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다 저었으면 우유하고 생크림 넣을 겁니다. 유제품을 쓸 때는 먼저 소비 기한을 확인해야 합니다. 포장에 날짜 적힌 것 보고 신선한지 확인하는 거예요.”
“음…… 날짜 넉넉하네요.”
“그럼 좋습니다. 넣읍시다. 우유는 한 컵, 생크림은 조금만.”
“한 컵은 알겠는데, 조금만은 얼마나 조금만이지.”
“눈대중으로…… 한 이만큼.”
권재진이 유리 볼에 생크림을 짰다. 안의 내용물이 확 밀려 나오며 손에 조금 묻었다. 아무렇지 않게 손에 묻은 크림을 낼름 핥아 먹는데 위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서의우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반들거리는 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고, 재진은 왜인지 속이 근질거렸다. 갈비뼈 깊은 속, 가슴 안쪽이 불편했다.
“그거, 흐르는데.”
생크림이 손가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권재진은 자신이 무슨 B급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아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칠칠찮게 크림이나 묻히고, 그걸 핥아 먹다가 목격되고, 지적당하고. 흔한 드라마 클리셰 아닌가. 이런 건장한 체격에, 나이에, 무표정이 기본인, 세파에 찌든 직장인 권재진이 할 만한 배역이 아니다.
재진은 아무렇지 않은 내색 하며, 키친타월을 뽑아 태연하게 손을 닦았다.
“요리하다 보면 이런 일 종종 있습니다. 키친타월로 닦거나 싱크대에서 씻으면 됩니다.”
“네에. 종종 있는 거군요.”
“재료 다 넣었으니 섞읍시다. 아까처럼 저어요. 그리고 거기 체, 벽에 걸린 체에다가 넣고 거를 겁니다.”
“재진 씨는 요리하면서 종종 핥아 먹고 그러는구나.”
아이 씨.
“저도 핥을까요? 손에 좀 튀었는데.”
서의우가 거품기를 젓다 말고 멈추었다. 그의 손등에 우유와 생크림 섞인 뽀얀 달걀물이 몇 방울 묻어 있었다. 재진이 키친타월을 북 뜯어서 서의우의 손등을 박박박 문질렀다.
“서의우 씨는 음식물 먹지도 않는다면서 왜, 뭘 핥습니까. 됐습니다.”
“그렇네요, 난 안 먹지. 그럼 재진 씨가 내 손 핥아 줄래요?”
“헛소리 마시고 빨리 체에 거르십시오. 두 번 거를 겁니다. 여러 번 거를수록 달걀이 부드럽고 맛있어져요.”
“재진 씨.”
“왜요.”
“좀 이해가 안 되는데. 나 진짜 4년 내내 요리 한 번도 안 했나요? 왜 안 했지, 이렇게 재밌는데.”
“…….”
“음, 체도 종류가 많네요. 크기가 이게 맞으려나……. 내 주방인데도 이런 도구들이 있는 줄 까맣게 잊고 살았네요.”
서의우가 체 하나를 집어 들고 달걀물을 걸렀다. 착실하게 권재진이 알려 준 대로 두 번 꼼꼼하게 거른다. 이제 다 되었다며 환히 웃는 낯으로 쳐다보는데, 권재진은 마땅한 반응을 해 줄 수 없었다.
가슴 속이 좀 쥐어짜이는 것 같고, 심장이 다리미로 지져지는 것 같고 그랬다.
‘이래도 되나.’
서의우를…….
1회차 서의우를…… 아직 떠나보내지 못했는데, 2회차 서의우와 이렇게 생각 없이 웃으며 지내도 되려나 모르겠다.
딱히 안 될 건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좀. 마냥 편하진 않았다. 답답했다. 거대한 누름돌에 깔린 콩알처럼.
“재진 씨? 이거 다 했는데요.”
“아…… 예. 잘했습니다. 그거, 프라이팬에 넣고 스크램블드에그 만들 겁니다.”
“프라이팬, 프라이팬, 찾았다. 이거 쓰면 되겠네요.”
“팬 올리고 꺼질 듯 말 듯 한 약한 불로 조절해 보십시오. 올리브유 뿌리시고…… 이제 나무 주걱으로, 아, 꼭 나무로 된 걸 써야 합니다. 안 그러면 프라이팬 코팅 다 벗겨져요. 천천히 뭉근하게 저으세요.”
“네에.”
대충 조리를 지시해 놓고 권재진은 팔짱을 꼈다.
딱 한 번만 가르쳐 주었는데도 서의우는 시키는 그대로 곧잘 해냈다.
약한 불로 살살 볶아 낸 스크램블드에그가 나름 그럴싸한 형태로 뭉쳐지며 익었다. 재진이 불을 끄라고 하지도 않았다만,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서의우가 알아서 가스 불을 껐다.
“와, 됐다. 내가 했어요. 요리. 이거 맛있을까요? 응?”
신이 난 서의우가 들뜬 눈으로 접시를 가져왔다. 이능을 사용했는지 희고 커다란 접시가 저절로 그의 앞까지 날아왔다. 플레이팅까지 마치고서는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스크램블드에그를 재진의 앞에 슥 내밀었다.
“자요.”
