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49)화 (49/154)

#49

“재진 씨. 그건 어려워요.”

“어려워? 못 해?”

“기억을 삭제하는 것과 달리 복원하는 건…… 그건 정말 위험해요.”

“그래서 못 합니까? 서의우 씨 대답하십시오. 못 하는 겁니까?”

“들어 봐요. 가뜩이나 머리 건드리는 건 위험한데, 복원은 그보다 수십 배는 더 까다롭고 치밀한 이능 조작이 필요해요.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재진 씨 뇌가 다 지글지글 타 버릴 거라고요. 그러면…….”

“할 수 있냐고! 없냐고! 잡소리 집어치우고 그거나 대답하라고!”

“……그러면, 재진 씨 죽어요.”

서의우가 얼음 조각상처럼 냉랭하게 굳어 버린 낯으로 읊조렸다.

그의 미려한 이목구비가, 사람의 혼을 홀리듯 아름답고 조형적인 새하얀 낯짝이 차마 꿈에서조차 생각하기 싫은 참혹한 광경을 보듯 어두워져 있었다.

“가뜩이나 빈자리가 커요. 뽑혀 나간 기억이 무수하다고요. 그것들을 다 복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시도조차 치명적으로 위험해요. 뇌가 타올라서 고통스럽게 절명할 거고, 설령 살더라도 머릿속이 온통 망가져서 제정신 아닐 거예요.”

“뭐……?”

“난 못 해요. 하기 싫어요. 내 손으로 권재진 씨 숨통 끊을 순 없어요.”

“…….”

“재진 씨는요? 정말 죽고 싶어요? 죽더라도 괜찮겠어? 목숨 걸고서라도…… 그 잊어버린 기억이 그렇게 필요하냐고요.”

죽는다고.

정말로?

고작 기억 하나 되돌리는 게…… 그게 그렇게 위험한 일이라고?

돌이켜 보면 서의우는 정신계 이능을 사용할 때마다 항상 주의하긴 했었다. 위험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표층만 훑겠다는 둥 그답지 않게 소극적으로 굴긴 했었다. 그 전지전능한 서의우가…… S급 에스퍼가…….

그래서, 정말로 못 한다고……?

“……죽을지 말지는 일단 해 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권재진이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시체 같은 얼굴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거지, 불가능한 건 아니잖습니까. 좀 많이 위험하다 뿐이지, 못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재진 씨 진짜 왜 그래요! 그 기억 없어도 여태껏 우리, 잘 지냈잖아요. 뭐가 부족해서, 나랑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왜요!”

“기억 없이 잘 지낸 게, 씨발, 그게 뭐가 잘 지낸 겁니까! 정신머리 온전한 채로 잘 지내야 잘 지내는 거지. 안 그렇습니까? 강제로, 날, 머리통 구멍 내고, 날…… 속이고 지배해서, 나를 입맛대로 바꿔 놓고, 씨발! 씨발! 납치하고, 가두고, 묶고! 그런 게 대체 뭐가 잘 지내는 겁니까!”

“그렇다고 죽어 나가도록 사지로 내몰 수는 없잖아요! 돌연변이라고 사살당하는 것보다 가둬 두는 게 낫죠, 투신하고 혀 깨무는 꼴을 보느니 묶어 두는 게 낫잖아! 그래서 대체 무슨 말 하고 싶은 건데요……. 정말 나더러 권재진 씨 죽이라고요? 내 손으로? 내가, 나…… 내가 직접 권재진 씨 머리통 뒤엎고 목숨줄 끊어 버리라고요? 미쳤어요?”

“뭐 어때. 죽고 싶다는 생각…… 했던 적 있습니다. 1회차 서의우 씨와 지냈을 때 숨 쉬듯 몇 번이고 그런 생각 했었습니다. 실제로 자살 시도했었고.”

“하…….”

“자살해서 죽든, 기억 복구하려다 죽든, 상관없습니다 전.”

“…….”

“상관없다고. 이해 못 합니까? 생각해 보니 앞서 게이트에 찢겨 죽은 경험도 있군요. 와, 감금만 경력직인 줄 알았는데 사망도 경력직인가…… 완벽하군.”

그 말에 서의우도 무너져 내렸다.

권재진만 불구덩이에 추락한 줄 알았더니, 서의우도 함께 떨어져 내린다.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끔찍스러운 재앙에 나란히 몸부림치며 서의우가 섬찟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터무니없이 위협적인 기세가 풍겼다.

“아니요. 안 해요.”

“왜.”

“난 재진 씨 없으면 안 돼. 내가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했든, 그 목적은 결국 하나였어요. 권재진 씨 숨 붙인 채, 내 옆에 살려 놓기 위해서.”

에스퍼에게 있어 가이드는 절대적인 존재다.

강력한 에스퍼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서의우에게는 권재진이 필요하다.

“나더러 권재진 죽이라는 건, 자명한 파멸을 택하란 뜻이에요.”

권재진에게도 서의우가 필요하다.

1회차의 권재진에겐 딱히 서의우가 필요하지 않았다지만 2회차의 권재진에겐 서의우가 필요하다. 가족을 되찾기 위해.

“그러니까, 그렇게 절박하게 권재진 죽이기 싫으면, 서의우 씨가 제대로 해내면 되는 거잖습니까…….”

