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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58)화 (58/154)
  • #58

    욕조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재진의 검은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이 욕조를 가득 채운 물속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맑게 들리는 규칙적인 백색 소음을 듣고서 재진이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다. 혼미한 눈을 몇 차례쯤 찡그려 본 끝에 겨우 가늘게 눈꺼풀을 뜰 수 있었다.

    “으…….”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말 죽은 사람처럼 기절해 있었다.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몇 주간의 빚을 청산하기라도 하듯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고, 쓰러지기 직전 일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서, 으우……?”

    깨어난 재진이 되도 않는 늘어진 발음으로 서의우를 찾았다.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왜인지 그가 지척에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진의 바로 곁에서 그의 대꾸가 들려왔다.

    “네. 재진 씨.”

    서의우는 욕조 속에 들어와 권재진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깨어난 재진이 몸을 조금 바르작거리자 그가 바로 추슬러 품 안에 가두었다.

    재진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그를 살펴보니, 아주 오랫동안 재진을 끌어안고 욕조에 잠겨 있었던 모양인지 흰 살결이 완전히 물에 불어 있었다. 물론, 서의우만 그런 게 아니라 권재진도 마찬가지로 잔뜩 불어 손가락 주름이 죄다 쪼글쪼글했다.

    대체 얼마나 이러고 있던 걸까.

    물이 마르면 가이딩 효과가 생겨 버리니, 물속에서 껴안고 있자고 생각한 건가? 서의우의 판단을 도통 모르겠다.

    이 정신 나간 새끼…….

    “하아, 가이딩…… 해도 된다고 말했잖습니까…….”

    권재진이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힘들어서 아무 기력도 없었다.

    “아직 재진 씨 답을 못 들어서요.”

    “무슨 답…….”

    “우리 이제 괜찮은 거예요?”

    괜찮냐고?

    서의우와 함께여서 괜찮은 적이 있긴 했던가.

    “아니…….”

    재진이 한숨을 섞어 답했다. 서의우는 더욱 세게 팔뚝에 힘주어 권재진을 으스러지게 껴안고는 뒷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그럼 안 할래요, 가이딩.”

    “왜 자꾸 고집입니까. 그냥 좀 넘어갑시다…….”

    세상엔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도 있다. 서의우는 그걸 모른다.

    지금은 심적으로 서의우의 맹렬함을 받아들이기 버겁지만 언젠가 지내다 보면 누그러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의우는 꼭 지금, 당장, 권재진의 모든 것을 거머쥐고 독점해야 하는 지배자처럼 굴었다.

    “어떻게 넘어가요. 재진 씨가 아무 말도 안 해 주는데.”

    “뭘 또, 무슨 말.”

    “무슨 생각하는지. 뭘 더 숨기고 있는지.”

    그 말에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서의우는 정말…….

    “저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숨깁니다…….”

    “그래요?”

    “예…….”

    “전부터 재진 씨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골백번도 더 말하지 않았던가요.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좀 얘기해 주면 좋겠는데.”

    “서의우 씨 믿고, 털어놓으라고요?”

    “네.”

    “아니, 뭐 얘기할 게 있어야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재진이 고개를 비틀어 서의우의 어깨에 뒤통수를 기댔다. 답답할 정도로 옭아매는 방식의 포옹이 너무 익숙해졌는지 이젠 이런 불편한 자세마저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그럼 지금은 무슨 생각 하는데요.”

    “서의우 정말 개새끼라는 생각. 서의우 죽이고 싶다는 생각.”

    “그래요? 정말?”

    “아니…….”

    “뭐예요.”

    “그러게 아무 생각 안 한다니까…….”

    서의우가 이렇게 캐묻고 매달릴 정도로 권재진이 알기 어렵게 행동했던가.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서의우는 그냥 이런 식의 인간관계가 처음이라 낯선 거겠지 싶다. 여태 그는 다른 누군가의 감정을 알고 싶어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테므로. 궁금해한 적도 없었겠지.

    재진은 피곤한 입을 대충 움직여 떠오르는 아무 생각이나 늘어놓았다.

    “지쳤습니다.”

    “그래 보여요. 수척해졌어, 재진 씨.”

    “졸립니다.”

    “좀 더 자도 되는데.”

    “배가…… 안쪽이 뻐근해. 아직도 벌려진 것 같습니다.”

    “…….”

    “서의우…….”

    “네…….”

    “서의우 너는…… 넌 잘생겼어.”

    “네?”

    “서의우 씨는 못생겼으면 큰일 났습니다. 그랬으면 제가 정말로 그쪽 죽였을 겁니다…….”

    “하하, 칭찬인 건가. 다행이네요.”

    “아니, 진지하게 얼굴 덕입니다. 몸하고 얼굴……. 잘 관리하십시오.”

    “음? 네, 그럴게요. 음…… 응?”

