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아, 어리석게도.’
후회스럽다.
그렇게 푹 빠져서…….
기억을 내주거나, 눈알을 내주거나, 권재진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지 말 걸 그랬다…….
아무것도, 허락해 주지 말 것을, 그냥 그럴 것을 그랬다…….
서의우가 밉고 원망스러워 가슴이 미어진다. 본의 아니게 그를 마음 깊숙이 들여놓았던 만큼 괴롭다. 아니, 그보다 수천 배는 더 괴롭다. 권재진이 게이트에 휘말려 죽었을 때, 사지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기갈기 찢겨 나갔던 당시의 끔찍한 경험보다도 지금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지금 권재진이 눈물을 흘리면 피눈물이 흐를 테고, 오열하면 각혈하겠지.
전신의 뼈가 조각조각 부서지고, 살점이 지네 떼와 구더기에 파먹히고, 껍질 벗겨진 육신을 불로 지진다 해도 차라리 지금보다는 나을 터였다.
“재진 씨, 배고플 때 되지 않았나요. 내가 뭐 만들어 줄까요?”
침실에 틀어박힌 권재진의 옆에서 서의우의 속삭임이 들렸다.
권재진은 하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누워 있기만 했다. 서의우가 기다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손을 뻗어 이불 끄트머리를 살짝 걷었다.
“식사해야죠. 재진 씨 밥 먹는 거 좋아하잖아요.”
서의우는 상처를 입고 동굴에 몸을 숨긴 야생 동물 대하듯 권재진을 다뤘다. 놀라지 않게 조심해서 이불을 살짝 더 걷어 내리자, 부릅뜬 권재진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형형한 눈알이 붉게 충혈되어 핏발이 서 있었다. 분이 차오르는 권재진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됐습니다. 안 먹습니다.”
재진이 바로 거절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서의우와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 진절머리 나 보였다.
“그럼 물이라도 마실래요? 물 좀 가져다줄까요.”
서의우가 이능으로 유리잔을 가져왔다. 맑고 시원해 보이는 물이 찰랑거렸다.
“재진 씨 목말라 보여요. 목소리 다 갈라졌어.”
“…….”
“물도 싫어요? 필요 없어?”
권재진이 대답하지 않자, 서의우는 물잔을 침대 옆 협탁에 두었다. 스탠드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켜고 좀 더 밝고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해 줬다.
“음…… 이대로 잘 거예요? 아직 오후 다섯 신데.”
“…….”
“저기, 나랑 바다 보러 갈래요?”
“…….”
“지금 데려다줄게요. 우리 또 손잡고 가요. 바다, 파랗잖아요.”
“…….”
“아니면 여기 산에 협곡도 있어요. 사유지라 아무도 못 와요. 나랑 가 볼래요?”
“…….”
“재진 씨.”
“…….”
“……재진 씨.”
“…….”
“슬슬 그만하고 나 좀 쳐다봐요. 응?”
서의우가 이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의 눈빛은 한참 전부터 아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득한 열망과 뿌리 깊은 갈망이 기이하게 뒤틀려 음험하고 위태롭게 빛났다.
싸늘하게 일그러지려는 눈가를 애써 다잡고 서의우가 눈을 휘었다. 사르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몸을 웅크린 권재진의 목덜미를 건드렸다.
“재진 씨가 원한 거잖아요.”
서의우의 손끝이 다정하고 섬찟하게 뒷덜미를 훑었다.
“나더러 믿어 달라면서요. 그래서 말한 거예요.”
“……하지 마.”
“숨기려 하면 나도 숨길 수 있었어. 권재진 씨 머리에 무슨 구멍 얼마나 뚫려 있든, 모른 척 넘어가도 됐었다고요. 그런데 안 그랬잖아요.”
“……서의우 씨. 그 손 치우십시오.”
“난 아무것도 속이지 않고 사실대로 다 말했어요. 권재진 씨 믿어 보려고, 내가 다 털어놨다고요. 재진 씨가 나한테 솔직한 것 같아서 나도 솔직해져 보려고. 그러면 우리 더 좋을 것 같아서…….”
“…….”
“지금도 그래요. 나 지금 재진 씨한테 아무 짓도 안 하잖아요. 그런데 날 왜 이렇게 피해요. 이젠 내가 싫어요?”
서의우는 담담히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목선을 따라 손끝으로 느릿하게 피부를 더듬으며 빠르게 맥박치는 경동맥을 만졌다. 권재진의 맥박을 느꼈다.
“재진 씨 나한테 왜 그래요.”
“그만하라니까…….”
“왜 자꾸 나한테 이러냐고요.”
“하…… 저 좀, 그냥 좀. 내버려 두십시오. 아니면, 정말 제가 제 입으로 말해야 알아듣겠습니까?”
권재진이 이불을 홱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에 달라붙어 지분대는 거슬리는 손을 진저리치며 날카롭게 쳐 냈다.
