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말을 끝마친 서의우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권재진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재진의 눈이 흐려졌다. 그의 손끝이 여러 개로 흔들려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곳에 응축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몰아치고, 소용돌이 형태의 나선을 그리며,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었다.
그건 마치 압축된 결정 같았다.
인간의 시력으로는 포착할 수 없지만 분명 서의우의 손끝에 존재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아름답고 장엄한 힘이. 똬리를 튼 뱀처럼 불길하고 사특한 괴물 같은 힘이.
권재진은 기이한 매혹에 홀려 서의우를 멍하니 넋을 빼고 쳐다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찬란한 공포에 잠식당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편안해지겠지. 다 잊으면.
쌓여 있던 묵은 감정 전부 지울 수 있겠지.
그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도 있겠지. 기분 좋게.
이윽고 권재진은 그 안일한 생각이 얼마나 개병신 머저리 빌어 처먹을 쌉소리인지도 깨달았다.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미련해도 이렇게 미련할 수가!
“……아니, 그걸론 부족합니다.”
권재진이 그르렁대며 위협하듯 뇌까렸다.
가이드와 에스퍼.
서로 협력하고 돕는 비즈니스 파트너. 동료. 깔끔하고 담백한 지랄나발, 그런 건 권재진과 서의우 사이에서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렇게 쉽게 끝낸다고……?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런…… 그럴 거면 대체 왜, 이 온갖 고생을 한 건데……. 저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딴 도망치는 방식으론 끝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찢겨 죽어서 끝내고 말지.”
역시 안 되겠다.
미련이든, 시간 낭비에 감정 낭비든,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래가 벌써 완전히 달라졌다고 해도…….
서의우가 더는 권재진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글렀어, 씨발!’
적어도 지금 권재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의우를 이대로 망각 저편에 놓아줄 수 없다. 그 생각만이 뇌를 지배했다.
“하지 마! 손 치워!”
“재진 씨, 위험해요. 갑자기 날뛰면 다른 걸 잘못 건드릴 수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아니, 하지 마십시오. 당장 그만둬. 내 기억에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격양된 재진이 팔을 내질렀다.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움켜쥔 주먹으로 온 힘을 다해 서의우의 뺨을 갈겼고, 서의우는 얼굴을 보호하지 않았다.
맨주먹에 맞아 뒤로 밀린 뺨이 발갛게 부었다.
희고 말간 얼굴에 생긴 흠집이 원치 않아도 뚜렷하게 눈에 띄었다.
“그것만은 싫습니다. 거절합니다. 서의우 씨.”
권재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확고한 결심을 담아 고개를 내저었다.
“전 분명 싫다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싫어요. 싫습니다. 이 사태의 해결법은 제가 스스로 찾을 것이고, 설령 잊는 수밖에 없다 해도 제가 직접 잊을 겁니다.”
“…….”
“서의우 씨 도움, 필요 없습니다. 도움 청한 적도 없는데 함부로 끼어들지 마십시오!”
권재진은 몸소 깨달았다. 쉽고 편한 지름길을 택하는 게 어떤 역효과를 일으키는지.
아무 생각 없이 간단하게 미래를 바꾸려다가 이 지경이 됐다.
서의우의 힘으로 기억을 지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쉽게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었다. 차라리 괴롭고, 고통스럽고, 지긋지긋할지언정 권재진에게 주어진 문제를 하나씩 생각하고 나아가며 풀어내야 마땅했다.
그게 권재진과 서의우가 해 왔던 방식이고, 그렇게 이뤘던 관계니까.
“내가……. 내가 끼어든 건가요.”
서의우가 고저 없이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아니요. 재진 씨 내 가이드예요. 우리 관계에 그쪽이 끼어든 거겠죠.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뭐…… 그렇게 그 사람이 좋은가요?”
정통으로 주먹에 얼굴을 맞았는데도 그는 이능을 멈추지 않았다.
일반인 출신 권재진이 때린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서의우다. 콧등을 찡그리고 픽 웃기나 한다.
“돌아갈 수도 없고 떠올려 봐야 괴롭기만 한 기억인데, 그렇게 질색하고 거부할 정도로 그 애인인지 뭔지가 좋아 죽겠느냐고요!”
손끝에 응축된 결정이 더욱 눈부시게 확산하고 있었다. 재진의 안색이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닙니다. 서의우 씨는 지금 큰 오해를 하고 있어요. 서의우 씨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기억에 손대는 이 행위 자체가 불쾌하다는 뜻입니다.”
“왜요? 잊으면 다신 되돌아가지 못하게 되니까? 사실은 언젠가는 나한테서 도망칠 계획이었던 건가요.”
