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도대체 무슨 긴급 호출을 받고 나간 건지 서의우는 엿새가 지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장기 출장에 배정된 모양이다. 1회차에서도 종종 오래 집을 비우는 일이 있긴 했다만, 그게 이맘때였는지 어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권재진은 새하얀 침대에 홀로 멍하니 누워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탁 트인 유리 천장 가운데 꼴 보기 싫은 서의우의 잘난 낯짝이 스멀스멀 떠올라 아른거렸다.
미친 건가.
재진이 홱 이불을 당겨 얼굴을 덮었다. 부질없는 도피였다. 눈을 감아도 서의우가 떠올랐고, 잠을 자도 서의우 꿈을 꿨다.
‘그딴 일이 있었는데 엿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다니.’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불안했다. 서의우가 임무 도중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회차에도 이렇게까지 오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는지, 그땐 멀쩡히 돌아왔었는지, 뭘 어쨌는지 저쨌는지 모조리 헷갈렸고 1회차의 기억을 더듬어봐야 부질없는 짓임을 알기에 더욱 초조했다.
권재진이 아는 미래는 무용지물이 됐다.
완전히 틀어졌다.
서의우가 권재진의 기억을 지우려고까지 했는데, 이 와중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서의우가 죽거나, 아니면 크게 다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몰라 썅…….’
서의우가 돌아오지 않아도 걱정이지만, 서의우가 돌아와도 걱정이다.
‘그 새끼가 또 기억을 없애려 들면 어쩌지?’
서의우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분명 그럴 터다. 예기치 못한 이변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끈질기게 나서겠지. 권재진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매트리스에 주먹을 내질렀다. 베개를 집어 던지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대체 뭘…… 어쩌라고 나더러. 서의우를 잊어? 정말 확 다 잊어버릴까?’
1회차 서의우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필시 그와 얽힌 1회차 인생도 잊게 될 터였다.
지나간 4년이 모조리, 싹 제거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권재진은 자신이 회귀한 줄도 모르게 되어 버릴 터다. 이번 생이 처음인 것처럼, 서의우와 만난 게 처음인 것처럼 리셋되어 버리겠지.
‘오히려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1회차 서의우를 잊게 되면 권재진은 필시 가이딩이 싫어 발악하게 될 터였다. 일반인으로서 살아온 인생만 남아서 서의우를 극렬하게 증오하고 혐오하게 되겠지. 가이딩을 거부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이 집에서도 탈출하려고 온갖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서의우와 싸우고, 그의 총을 훔쳐 쏴 대고, 애착 식칼로 몰래 숨어서 자해하고, 힐링 팩터로 끈질기게 치료당하면서 수갑에 묶이게 될 것이다.
‘그 개지랄을 다 거치고 나면 2회차 서의우도 1회차 서의우처럼 되지 않을까. 후회하고 뉘우치던 서의우. 권재진의 애인. 내가 알던, 내가 받아들인 서의우로 돌아오지 않으려나……?’
권재진이 서의우를 잊어야만 서의우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면 기억을 삭제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선택지였다. 이딴 불합리하고 황당무계하고 모순적인 가정을 하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한편으론 진지하게 괜찮지 않나 싶기도 했다.
‘돌았군. 제정신이 아닌 거야. 하긴, 서의우 그 미친 새끼랑 4년을 지냈으니 나까지 정신병이 옮는대도 별수 없지. 전부 서의우 탓이다. 서의우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권재진이 비척비척 주방으로 걸어갔다. 복도를 걸어가다가 공연히 죄 없는 벽을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패거나 했다.
주방에 도착한 재진은 애착 식칼을 꺼내 한 손에 들고 와인 창고로 내려갔다. 어두운 조명이 은은하게 퍼진 널찍한 벽면에 고가 주류가 줄줄이 진열되어 있었다.
독한 술이란 술은 다 있었다. 보드카, 마티니, 위스키, 브랜디, 럼, 테킬라…….
권재진은 애착 식칼로 전시된 술병을 팅팅 튕기면서 진열대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다가 눈앞에 보이는 투명한 테킬라 하나를 집어 뚜껑을 땄다. 병째 들이켜곤 입을 닦는다.
‘개새끼. 서의우 개씨발 새끼.’
1회차에서도 2회차에서도 권재진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괴롭힐 수 있다니. 그 자식은 정말 난놈이었다.
재진은 빈속에 술을 쏟아부으며 예쁘게 생긴 크리스털 병에 담긴 위스키와 자신이 태어난 해의 년도가 적힌 와인 병을 집어 옆구리에 끼었다. 와인 창고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서재에 들렀다가 전시실로 발을 돌렸다.
전시실은 말 그대로, 미술품 전시실이다. 서의우가 수집한 그림이 걸려 있다. 죄다 진품이란다.
마네의 진품. 드가의 진품. 제리코의 진품.
