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59)화 (59/154)

#59

하물며 가족을 빼앗겼는데도…….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언젠가 그것마저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게 생겼다.

정말이지, 미쳤다. 단단히. 미쳐 돌았다.

“질렸습니다. 서의우 씨의 그 대단함에. 대체 왜 아직도 만족을 못 합니까?”

4년 후에도 이랬냐는 둥, 안달복달…… 뭐, 자기 자신에게 질투라도 하는 건지 뭔지.

권재진이 허망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욕조 속에 너무 오랜 시간 들어가 있어서인지 어지럼증을 느꼈다. 손발이 저릿하고 머리가 멍했다.

“서의우 씨는 진작부터…… 권재진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굳이 파헤쳐 제 눈앞에 노골적으로 들이밀려 합니다. 버거워요.”

“…….”

“과욕입니다. 집착도 과하고.”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서의우는 이미 다 가졌다.

권재진의 육신과 감정, 과거와 미래, 인생까지도…….

그렇게까지 탐내지 않아도 전부 서의우의 것이다.

“너무, 어린애 방식입니다……. 그런 연애.”

아, 말실수했다.

서의우가 기다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연애……요.”

“아니, 실수한 겁니다.”

“우리 이거 연애하는 건가요?”

“실수라고 했습니다. 말이 잘못 튀어 나간 겁니다. 지금으로선 이 관계는 어느 쪽으로도 정립할 수 없습니다.”

“그럼 지금 정립하면 되잖아. 해요, 연애.”

“……하아, 싫습니다.”

과욕이라는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재진이 지친 한숨을 연거푸 뱉었다. 이젠 정말 좀 쉬고 싶었다. 마음 편하게 좀.

늘어진 재진이 욕조 밑으로 조금 가라앉았다. 서의우는 그를 추슬러 겨드랑이 아래 팔을 끼웠다. 깨알보다 작은 점을 끈덕지게 만지작대며 추궁했다.

“왜 싫어요. 또 왜.”

아, 저 난폭한 망나니 새끼. 또 날뛰려 그런다.

재진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기다리십시오.”

“뭐야, 그렇게 내가 어려요?”

“예. 풋내 나서 못 써먹겠습니다. 좀 나중에요.”

아무래도 지금은 권재진에게 여유가 없었다.

그를 붙들고 연애 놀음이나 하기엔 마음 정리가 덜 되었다. 적어도 이런저런 매몰된 감정 속에서 헤어나 회복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나.

“……나이는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닌데. 재진 씨는 내게 꾸준히 불가능만 요구하네요.”

서의우가 언짢게 읊조렸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심히 사납게 들렸다만 권재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역시 너무 피곤했다.

“그냥 잠자코 기다리면 되는 겁니다. 제일 쉬운 거예요…….”

재진이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물방울 맺힌 욕실 벽면부터 천장까지 갈라진 균열이 보였다.

침실도 저렇던데 욕실마저 이렇다. 서의우가 오죽 이능을 참지 못했으면 집 안이 이 지경으로 온통 갈기갈기 찢겨 있는지. 이러다 집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실없는 걱정이 들었다.

그나저나 불가능이라…….

불가능…….

깊게 갈라진 틈을 물끄러미 보던 재진이 눈꺼풀을 차근히 내리감았다.

눈을 감으니 다시 잠이 밀려온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서의우 씨. 부탁 하나만 합시다.”

“뭔데. 말해요.”

“언젠가…… 먼 훗날에 말입니다.”

“네.”

“제가 죽을 날이 오면…… 늙어서 죽든 아파서 죽든, 그런 때가 오면…… 서의우 씨가 제 기억 좀, 돌려줄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조금 더 자야겠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이제는 식사도 제대로 좀 챙겨 먹어야 할 것 같다. 운동도 오래 쉬었다. 더 이상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슬슬 몸을 움직여 망가진 체력을 회복해야지 싶다.

“……허.”

서의우가 기막히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먼 미래의 일이라도, 권재진의 사망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낯으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무리예요. 재진 씨보다는 분명 내가 먼저 죽을걸요. 에스퍼 평균 수명이 몇 세인지는 알고 있나요.”

“그야, 서의우 씨가 먼저 전사할 확률이 크기는 합니다만…… 나이는 제가 더 많기도 하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습니까.”

눈을 감은 재진은 서의우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지금 서의우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려나.

권재진의 것이나 다름없는 그 회색 눈동자가 어떤 빛깔을 내고 있을까…….

“저라고 그렇게 갑자기 게이트에 휘말려 죽어 버릴 줄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어쩌면 저는 4년 후에 사망할 운명을 타고난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 속설을 들어 본 것도 같다.

사람에게는 정해진 수명이 있어서,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날을 미리 받아 놓는다고.

그 이야기가 진짜라면 권재진은 결국 4년 후, 1회차 인생이 끝났던 날과 똑같은 일시에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예정된 미래를 바꿔 놓든 어쩌든, 애쓴 노력과 아무 관계 없이.