“나가 주십시오. 그리고 당분간 제 눈에 띄지 말아 주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단호히 밀어 내는 모습에 서의우의 표정이 설핏 흐려졌다.
“나가라고요?”
“예.”
“당분간은 뭔데요. 얼마나 당분간?”
“모릅니다. 나가세요.”
“재진 씨.”
“아, 꺼져, 꺼지라고!”
위태롭게 다잡고 있던 부드러운 서의우의 미소가 흩어지며 입매가 구겨졌다. 굵은 눈썹을 험하게 찌푸리고 야성적인 눈빛에 칼바람이 몰아쳤다.
이를 무참히 짓씹으며, 서의우가 으르렁댔다.
“내가, 나…… 재진 씨에게 내가 미안하다고 빌어야 할까요?”
짙은 회색 눈동자가 흉흉하고 난폭하게 날뛰었다.
“한때, 권재진 씨 기억 지우려 시도했던 건 사실이니까. 내가 그런 충동을 느꼈던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서의우…….”
“그땐 그런 방식으로 재진 씨를 원했고, 잘못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각성자는 누구나 다 기억 지우고들 살고, 그래야 싸울 수 있고, 그래야 자기 자신과, 동료와, 인류를 지킬 수 있으니.”
그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사납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괜찮은 척 억누르지 않고, 견딜 수 없다는 듯.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난 재진 씨도 나처럼, 과거를 잊고 나와 함께해 주길 원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그래도, 결국 난 지우지 않았어.”
“…….”
“권재진 씨 기억에 조금도 손대지 않았다고요!”
“…….”
“지금은 알아요. 만약 내가 재진 씨처럼 회귀할 수 있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머리에 구멍 뚫지도 않을 거고, 재진 씨 거라면, 뭐든, 다 알고 싶어 하겠죠. 지금은, 나 지금은 정말 그래요. 내가 재진 씨 머리 헤집은 거 아니잖아요. 그 기억, 내가 뜯어낸 것도 아닌데, 재진 씨가 나한테 이러면 나…… 조금은 억울할 수 있잖아요.”
서의우가 팔을 뻗어 왔다. 권재진이 쳐 내려 하면 쳐 낼 수 있을 정도로 서서히 힘주지 않고 다가왔다.
그는 항상 그랬듯 권재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목덜미에 수려한 얼굴을 파묻었다. 높은 콧날이 비벼 눌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우리 정말 좋았는데. 재진 씨랑 나, 정말로…… 좋았는데.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기억 지우려 시도했던 거, 그때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
“재진 씨 입장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어요. 내 생각만 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응?”
움푹 팬 쇄골에 서의우가 깊게 입술을 맞추었다. 따스하고 익숙한 체온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서의우는 권재진의 턱에도 입 맞췄고, 뺨과 입술에도 키스했다.
절절하고 애달프게 달라붙는 그를 권재진은 기막히고 허탈한 심경으로 받아 냈다.
서의우가…….
이 서의우가 너무…….
하…… 가소로워서…….
“그럼.”
목구멍 밖으로 불덩이를 토해 내듯, 권재진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메마르고 갈라진 음성이 철벽같았다.
“제 기억 되돌려 놓으십시오.”
미안하다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면서, 없어진 권재진의 기억을 돌려주겠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 정말이지 서의우다웠다. 이 개새끼가…… 끝까지.
“내 가족, 누군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고 이름은 뭔지, 내 유년기! 전부…… 그 잘난 이능으로 원상태로 돌려놓으시란 말입니다.”
권재진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우리 좋았죠, 서의우 씨와 나. 재미 좋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달라붙고 여기저기 쑤시고 빨아 재끼고 좋다고 녹아서 흐물흐물, 아주 등신같이…… 앞으로도 저랑 그렇게 지내고 싶으면 기억 돌려놓으세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2회차 서의우, 그의 말대로, 이 서의우가 권재진의 기억을 지운 건 아니었다. 직접적인 원흉은 다시는 만나 볼 수 없는 1회차 서의우다. 하지만, 그렇다고 2회차 서의우가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새끼도 근원은 똑같으니까.
권재진의 기억을 지우려는 발상은 하면서, 돌려놓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는 게. 그 점이. 1회차 서의우든 2회차 서의우든 다 똑같이 증오스러워서 살기가 일었다.
권재진이 과거를 기억하면 다루기 어려워져서 그런가?
더는 간단히 가둬 두고 억압할 수 없게 되니까?
제6 거주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할까 봐?
“서의우 씨는 뭐든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능으로 뇌파에 간섭해서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 거면, 다시 제 뇌파에 간섭해서 기억나게 만들면 되겠군요. 자, 어서. 하라고! 어서!”
권재진이 억지로 서의우의 팔목을 붙들어 잡아끌었다. 이마 앞에 그의 손이 닿게끔 두고 머리로 쿵쿵 찧었다.
서의우가 난감하게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재진 씨. 그건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