권재진은 안목이 조악하고 예술에 관심이 없어 어떤 명화를 봐도 서의우가 더 잘생겼군, 그 새끼 낯짝이 더 볼만하군, 따위의 생각만 했지만, 가끔 혼자일 때면 이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림 속 인물들이 함께 있는 것 같아서다.
평생을 군중 속 1인으로 살아온 권재진은 무리 지어 있는 게 편안했다. 물론 제6 거주지구에서 생활할 때는 권재진도 나름 알파 메일에 속해 있었다. 노동자 계층이라도 타고난 체격이 좋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서의우 같은 독보적인 인간과 4년을 함께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상대적 평범성을 깨닫고 만다.
평범함이란 속성은 나쁜 것이 아니고, 열등한 것도 아니다. 다만 권재진이 놓지 못하는 일반인의 전신일 뿐이었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곁에서 어쩔 수 없이 그의 가이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 출신으로 살아온 세월을 저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돌연변이, 반쪽짜리, 사살당할 운명, 그 모든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결함 속에 재진은 서 있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정체성을 붙들고서.
‘그러니까…… 내가 잘못된 게 아니야.’
권재진의 열망은 항상 옳았다.
게이트를 회피하고 살아남고 싶은 열망.
서의우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열망.
기억을 잊고 싶지 않은 열망.
기억을 잊어 본래대로 되돌아가고 싶은 열망.
원하는 요건이 모순되고 상충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느 것 하나 틀리다고 말할 수 없었다.
권재진은 진실로 전부를 원했다.
그에게는 욕심껏 거머쥐고 쟁취할 자격이 있었다.
‘내가 결정해야만 해.’
어느 길을 택할지. 어떤 미래를 유도할지. 서의우와 서의우를 저울 위에 올려놓고 재야 했다.
기억을 사수하고 1회차 서의우를 지킬지. 기억을 내주고 2회차 서의우를 얻을지. 과거를 내주고 미래를 얻느냐, 미래를 내주고 과거를 얻느냐의 싸움이다.
‘이럴 때 서의우는…… 서의우였다면 어떻게 했으려나.’
만일 권재진이 두 명으로 쪼개진다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는…….
‘…….’
재진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가져온 위스키와 와인도 따고 주종을 바꿔 가며 섞어 마셨다.
술에는 꽤 강한 편이지만 이렇게 무식하게 병나발을 불면 말술이라도 취한다. 권재진의 팔다리 어깨 무릎 죄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서의우는.’
꼬인 혀로 속내를 중얼거린다.
“그 새끼는…… 대단하신 새끼라서…… 내가 두 쪽이 나도…… 어떻게든 돌려놓겠지.”
혹시 또 모른다.
회귀를 뒤엎을 수 있는 이능이 있는 걸지도. 시간을 뛰어넘는 이능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중요한 건, 서의우라면 권재진을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았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 집착광공 새끼가 그렇게 순순히 뭘 포기하거나 놔주는 놈이었다면 권재진은 진작 그에게서 도망쳐서 카리브해 요트 위에 있을 터였다.
“씨발…… 나도 포기 안 한다, 이씨.”
1회차 서의우도, 2회차 서의우도, 죄다 권재진 것이다.
둘 중 누구도 놔줄 수 없다.
권재진이 가질 거다.
전부 다 가질 거다.
‘기억도, 미래도, 목숨도, 서의우도.’
그리고, 거기에 더.
묻고 더블로.
‘일반인의 삶, 가이드의 삶, 돌연변이의 삶. 다 내 거다.’
***
휘발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의우가 강철판을 찌그러트려 농구공 사이즈 철공으로 만들어 버렸던 육천만 원짜리 두카티 파니갈레 V4 SP 바이크. 그리고 그 바이크에 구성품으로 슬쩍 딸려 왔던 휘발유.
덤. 엑스트라. 메인 디쉬 아닌 사이드 디쉬. 주연 아닌 조연.
끼어 있는지도 몰랐던 추가 품목이 지금 순간 권재진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줄 누가 알았을까.
이래서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랬다.
‘기름 냄새 독하군.’
권재진은 뚜껑 딴 휘발유 통을 들고 거실을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바닥에 기름을 줄줄 뿌리면서 한 통을 모두 소진했다.
소파도, 카펫도, 커튼도, 마루도, TV도…… 죄다 기름칠을 해 두고 통을 뒤집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놓치지 탈탈 털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절반쯤 비우고 남은 테킬라도 그 위에 쏟았다.
1회차에서는 서의우의 술 수집품을 몽땅 털어서 하나하나 깨부수고 겨우 방화했는데, 2회차에서는 이렇게 쉽게 불 싸지를 수 있어 편하고 좋았다. 역시 납치 감금 경력직. 짬밥은 사라지지 않는다.
‘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있으니 재미가 덜하긴 하다만.’
권재진은 술 냄새와 기름 냄새를 풀풀 풍기며 토치로 불을 붙였다. 아직 취해 있어서 손끝이 붉었다. 거실 전체로 불길이 번지는 동안 재진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