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사과하세요. 잘못했다고.”
서의우가 홀린 듯이 되물었다.
“……사랑이요? 사랑니 할 때 그?”
권재진은 하필, 이라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예, 그런 게 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악질적인 게.”
“…….”
“사과 안 합니까?”
“내가 한 게…… 폭력이었어요? 그랬어?”
한결 힘이 풀어진 손이 다가왔다. 서의우가 권재진의 볼을 조심스레 그러쥐고 신경 써서 만졌다. 불면 날아갈 깃털처럼. 건드리면 터질 비눗방울처럼.
“재진 씨가 이런 얼굴 할 정도로?”
이 붉어진 표정이 서의우의 마음을 겪어 본 적 없는 형태로 뒤흔들었다. 백 마디 말보다도 더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보지 마십시오. 눈 돌려. 안면 상태 이상한 거 저도 잘 알겠으니까.”
“이걸 나더러 어떻게 외면하라고…… 미안해요.”
“…….”
“잘못했어요.”
“…….”
“그냥, 재진 씨랑 이러고 싶어서 그랬어요. 같이 기분 좋게 자고 있었는데, 재진 씨 혼자 어디 보내기도 싫었고, 자지 빼 주기도 싫었고, 애정 표현해 주고 싶었어요. 재진 씨가 나한테 안겨서 오줌 싸면 귀여울 것 같았어요. 실제로 귀여웠어요. 되게 좋았어요. 매일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난 또 보고 싶어요.”
“서의우…….”
“아니, 나도 알아요. 내가 좀 이상한 거. 다른 누구 상대론 이런 지저분한 생각 맹세코 해 본 적 없어요. 냄새날 것 같고, 으…… 불결해요. 하지만 재진 씨는…… 난 그냥 재진 씨가 관련되면 맥을 못 추는 것 같아요.”
서의우가 절박하게 주절거리며 권재진의 얼굴을 망막에 새기듯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무서운 기세로 권재진을 향해 있었다.
권재진의 표정, 이 모습, 그 속에 담긴 감정까지 모조리 으적으적 뜯어 먹을 것처럼.
권재진을 향한 어둑한 집착과 맹목이, 일몰에 길어지는 그림자처럼 끝도 없이 몸집을 키우고 불어났다.
“처음에는 내가 에스퍼고, 재진 씨가 내 가이드라 그런 줄 알았어요. 본능을 뒤좇느라 이상한 욕구까지 생긴 줄 알았어. 그렇지만 재진 씨도 알다시피, 그거 아니에요. 난 가이딩 효과 조금도 없더라도, 그런 거 관계없이 재진 씨 일이면 그냥 이래요.”
점차 가까워지던 서의우가 결국 권재진과 닿았다. 재진의 뺨에 서의우의 높고 곧은 콧대가 닿아 눌렸다. 얇고 긴 속눈썹도 눈가를 스쳐 간질였다.
“사람을…… 내가 본심으로부터 진지하게 사람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어요.”
“…….”
“마태오 죽여 버리겠다는 발언, 재진 씨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라고 쉽게 뱉은 말 아니에요. 크리처라면 수도 없이 죽여 봤고, 전사하는 동료들도 여럿 봐 왔지만, 그렇대도 내 손으로 직접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거…… 그런 결심, 재진 씨라면 간단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의우가 권재진을 소리 없이 끌어안았다. 어느새 안겼는지도 모르게끔 그가 다가와 재진을 품에 안고 있었다.
맞붙은 얼굴과 겹친 몸뚱이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서의우의 온몸은 딱딱했고, 차게 식어 있었다. 권재진이 헤어지자고 한마디 했다고, 전신의 모세 혈관 하나하나까지 피가 싸늘하게 얼어 버린 사람 같았다.
“나는 그래요. 이젠 권재진 걸리면 실제로 살인까지 할 수 있겠어요. 그 사실을 내가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요……. 재진 씨, 알겠나요? 이 무게를.”
“…….”
“근데, 재진 씨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면…… 내가 진짜 미친 새끼 같잖아요.”
서의우가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커다란 몸체를 떨었다. 깎아 놓은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한 근육이 그가 헐떡거릴 때마다 들썩이며 권재진에게 닿아 눌렸다.
재진은 서의우에게 안긴 자세 그대로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그를 밀어 내지도 않았고, 마주 껴안아서 받아 주지도 않았다.
“……서의우 씨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제 마음도 좀 알아주십시오.”
“재진 씨 마음, 무슨 마음.”
서의우가 살벌하게 눈을 내리뜨곤 나직하게 읊조렸다.
“연애하기 싫다고? 내 애인 안 한다고? 나랑…… 뭐요, 서의우 추접스러운 짓 해 대는 정신병자 같아서 역겹다고……?”
“그렇게까진 아닙니다. 그냥…….”
“그냥 뭐요!”
“하아, 저는 서의우 씨와…… 이, 이런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서의우는 일반 사회의 상식에 무지하다.
연애를 모른다.
권재진이 서의우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아예 짐작조차 못 하겠지…….
