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권재진이 서의우의 얼굴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대로 살그머니 손끝을 쓸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의 접촉이다.

까마득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

당혹스러울 정도로 놀란 서의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권재진이 자의로 가이딩 해 주는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일순 그의 이능이 흐트러졌다.

재진의 얼굴을 내리누르던 무형의 힘도 풀어졌고 무겁게 압박하던 공기도 흐려졌다. 그 틈을 타 권재진은 몸을 일으켰다.

“기억 좀……. 서의우 씨, 제 기억 좀. 극히 일부만이라도 좋습니다. 조금만이라도 상관없으니 그냥 되살려 주십시오.”

언짢게 인상을 쓰고 숨을 몰아쉬며, 권재진이 서의우에게로 다가갔다. 손으로 뺨을 애타게 그러쥐고 매만지며 그의 품에 자의로 안겼다. 하지만 이걸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재진이 턱을 부르르 떨며 서의우에게 고개를 밀어붙였다.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겹치도록.

약간 빗나갔는지 권재진은 서의우의 입가에 키스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디에 입을 맞추든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가이딩 하고 싶지 않습니까? 원하잖습니까. 해 드리겠습니다.”

재진은 무턱대고 그의 얼굴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 입술을 비벼 대며 가쁘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냥 해 드릴 테니, 기억 복원 한 번만 해 봅시다, 예? 아니면 그냥 시도만이라도 좋습니다. 제 머리, 다시 한번만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혹시 지난번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복구할,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재진이 연신 서의우에게 키스했다. 서의우는 벼락이 내리꽂힌 고목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험악하게 눈을 일그러트렸다.

권재진이 닿으면 그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거부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끔찍하다 못해 잔악했다.

“큭, 으…… 지금 나더러 도박하란 거예요? 권재진 목숨 걸고서?”

서의우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해 냈다.

권재진은 멀어지는 서의우의 멱살을 붙들고 당겨 계속 달라붙었다. 점막끼리 제대로 맞물리도록 각도를 틀고 혀를 섞었다.

“의우야. 의우야. 서의우…….”

원체 오랜만이라 벅차오르는 감정마저 느껴졌다. 까딱 잘못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권재진이 억지로 서의우를 침대에 내리누르고 그의 몸통 위에 올라앉았다. 서의우가 흉포한 눈으로 이를 갈며 권재진을 올려다보았고, 권재진은 다급하게 제 몸을 덮은 이불을 밀쳐 냈다.

“가이딩 해 준다고. 하자고, 가이딩! 그냥, 그만 좀……! 서의우 씨도 물러서란 말입니다. 서로 한 발씩.”

재진이 팔을 교차해 입고 있는 티셔츠를 절박하게 벗어 재꼈다. 옷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다시 그에게 달라붙었다. 서의우가 걸친 목폴라를 벗기려 필사적이었다.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 권재진의 팔을 서의우가 억세게 잡아 붙들었다. 서의우는 힘을 조절하지도 못하고 난폭하게 권재진을 거부했다.

“닥쳐요. 되도 않는 소리 마! 그딴 제안에 응할 거였으면, 지금껏 참지도 않았어.”

서의우가 붙잡은 재진의 팔뚝을 머리맡에 찍어 눌렀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성마르게 이불을 잡아끌었다.

빨리, 지금 당장 맨살 드러난 권재진의 몸을 덮어 가려야 했다.

권재진은 서의우가 그러지 못하도록 한껏 저항했다.

“하, 사람 두고 멋대로 자위해 댈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내뺍니까! 미쳐 날뛰는 눈깔 하고선 혼자 이성적인 척하지 마십시오.”

그 번들거리는 회색 눈알로 권재진을 어떻게 쳐다보는지 다 아는데.

당장이라도 만지고, 핥고, 쑤시지 못하면 살인 낼 것처럼 굴면서.

기껏 가이딩 해 주겠다는데도 왜 쓸데없이 버티는 거냐고!

권재진이 버둥거리며 무릎으로 서의우의 허벅지 안쪽을 눌렀다. 이건 옷 위로 닿는 접촉인데도 서의우는 눈에 띄게 표정을 구기며 반응했다. 게다가 그는 이미 건드리기 전부터 발기해 있기도 했다.

“으큭!”

서의우가 거칠게 헐떡거리며 허리를 구부렸다. 본능적으로 권재진에게 닿으려 손을 뻗으려다가 주먹을 쥐고 가까스로 욕구를 억눌렀다.

하지만 서의우의 이능은 제어하지 못했다. 그가 분출한 힘이 이불자락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고, 더는 방패막이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천 조각 틈새로 권재진이 길게 팔을 뻗었다.

서의우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고, 말릴 틈 없이 피폐한 얼굴을 덮쳤다.

격정적으로 입술이 맞붙었고, 다시 떨어졌고, 또 맞붙었다.

“그냥 좀, 포기하라고! 대체 언제까지 이럴 작정입니까. 지긋지긋합니다! 가이딩 해. 하고 싶어. 하자니까!”

