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답지 않게 신중해진 서의우를 보고서 권재진이 허탈하게 웃었다.
서의우에게 눈알 내줄 때부터, 아니, 기억을 내줄 때부터, 어쩌면 그보다도 더 한참 전부터. 권재진은 서의우에게 함락당해 있었다.
이제는 그와 함께한 과거도 버릴 수 없고, 그와 함께할 미래도 버릴 수 없다.
서의우는 권재진의 일상이고, 삶이다.
<나랑 재진 씨가 뭐가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든, 결국은 지금처럼 됐을 거예요.>
<난 권재진 씨 어디에 뭘 해 대든 다 좋아 죽겠는데. 재진 씨는 아닌가요?>
이런 사이에 정말, 뭘…….
이제 와서 왜 망설이고 그러는지…… 사람 섭섭하게.
“내가…… 있죠, 사실은 나, 아직 누굴 제대로 믿어 본 적이 없어요.”
서의우가 뜻 모를 정적인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읊조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새로웠다. 이번에도 권재진이 알지 못하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왜인지 서의우의 진모에 다가서는 기분이다.
“재진 씨도 알다시피 난 교육 훈련생 시절부터 완벽한 거짓말을 거듭해야만 살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재진 씨를 믿고는 싶은데. 이게 그리 쉽지만은 않아요.”
“예…… 무슨 소리인지 알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무렇지 않은 척, 멀쩡한 척 꾸며 냈다고요.”
“그렇죠.”
“그래서 서의우 씨는 지금도 그걸 고민 중인 겁니까? 저를 상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멀쩡한 척 그렇게 속여 보려고?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합니까. 됐고, 그냥 말하십시오.”
“…….”
“저는 서의우 씨를 믿고, 서의우 씨도 그만큼 절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말하라고요. 무슨 얘기를 듣더라도 솔직히, 이제는 아무래도 다 상관없으니까.”
“……재진 씨는 내가 정말, 그러길 원해요?”
권재진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의우는 거듭 확인했다.
“아냐, 그런 고갯짓 말고. 신중하게 대답해요.”
“뭐……. 예?”
“내가 재진 씨 믿으면, 믿고 사실대로 말하면, 그래도 괜찮겠어요? 정말 다 괜찮은 거죠?”
“그러게, 아까부터 계속 그렇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완벽히 확신해요?”
“글쎄, 그렇대도 왜 자꾸…….”
권재진과 눈을 맞춘 서의우가 서서히 다가왔다. 숨죽이고 다가온 그의 그림자가 권재진을 옭아매듯 품에 안았다. 굵고 딱딱한 대리석 같은 팔뚝이 재진을 세게 움켰다.
빠져나갈 수 없게끔.
“재진 씨.”
“예.”
“재진 씨 머리에 구멍이 있어요.”
“예?”
서의우가 재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붙였다.
그러고는 거친 들숨을 들이켜며 단조롭게 속살거렸다.
“새까맣고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어요. 상당히 크고, 말끔하게, 송두리째 뽑힌 흔적이에요.”
그 목소리는 냉정하게 들리기도 했고, 애달프게 들리기도 했다.
“재진 씨 기억은…… 이미, 지워졌어요.”
“…….”
“아마도 회귀하기 전에, 처음 만났던 당시의 내가 지운 거겠죠.”
“…….”
얼어붙은 조각상처럼, 권재진이 딱딱하게 굳었다.
숨을 쉬는 것마저 잊은 듯이 그대로 멈추어 서서히 주변과 유리되었다.
바로 곁에 달라붙어 속삭이는 서의우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물에 빠진 것처럼 음성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무것도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짐작 가는 건 있어요. 아마도 내가 하려다 실패했던 짓을 그때도 똑같이 했던 걸 테죠. 재진 씨가 미련 갖고 그리워하는 것, 제6 거주지구에 남기고 온 것…… 그걸 정신계 이능으로.”
“이미 지워졌다고……? 어떤, 무슨 기억을……?”
“이렇게 커다란 구멍이 남으려면, 필시 권재진 씨 인생 전반을 함께했던 존재였을 거예요. 유년기부터 함께한……. 애인은 아닐 테고, 음. 가족이라거나…….”
“…….”
“재진 씨, 가족이 있나요? 누군지 얼굴이나 이름을 떠올려 볼 수 있겠어요?”
서의우는,
1회차 서의우는 어째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울었던 걸까.
울고 빌고 매달리고 애원하고 무릎 꿇고.
왜.
권재진에게 미안하다며 잘못했다고 뉘우치고 후회했던 걸까.
왜!
1회차 서의우가…….
권재진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리도 절절히…….
“아무것도.”
권재진이 허탈하게 뇌까렸다.
번듯한 소파에 똑바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데도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재진은 이제껏 어디에 올라 있었고, 방금 막 어디로 굴러떨어진 것일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족이, 내게, 그런 게 있었나……?”