“……이번에는 후회 없도록 살아 보고 싶었습니다. 서의우 씨랑 작은, 아주 소소한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해 보면서……. 돌아가는 상황과 여러 여건이 따라 주지 않아 아직 아무것도 못 했지만…….”
거창한 걸 바랐던 게 아니다.
데이트해 보고, 커플룩 입어 보고, 기념일 세고, 선물 주고, 러브 레터 써서 교환해 보고, 반지 맞추고, 애칭 정해 주고, 뭐 그냥…….
흔한 연인들이 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걸…….
1회차에서도 못 해 봤던, 그, 평범하고 하찮은 그런 걸, 서의우와 해 보면 어떨까 하고 혼자 속으로 곱씹어 생각했었다.
좆 박히면서 오줌이나 싸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의우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다. 권재진이 미간을 힘겹게 찡그렸다.
“서의우 씨와 정말로 헤어지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서의우 씨가 멋대로 주물러 터트려 왜곡해 버린 괴상한 연애가 하기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는데도 끝까지 제 의사를 개무시하고 좆대로 굴었던 것도 밉게 보였고…….”
“그럼, 헤어지진 않겠다는 건가요? 지금 그런 말 하는 거잖아요. 권재진 씨 내 애인이라고.”
“기다리세요. 아직 제 할 말 다 안 끝났습니다.”
재진이 쓰디쓴 한숨을 토해 내며 서의우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에게 체중을 실어 몸을 내맡기곤 다시 또 한숨을 뱉었다.
서의우가, 서의우를, 서의우는…….
아주 악질 중의 최악질이다.
한참 전부터 돌이킬 수 없어진 권재진이 마지못해 그의 등을 느슨하게 안았다. 팔을 올려 곱슬거리는 투명한 흑발 머리카락을 슬며시 잡아 쥐었다.
손 틈새로 쓸어 보면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회색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번져 있었다. 서의우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빼어난 고혹적인 얼굴이 불이 붙어 타 죽어 가는 사람처럼 거무죽죽했다.
“……서의우 씨.”
“네.”
“데이트, 커플링, 커플룩, 러브 레터……. 제가 지금 말한 이 단어 중에 서의우 씨가 아는 것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어요. 뭔가요, 그건?”
“앞으로 서의우 씨와 제가 할 것들입니다. ……정확히는,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이죠.”
“재진 씨가요……?”
“회귀 전에도, 그러니까, 4년 후에도 할 수 없던…… 하지 못했던 그런 것들입니다.”
서의우가 기다란 눈을 한차례 깜빡였다. 섬찟하게 굳어 있던 그 얼굴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권재진은 스무 살짜리 앳된 서의우를 착잡한 심정으로 응시하며 가슴에 차오르는 버석하고 끈덕진 감정을 밑바닥으로 밀어 눌렀다.
고작 4달이다.
이 서의우는 권재진과 만난 지 고작 4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권재진은 4년이었다.
무려 4년씩이나 끊임없이 1회차 서의우를 보고, 듣고, 싸우고, 버티고, 밀어 내고, 증오하고, 혐오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노력하고, 공생하고, 수용하고, 믿고, 허락하고, 끝내는 죽고 회귀하고 배신당하고…….
그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이 어린 서의우의 손을 다시 잡은 것이다. 기억에 뚫린 구멍이 있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그의 곁에 있기로 결심하고, 그와 사귀어 보겠다고. 그런 각오를 내린 것이다.
서의우는 권재진 때문에 살인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지만, 권재진은 설령 서의우가 살인자가 되더라도 그의 곁에 남을 것이다. 권재진의 마음은 그랬다.
“일반 사회에서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흔한 행동이지만, 회귀 전에는 이런 걸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게이트가 터져서 제가 죽어 버리기도 했습니다만, 그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1회차 서의우 씨에겐…… 같이 해 보자고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고.”
“……어째서요? 왜 그랬는데요?”
“그러게요. 어째서였을까.”
1회차 서의우와 함께 선 곳이 진흙탕이었기에 그랬을지 모르겠다.
그 서의우와는 이런 식으로 풋풋하고 아기자기한 애정 행각을 벌일 수 없었다. 4년이 지났어도 그를 허심탄회하게 대할 순 없었다는 뜻이다. 2회차 서의우와 달리 1회차 서의우는, 서로 상처 주고 상처 입히는 관계로부터 시작했기에…….
“서의우 씨는 저에게 제대로 사귀어 보자고 했었죠.”
<재진 씨랑 나, 우리 정말, 제대로 사귀어 봐요.>
“예, 좋습니다. 어디 한번 그래 봅시다.”
끝을 향해 가 보는 거다.
권재진과 서의우가,
진정으로.
“제대로 연애해서,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요.”
재진의 검고 곧은 눈동자가 제 자리를 찾았다. 흔들림 없이 서의우를 응시하며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소용돌이치는 사나운 회색 눈동자, 야생 짐승 같은 날것의 거친 그 눈과 격렬하게 부딪쳤다. 눈빛에서 새파란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