처음부터 잔혹한 선택지를 들이밀었던 건 서의우였다.

얼핏 보기에 두 갈래 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 갈래 길이었던 선택지들.

“실패하지 말고, 대가리 태우지 말고, 난관을 헤쳐 무사히 이능 쓰면 되잖습니까. 성공하면 된다고. 성공하면.”

일반인인지 가이드인지.

사살당할 건지 가이딩 할 건지.

기억 지울 건지 수갑 묶일 건지.

서의우는 늘, 권재진에게 잔인한 선택을 종용했는데, 권재진이라고 서의우에게 그러지 못할 이유 없다.

“누군 좋아서, 지금껏 다 좋아서…… 죄다 감내하고 수용한 줄 아십니까? 그런 불가피한 딜레마, 저는 숱하게 겪었습니다. 그러니 이젠 서의우 씨 차례입니다.”

“…….”

“서의우 씨가 지웠잖습니까, 내 기억. 서의우 씨밖에 못 되살리는 거잖습니까. 그럼 책임지고 돌려놓으란 말입니다!”

권재진이 까만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골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권재진은 서의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재진의 머리에 파헤쳐진 구덩이를 그의 손으로 직접 메꿔 놓기 전에는.

그 말은 반대로, 서의우가 그러기만 한다면…….

서의우가 권재진의 기억을 되돌려놓기만 한다면…… 그러면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권재진은 아직 서의우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솔직하게 터놓자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가 좋았다. 서로 살 붙이고 좋아하면서, 서의우에게 요리도 가르치고, 망망대해 위를 날아다니기도 하고, 계절마다 집 바꾸고, 무릎베개해 주고, 앞치마 매 주고, 커플룩 입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가이딩 하고, 그냥…….

권재진도 서의우랑 그러고 싶은데…….

“자. 알겠다고 대답하십시오, 서의우 씨.”

권재진이 협박하듯 서의우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서의우는 거듭 고개를 저었다. 무참히 망가진 감정을 짓씹으며.

“미안해요. 나 못 하겠어요.”

“말해. 내 기억 돌려주겠다고 말하란 말입니다. 해 보겠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라고.”

“……재진 씨. 제발요.”

“말하라니까? 해 보라고! 노력은, 할 수 있잖아! 적어도 그런 시늉이라도 하란 말입니다!”

서의우가 권재진을 껴안고 침대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품에 안겨서 계속 분에 차 소리쳤다. 그래도 화를 내리누를 수 없어 욕설을 마구 내뱉었다.

“으윽, 씨발! 씨발! 썅! 이, 씨발 새끼! 아아악!”

권재진이 미친 듯 발광했다.

서의우를 죽일 기세로 발길질하고, 팔을 휘두르고, 그의 뺨을 쳤다. 손바닥으로 때리고, 주먹으로 때리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씨근덕대며 서의우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서의우는 권재진이 때리든 뭘 하든 아무렇지도 않은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가만히 있었다. 권재진에게 맞는 것보다도, 권재진이 이토록 저항하고 싫어한다는 사실이 괴로운 듯했다.

“으, 그만해요. 이러다 재진 씨 손 다치겠어요.”

“놔! 씨발, 놓으라고!”

“그렇게 막 갈기면 안 돼요. 주먹 제대로 쥐고 끊어 때려야죠. 손목 나가요.”

“서의우, 너 이 새끼, 이…… 개새끼.”

“때려요. 그래서 재진 씨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요.”

서의우가 무방비하게 몸을 내주었다. 눈을 내리깔고 권재진에게 무슨 폭행을 당해도 좋다는 듯 전신에 힘을 풀었다. 깎아 놓은 다이아몬드 같은 근육질 신체가 순순히 늘어지는 동작이 마치 권재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권재진은 이를 악물고서 서의우의 얼굴에 주먹질했다. 손가락 하나 허투루 두지 않고 단단히 힘주어 움키고서는 서의우의 말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끊어 쳤다.

묵직하게 체중 실린 주먹이 완벽하게 서의우의 낯짝에 여러 차례 내리꽂혔다. 앳되고 말간, 보기 좋은 얼굴에…… 하얗고, 청순하고, 아름다운, 권재진이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던 그 좋던 얼굴이 무참히 얻어맞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서의우가 입 안에서 피를 뱉어 냈다. 그의 뺨이 벌겋게 부었고, 눈가도 부풀었다.

권재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친 서의우를 막막하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무척 심하게 헐떡이고 있는데도 호흡이 모자랐다. 답답해서, 가슴속이 저릿해서, 숨을 못 쉬겠어서 이대로 눈을 뜬 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서의우.”

“……네.”

“서의우……. 너.”

“네, 재진 씨.”

“윽…….”

권재진이 서의우를 밀어 냈다. 서의우는 권재진이 원하는 대로 일말의 저항 없이 침대 끝까지 뒤로 물러서 주었다.

“어떻게든, 싫다고? 못 하겠다고……?”

“…….”

“그럼, 저도. 이젠 못 합니다.”

권재진이 홀로 선언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평소답지 않게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가이딩, 못 하겠습니다. 오늘부로 서의우 씨 가이드 안 할 겁니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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