안온한 낙원에서 지옥의 불구덩이로 단숨에 내동댕이쳐진다.
두 번은 헤어 나올 수 없을 듯한 까마득한 재앙의 종극이다.
“유감이에요.”
서의우가 한숨을 뱉으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권재진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소리였다.
재진은 한참 동안 바윗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온몸의 피가 식고 살이 응고하여 생물체가 아닌 무기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영혼이 빠져나간 텅 빈 시체가 된 것이다.
“하…….”
권재진이 헛웃음 쳤다.
가볍게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점점 크고 강렬해졌다.
“하하하, 아하하하! 으하하하학!”
권재진은 서의우에게 꽉 끌어안긴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커다랗게 소리쳐 웃었다. 기둥에 묶여 뜨거운 불에 화형당하는 사람처럼. 높고 요란하게 비명 지르듯 웃어 재꼈다.
서의우. 미친놈. 미친 새끼. 미친…… 씨발 새끼. 개 씨발 새끼.
속았다. 완전히.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 버렸다.
***
인간은 누구나 다른 인간의 살과 피를 바탕으로 태어난다.
핏줄이 이어진 관계를 혈연이라 칭하고, 개중에 가까운 친족을 가족이라 칭한다.
가족.
부모, 형제, ……가족.
‘어째서 난 한 번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권재진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도 아니고 땅에서 솟은 존재도 아니다. 누군가의 피를 물려받은 인간일진대 어째서 지금껏 자신의 뿌리를 까맣게 잊고 있었나 모르겠다.
아예 인위적으로 삭제당한 것처럼.
‘내게도 가족이 있을 텐데, 당연히 있는 수밖에 없는데. 그 가족의 이름도, 얼굴도,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어이가 없잖아.’
처음부터 미심쩍어했어야만 했다. 의심하고 파헤쳤어야 했다.
그런데 게이트에 휘말려 죽고, 회귀하고, 서의우와 재회한 사실에 온 정신이 팔려 이 수상하게 끊어진 연결 고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빡대가린가?’
간간이 회사 생각은 했다. 서민의 삶이 어쩌고 하면서, 집 생각도 했다. 월세살이 전전했던 뭐 그런 기억들. 그런데 어떻게 그딴 사소한 신변잡기는 다 떠올리면서 정작 중요한 가족은 뒷전으로 미루고 한 번을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답은 정해져 있다. 서의우가 지웠으니까.
1회차 서의우가 권재진의 가족의 기억만 쏙 골라다가 본래 없던 존재처럼 완벽히 삭제해 버렸으니까!
‘그 씨발 미친 또라이 새끼.’
그래, 처음부터 서의우가 씹새끼인 줄은 알았다.
가이딩에 눈이 돌아 정신 나간 망나니인 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도가 지나친 쓰레기 후레자식 개씹호로새끼이지 않나……?
‘왜 숨겼지? 언제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던 거지? 아니, 아예 말할 계획이 없었나? 그러니 내가 정신계 이능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겠지? 그렇다면 그 새낀 정말 모든 걸 끝까지 숨기고 거짓말로 날 속이려 했던 건가……? 아…… 개새끼. 이 쑤셔 죽일 새끼. 누구 맘대로. 누구 멋대로 내 기억을……! 이 씨발! 좆같은! 씨발!!’
서의우는 권재진을 농락했다.
기만하고 배신했다.
권재진이 타고난 본래의 삶을 지우고, 서의우의 가이드로 살 수밖에 없게끔. 그에게 지배당한 머리로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권재진의 인생에 서의우밖에 남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피붙이를 잊고, 서의우밖에 알지 못하는 머리로, 서의우밖에 남지 않은 기억으로, 그밖에 무슨 결단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체 어디까지가 내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르겠다.’
서의우를 용서한 것,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 것, 사귀기로 한 것,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틀어진 거지…….
‘회귀는 왜 한 거지. 게이트에 휩쓸렸을 때, 그냥 그대로 사망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진실을 알게 될 일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 비참하지도 않을 텐데.’
증오스럽고, 증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권재진의 애인, 연인, 소중한, 그 뭐든…….
무엇이었든…….
4년을…….
어떻게 4년을, 권재진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그냥, 미련 없이 죽어 버릴 걸 그랬어.’
게이트에 휩쓸려 죽는 미래를 회피하려 들지 말고, 모른 척 놔둘 걸 그랬다. 서의우와의 가이딩 따위 평생토록 거부하고 그를 끊임없이 증오할 걸 그랬다. 조금도 풀어지지 말고, 항시 경계하며, 연민의 감정은 애초부터 싹을 잘랐어야 했다.
서의우가 얼마나 애를 쓰든, 좋아하면 안 됐다. 그 새끼가 복숭아처럼 웃든 강아지처럼 꼬릴 치든 단호하고 매정하게 밀어 내고, 일말의 호감도 느끼지 말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