“기억을! 사람 머리를, 손댄다는 게…… 정신계 이능인지 뭔지, 각성자들이 얼마나 쉽고 편하게 써 대는지 모르겠지만…… 저 같은 일반인은 거부감 듭니다. 인위적으로 축출하고 삭제하는 발상 따위 해 본 적도 없고 낯설다고요!”
재진이 윽박지르며 서의우를 떠밀었다. 무릎으로 걷어차고 험하게 엎어져선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 마루에 깔린 카펫이 구겨진다.
서의우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권재진을 뒤쫓았다.
“아…… 그거 어려운 거 아니에요. 전투에서 말이죠, 동료를 잃으면요. 정신적인 충격이 남잖아요?”
“……뭐?”
“그런 일로 실의에 빠지면 다음 전투에 대응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 지워 내는 거예요. 죽은 동료들……. 정규 교육 수료하지 못하고 처분당한 동기들…….”
“그게 뭡니까…… 그게 뭐냐고요……. 사람이 그딴 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까……?”
“왜 못 살겠어요?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잖아요. 각성자가 무너지면 인류는 절멸해요. 우린 그런 책임을 떠맡고 있어요.”
높다란 벽이 보였다.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 서의우가 서 있었다.
그는 에스퍼의 최정점, 각성자의 선두였다. 그가 쌓아 올린 삶의 무게가 무자비하게 권재진을 짓눌렀다. 서의우가 아무렇지 않게 견뎌 온 의무와 책임, 권재진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부당하다고밖에 평할 수 없는 잔혹한 세계가 드러나 보일수록 숨이 막혔다. 목이 미어지고 답답해서 울분이 터진다.
서의우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고, 권재진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두 사람의 간극은 대체 언제쯤 좁혀지는지.
이 가긍한 딜레마는 언제 종식되는지.
“이제 이해했으면 정말로 꼼짝하지 말아요. 나도 다 겪었던 거고, 각성자라면 누구나 거치는 거니까. 빨리 끝내 줄게요.”
서의우가 걸어왔다.
그러자 거실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에 붙은 조명이 깜빡깜빡 점멸했고, 벽과 바닥이 일제히 진동하며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거대한 어둠이 덮쳐 오는 것 같았다. 새카만 해일에 휩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권재진은 끝까지 저항하고 거부 의사를 밝히려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서의우가 그보다 빨리 권재진의 입을 손바닥으로 덮어 눌렀다.
“있잖아요, 재진 씨.”
“읍……!”
“내가 먼저 재진 씨 방식에 맞춰 줬으니, 재진 씨도 한 번은 내 방식에 맞춰 줘도 되잖아요. 네? 우리 좋았잖아요.”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권재진을 내려다보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나도 좋고, 재진 씨도 좋았잖아요. 난 우리가 정말 잘될 거라고 생각해요.”
서의우를 중심으로 강한 압박이 가해졌다. 그를 둘러싼 대기가 불온하게 가라앉더니만 숨을 쉬기 어렵게끔 아래로 무참히 짓눌렸다. 마치 공기가 터져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윽, 크흑.”
“재진 씨가 내 가이드라서. 내가 찾던 가이드가 다름 아닌 권재진 씨라서…… 나는…….”
느슨하게 펴진 손끝이 권재진의 이마를 향해 다가왔다.
이제는 손끝이 아니라 서의우 자체가 흔들려 보였다. 막대한 힘이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절절 끓어 넘치고 있었다. 서의우는 고도의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의처럼 입술을 닫고 집중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긴장한 채 멈추었고 땀 한 줄기가 턱선을 타고 흘렀다.
서의우가 권재진의 뇌 속으로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
그 순간,
손끝이 이마 중앙에 닿기 직전,
적막을 깨고 긴급 호출이 울렸다.
서의우가 벨트에 찬 검은색 단말기에서 삐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단조롭고 간결한 음이 반복해서 들렸다. 확인할 때까지 꺼지지 않는 모양이다.
차갑게 식은 서의우가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집중이 깨졌다.
“아…….”
그의 손에 압축되었던 힘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처음부터 그런 불가사의한 힘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어 차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 그가 권재진의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내고 무심한 눈으로 단말기를 들어 확인했다.
언제 어느 때건 호출이 최우선 사항이다.
서의우의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가 봐야겠어요.”
긴급 호출이 권재진을 살렸다.
그렇게 밀어 내고 거부할 때는 꼼짝도 하지 않던 서의우가 쉽게 권재진을 놓아주었다. 단말기를 허리에 차고 훌쩍 일어서서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무균이동실로 떠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권재진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