어지간히 기쁜 모양인지 그의 희고 청순한 대형견 같은 얼굴이 발그레하니 달아올라 있었다.
만인의 영웅이고, 경외시되고, 추앙받는 서의우가 권재진을 위한 요리 한 접시를 만들어 놓고서 평가를 기다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게 참 이상했다.
이 눈앞의 서의우는 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최초의 S급 에스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능한 서의우도 아니고,
권재진이 익히 알고 있는 정신 나간 개새끼, 가이딩에 미친놈도 아니고,
권재진에게 울며불며 매달리고 용서를 빌던, 안쓰럽고 가여운 가혹한 24살 서의우는 더더욱 아니었다.
“뭐 해요. 먹어 봐요, 재진 씨.”
“…….”
“먹기 싫어요? 맛없을 것 같나……. 내가 뭐 잘못 만들었어요?”
“…….”
“안 먹어요……?”
재진이 작게 숨을 토해 냈다.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스크램블드에그에 소금과 후추를 살짝씩 뿌렸다. 숟가락을 집어 든 뒤, 한술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고소하고 담백한 달걀의 맛. 혀끝에서 부드럽게 풀어지는 식감. 따뜻한 온도까지 모든 것이 알맞았다. 맛있었다.
“맛…… 맛이 있네요……. 서의우 씨 요리에 재능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에 놀라 권재진이 저도 모르게 진심을 뱉었다. 권재진답지 않게 솔직한 날것의 반응에 서의우가 더욱 기쁜 듯 눈을 휘었다.
“정말요? 더 만들어 줄까요. 두 번째는 이것보다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이거면 충분합니다…….”
권재진이 다시금 숟가락을 들었다.
몇 술 연이어 떠먹다가 오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스크램블드에그가 담긴 숟가락을 서의우의 입가에 내밀었다.
그대로 먹여 주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허탈하게 눈을 깜빡였다.
“실수입니다. 제가 이게 습관이 돼 버려서.”
안 먹을 거 뻔히 아는데. 쯧.
멋쩍은 권재진이 팔을 거두려 했다. 그렇지만 서의우가 재진의 손목을 붙들었기에, 내민 숟가락을 치우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있어야만 했다.
“재진 씨는…… 전부터 이랬죠.”
서의우가 반들거리는 말간 회색 눈동자로 숟가락에 곱게 담긴 포근포근한 달걀과 권재진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이 썩 평온치 않았다. 슬그머니 일렁거리는 게 불길하다.
“나한테 자꾸 뭘 먹이려 했어요. 안 그런가요?”
“예, 뭐…….”
“내가 나중에 식사도 하게 되나요? 재진 씨랑 같이 밥 먹고 그러나……?”
이제 이런 질문쯤은 대답하기 어렵지 않다.
권재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손목은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보였지만, 그랬다간 숟가락에 곱게 올려 둔 달걀이 다 흩어질 터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예, 최근 잘 잠들게 된 것처럼 식사도 곧잘 하게 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먹을게요.”
대뜸 서의우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그가 숟가락 위에 소복하게 담긴 노란 스크램블드에그를 먹어 치웠다.
한입에 깔끔하게 넣고 꼭꼭 씹어 삼킨다.
권재진은 얼이 빠져서 초점이 풀린 까만 눈으로 서의우를 쳐다보았다. 저 새끼는 대체 또 왜 저러는 걸까. 도통 심리를 모르겠다.
“서의우 씨, 억지로 먹을 필요 없습니다. 아직 식욕도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럽니까?”
“으음…… 부드럽네요. 따뜻하고, 근데 달걀 비린내가 좀 나요. 눌어붙은 곳도 있고.”
“아니 뭘…….”
“맛없어요. 재진 씨 이따위 걸 정말로 맛있게 먹은 거 맞아요? 너무 못 만들었는데, 내가.”
“…….”
“연습해야겠다. 다음에 더 맛있게 만들어 줄게요.”
서의우가 붙든 손목을 놓아주었다.
권재진은 이게 뭔가, 서의우가 뭐 하자는 건가, 찜찜하게 골몰하며 숟가락을 썼다. 그는 맛이 없다고 했지만 재진의 입에는 충분히 맛있게 느껴졌다.
권재진은 접시가 다 비워질 때까지 묵묵히 침묵을 고수하며 스크램블드에그를 먹었고, 서의우는 그 옆에서 식사하는 재진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머리카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권재진이 숟가락을 입에 넣을 때마다 벌어지는 입술을 지켜보았고, 맛을 보며 씹을 때마다 움직이는 턱 근육을 보았다. 숟가락을 사용할 때 들어 올리는 팔의 각도, 접시를 쥔 손의 모양, 심지어는 숨 쉴 때마다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어깨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감출 생각조차 없이 쏟아지는 시선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노골적이고 집요했다.
권재진은 참으로 오랜만에 서의우의 시선으로부터 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들키지 않게 발끝을 조금 움츠리고 고개를 슬며시 수그렸다.
서의우가 이상했다.
단언컨대 확실하게, 어딘가 단단히 이상하게 변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왠지 좀…….
‘이런 것도, 이렇게 지내는 사이도, 썩 나쁘지는 않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