    각성자들은 생존에 직결되는 전투 생활을 하는 데다가, 일반인처럼 연애 활동이나 구혼 활동을 하지도 않는다. 일반 사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외모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특수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지자면, 서의우는 산삼보다 귀하다는 스스로 잘생긴 줄 모르는 무자각 미남이었다.

    그 점은 조금 귀엽다.

    “그리고 서의우 씨는…… 요리 잘합니다. 확실히 재능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마음에 들었어요? 먹지도 않더니만.”

    “그건 뭐……. 아무튼, 앞으로 꾸준히 갈고닦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게요. 근데, 재진 씨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정말 몰랐네…….”

    “다시 말하지만, 저는 평소에도 딱히 별생각 안 합니다. 서의우 씨가 안달 낼 만큼 숨기고 말고 할 그런 것도 없습니다.”

    “아뇨, 회귀한 건 숨겼잖아요. 배에 더 들어가는 것도 말하지 않았고.”

    “그거는, 하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서의우가 곧바로 눈을 내리깔고 권재진의 목덜미를 질근질근 깨물며 채근했다.

    “이거 봐. 재진 씨 또 말 안 하죠. 무슨 생각 했어요, 방금? 말해요.”

    “아니…… 하…… 저 두 가지가 서의우 씨에게 있어 동일선상에 놓인다는 점이 어처구니없어서 말입니다. 아무튼, 감출 거 없습니다. 서의우 씨한테는…… 더는 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재진은 서의우가 목을 마음껏 깨물어 붉은 자국을 내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는 눈동자만 힐긋 돌려 그의 얼굴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하얗고 수려한 얼굴에 물방울이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투명한 흑발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젖어 붙어 있는 모양새가 눈길을 끌었다. 언젠가 잘렸다가 새로 자라난 서의우의 귓바퀴는 다친 흔적조차 없이 매끄럽게 자리해 있었다.

    짙고 곧은 눈썹과 깊게 팬 눈두덩이, 그리고 촘촘하고 가느다란 속눈썹……. 물기가 맺힌 속눈썹 안쪽에 몇 년을 보아 온 회색 눈동자가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때는 서느렇고 어느 때는 나른한 저 뜻 모를 눈을 하도 오랫동안 보아 와서 그런지, 간혹가다 재진은 서의우의 눈동자가 자신의 소유물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

    가만히 손을 뻗은 권재진이 내키는 대로 서의우를 만졌다. 팔뚝의 성난 근육을 건드려 보다가 움푹한 쇄골 안쪽을 손끝으로 슬 훑어 보았다. 우묵한 곳에 물이 고여 있어 촉촉했다.

    뒤이어 목선을 따라서도 단단한 피부를 더듬어 보았고, 그가 흥분할 때면 항상 핏대가 서는 부근을 꾹 눌러 보기도 했다.

    “재진 씨, 뭐 해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다.

    “서의우 씨. 그쪽은 말입니다…….”

    “네, 재진 씨.”

    아…… 그래.

    어쩌면 이 얘기를 해야 하려나 싶다.

    돌이켜 보니, 한 번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던 적이 없었다.

    “그쪽은, 저를 완전히 뭉그러뜨려 붕괴시켜 놓았습니다.”

    재진이 담담하고 건조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서의우의 회색 눈동자가 일순 굳었다. 그가 무어라 끼어들기 전에 재진이 뒷말을 이었다.

    “이미 알겠지만, 한때 저는 서의우 씨에게 납치당했고, 강간당했고, 감금당했습니다. 수갑에 묶이고 재갈 물고, 강제로 가이딩 당했던 시절 있습니다.”

    반들반들한 회색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해 두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있는 그대로 속내를 끄집어내 토로했다.

    “그렇대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돌연변이로 발현한 제 불운, 서의우 씨가 지닌 근원적인 에스퍼로서의 본능. 뿌리 깊은 불균형과 가이딩의 필요성 등……. 납득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고, 갈등은 시간이 차차 해결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권재진이란 사람이 완전히 무너진 셈인데, 하물며 서의우 씨는 여기에서 멈추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서의우가 권재진의 기억을 읽었더라면 알 수 있는 내용일 터다.

    그렇지만, 과거를 보았다고 해서 권재진이 느낀 감정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감정은 말해 주기 전에는 모른다.

    “4년 후, 서의우 씨가 제 애인이 된다는 건,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봐도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그것도 남자끼리……. 솔직히는 지금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라 생각합니다. 어딘가 분명히 연결이 이상한 지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연인 관계가 되었다는 건 제가 서의우 씨를 받아들인 것만도 모자라서 서의우 씨에게 호감을 느꼈다는 뜻이 되어 버리니 말입니다.”

    권재진은 이미 서의우에게 차고 넘치도록 많은 것을 내어 주었다.

    그렇지만 이 서의우는 아직 그 사실을 몸소 체감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정말 몇 번이나. 서의우 씨에게 넘어갔는지 모릅니다. 서의우 씨는 저를 깨부수고 박살 내고 원하는 대로 다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저는 이제 서의우 씨에게 뭘 더 지키고 숨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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