재진이 숨죽여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러니까…… 만약 제가 정말로 잘못된다면 말입니다. 4년 뒤건 언제건,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오면…….”

“…….”

“제 숨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 떠올릴 수 있게, 돌려주십시오.”

그때라면,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잠자코 기다리는 건 제일 쉬운 일이다.

***

며칠간 미적지근한 날이 이어졌다.

권재진은 조금씩 일상으로 복귀했고, 서의우도 그에 응했다.

이불 속에 한데 엉켜 잠들게 되었고, 제대로 된 식사와 운동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가이딩도 함께 하게 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싸웠다는 사실이 마치 거짓인 양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렇대도 이따금 두 사람 사이에는 불편한 침묵이 흐르곤 했다.

권재진은 마음을 정리하느라.

서의우는 권재진을 기다리느라.

“그럼 다녀올게요.”

“예,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검은 전투복을 갖춰 입은 서의우가 짧은 배웅을 받으며 무균이동실로 들어갔다.

그는 이중문을 지나쳐 전신 멸균소독을 마친 후 동그란 원반 위에 올라섰다. 버튼을 누르고 불이 켜지면 호환됐다는 표시다.

좌표 이동 전에는 이렇게 반드시 신호를 보내고 출발해야만 했다. 다른 누군가와 이동이 겹치는 참사가 벌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좌표에서 나타나게 되면 결과가 어떨진 경험해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이윽고 밝은 빛이 퍼지고 원반 위에 서 있던 서의우가 사라졌다. 무사히 출근한 모양이다.

무균이동실 밖에 있던 권재진은 빛 방울이 흩어지는 광경을 보고 난 뒤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서의우가 일터로 떠났으니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재진은 적당히 러닝 머신이나 탈까 하다가, 거실에 머물러 하얀 벽돌로 만들어진 벽난로 불을 켰다. 가스 점화로 불꽃이 단숨에 화르륵 피어올랐다.

잠시 동안 소파에 앉아 긴장을 풀고 불꽃 구경이나 해야지 싶다.

‘……후.’

재진이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삼키며 마른세수했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모든 것이 예전 같지는 않았다.

한때 풍요로웠던 정원이 태풍에 모조리 휩쓸려 가고, 폐허가 된 땅을 지금부터 다시 개간해 씨를 뿌리고 꽃을 피워야 하는 심정이다.

언제쯤 꽃이 필지, 언제쯤 땅이 비옥해질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참 동안 숨죽이고 너울거리는 벽난로 불꽃을 응시하던 재진이 고개를 들었다. 청승 떠는 건 이제 그만하고 몸을 움직여 땀을 빼야지 싶었다.

결단을 내린 재진이 손바닥으로 연거푸 얼굴을 문지르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곧장 홈짐으로 꾸며 둔 2층으로 걸어가려는데, 창밖 너머에 언뜻 무언가 보였다.

검은 그림자다.

이곳은 나무와 풀이 우거진 사유지에 위치한 산꼭대기 별장인지라 야생 동물이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했다. 청설모는 자주 눈에 띄고, 간혹 너구리나 부엉이도 본 적 있다.

하지만 거뭇거뭇한 저 형체는 이제껏 보아 온 산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크고 불길해 보였다.

바위 옆에 자세를 낮추고 웅크리고 있기에 어떤 짐승인지 정확히 판별하기 어렵지만, 뒤로 삐죽 솟은 뾰족한 귀와 강렬한 눈빛이 영 예사롭지 않았다.

‘늑대인가……?’

의문을 느낀 재진이 거실 창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커튼을 쳐서 집 안을 가려 두면 저 정체 모를 짐승도 권재진에게 흥미를 잃고 떠날 터였다.

재진이 커튼을 쥔 순간, 그것이 몸을 일으켰다.

네발 짚은 자세가 예상대로 늑대와 흡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늑대가 아니었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고 흉측했다.

입 안에 송곳니가 상어처럼 수백 개쯤 다닥다닥 붙어 있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혓바닥이 촉수처럼 길었다.

크리처다.

늑대의 형상을 앗아 간 마물, β크리처.

‘……!’

권재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가리를 쩍 벌린 늑대 크리처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도약했다. 먼 거리를 단숨에 좁혀 뛰어오더니 거실 통유리창문에 이빨을 깊게 박아 넣었다.

우장창창!

방탄유리가 허망하게 으스러졌다. 재진은 깨진 유리 조각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커다란 유리 조각이 크리처의 입 안에 박혔다는 점이었다. 늑대가 고통스레 캑캑거렸다.

‘이, 이럴 수가.’

특수 거주지구에 크리처가 나타나다니.

‘인근 지역에 게이트가 터졌나? 아니면, 한 마리만 숨어 들어온 건가?’

일반 거주지구에서는 간혹 경계벽을 넘어온 놈들이 인간을 죽이고 먹어 치우는 사고가 벌어지긴 했다. 그러나 특수 거주지구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도망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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