다. 앞서 나가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회귀까지 했는데도. 권재진은 이미 4년씩이나 서의우를 앞선 채로 새 인생을 시작했는데도. 출발선이 달랐던 여유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서의우는 태연하게 권재진의 발상을 훌쩍 뛰어넘어 또다시 재진의 삶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 기분이란, 정말…….

번번이 당할 때마다 참 그렇다.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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