“재진 씨야말로 포기해요! 기억, 그까짓 거! 없어도 되잖아. 사는 데 지장 없어, 목숨에도 지장 없어, 그냥 잊고 살면 될 걸, 왜 그렇게 유난 떠는 건데!”

싸우듯이 키스하며 두 사람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유난? 지금 유난이라 했습니까……? 그쪽이 각성자라 까맣게 모르는 것뿐이지, 일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겐 가족만큼 중요한 존재가 없습니다. 상식이 그래요!”

“그래 난 모른다고요, 그런 상식! 가족이 뭔데, 그따위 거 모르겠고, 권재진만 있으면 돼. 이것 봐, 간단하잖아…… 재진 씨도 그냥 나처럼 쉽게 생각해 볼 순 없어요?”

“가족은 그렇게, 내키는 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 쓰레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무엇과 맞바꿀 수 없는, 하나뿐인…… 그런 유일무이한 존재로 정의되는 거라고, 이 개새끼야……!”

재진이 서의우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몇 번이고 그의 옷을 벗기려 시도하다가 떠밀렸고, 서의우는 점점 더 행동이 과격해졌다.

난폭하게 권재진을 밀쳐서 재진이 침대 헤드에 심하게 부딪혔다. 골통이 먹먹하게 울렸다. 어지러움을 느낀 권재진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크흑!”

“그래서, 권재진 씨 평생 가족이랑 붙어살 거예요? 아니잖아, 나랑 붙어살 거잖아.”

그사이에 서의우가 권재진을 제압했다. 어깨를 벽면에 짓누르고 다시 팔을 뻗지 못하게끔 팔목 관절을 비틀었다.

다칠 정도까지 아니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지금의 서의우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 사람들 못 만날 거고, 기억해 내 봤자 쓸 데도 없고……. 그럼 그냥 이 완고하고 까다로운 머리통에 나 하나만 기억하고 살아도 되잖아요! 나만!”

“하, 그래……! 결국 그게 본심이었던 겁니까? 서의우만 기억하고, 서의우 하나만 아는 권재진?”

팔이 비틀린 재진이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의우가 이렇게까지 거절할 거라곤 솔직히 전혀 예상치 못해 충격이었다. 권재진이 먼저 가이딩 하자고 손을 내밀면 서의우는 당연히 좋다고 응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극렬하게…….

이럴 줄은…….

“서의우 씨 혹시 겁먹었습니까? 만에 하나, 복원에 성공해서, 내가 기억 찾으면, 가족에게 돌아가려 할까 봐 질겁해서 지금 이러는 거냐고요.”

권재진의 까만 눈동자가 초점 없이 떨렸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물론, 눈깔이 맛 간 건 서의우도 마찬가지였다.

서의우는 이렇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갈등까지 다다른 경험이 처음인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죽는다고. 당신 죽인다고 내가! 그리고, 설령 그 말처럼 복원 성공한다면, 그래서 기억 되찾으면, 나 버리고 갈 거예요? 돌아갈 거야? 그러고 싶어? 그런 거면, 정말 난 못 해. 미쳤다고 내가 그걸 해 주겠어요? 갈 거냐고! 어? 그 입으로 직접 대답해 봐요!”

“안 돌아가! 씨발, 안 돌아간다고……! 어차피 전 돌연변이고, 돌아가 봤자 사살당할 텐데 뭐 하자고 거길 갑니까. 안 가! 서의우 너 새끼랑 살 거라고 말했을 텐데, 그새 잊었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 말이 그거잖아요! 복원하려다 잘못되면 죽을 텐데, 뭐 하자고 과거 기억 같은 걸 돌리려 하냐고요. 그냥 나 새끼랑 살자고!”

“몰라! 이 미친 새끼야, 빨리 그냥 가이딩이나 하십시오. 어서…… 가이딩, 가이딩 하자고! 머리 녹아 버리기 전에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으니까. 가이딩, 하고 싶어.”

“이, 씨발…… 죽는다는 말 하지 말아요…….”

몰아치던 대화가 그 순간 끊겼다.

서의우가 숨을 세차게 몰아쉬며 제 손에 제압당한 권재진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회색 눈동자가 반라 상태의 권재진에게 못 박혀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귀신 쓰인 사람처럼 전보다 조금 마른 듯한 재진의 몸을 강박적으로 훑어보았다.

시선을 느낀 재진이 되는대로 마구 난삽하게 지껄여 댔다.

“서의우, 나, 혓바닥 빨아 주십시오. 그리고, 안에, 배에 자지 박아 줘.”

“…….”

“지금이면 구멍 찢어도 됩니다. 상관없어! 빨리, 빨리…… 의우야. 끄윽.”

두 사람 주변으로 주위가 크게 요동쳤다.

고요한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이 이는 것처럼, 권재진과 서의우 주변으로 거친 파동이 퍼졌다.

서의우가 형형한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그러고는 길고 얇은 미려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권재진의 의사를 재차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