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24)화 (24/154)
  • #24

    “어제 꾼 악몽 때문이에요? 아직도 생각나나요?”

    “…….”

    “이젠 쳐다보지도 않네……. 대답도 안 해 주고.”

    전투복 상의에 탄창을 수납한 서의우가 주방 구석에 선 권재진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마시라고 물잔을 내밀었으나 재진은 받지 않았다.

    “재진 씨 마음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나한테 좀 알려 주면 좋을 텐데.”

    서의우가 기다란 눈을 휘어 웃었다. 말갛고 청순한 얼굴이 아름다웠다.

    “혹시 또 내가 뭐 잘못했나요. 잘못한 거 있으면 말해 줘요. 고칠게요.”

    포기하고 물잔을 탁자에 둔 서의우가 권재진에게 달라붙었다. 구석진 곳에 서 있는 권재진의 등을 덮쳐 누르듯 벽에 양팔을 짚어 뒤를 점하고 무방비한 뒷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가볍게 키스하는가 싶더니 이를 세워 잘근댄다.

    “……앞니 치우십시오. 그럴 기분 아닙니다, 지금.”

    권재진이 팔꿈치로 서의우의 배를 밀었다. 그런들 서의우는 재진을 끌어안고 단단히 들러붙을 따름이었다.

    “이것 봐. 역시 화난 거죠.”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러는데요. 재진 씨는 모르는가 본데, 재진 씨 그제부터 쭉 인상 쓰고 있었어요. 내가 불러도 다섯 번 중 두 번은 무시했고.”

    “……애초에 서의우 씨가 쓸데없이 많이 불러 대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합니까? 시도 때도 없이 재진 씨, 재진 씨…… 이름 닳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귀찮았나요. 그래서 기분 저조해요? 그게 아니라면 난 짚이는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아, 뭐.”

    권재진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던 서의우가 고요히 말을 멈추었다. 떠오른 생각에 회색 눈동자를 내리뜨려 권재진의 안색을 살폈다. 삭막한 눈으로 차근히 훑어본다.

    “이번에도 또…… 그 사람 생각했어요? 사귀었던 사람?”

    그 말에 권재진이 눈썹을 찌그러트렸다. 이런 대화를 몇 번이고 주고받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날 밤 박히다 정신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다물었을 거였다.

    “됐습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설마 나 때문에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고 오해하는 건 아니죠? 그러면 나도 화날 것 같은데.”

    “됐다고 했잖습니까! 그만 말하세요, 서의우 씨. 나 당신 오해 안 합니다.”

    권재진이 윽박지르듯 선 그어 단호하게 거절하자 서의우의 눈빛이 슬며시 흐려졌다.

    “제가 돌연변이 각성한 건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서의우 씨 잘못 아닌 것도 압니다. 다 아는데, 그냥, 머리가 좀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본래라면 돌연변이 권재진은 사살당했을 운명이었다. 그걸 서의우가 한발 앞서 나타나 빼돌려 낸 덕에 목숨을 구한 거다. 물론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라지만, 동기를 배제하고 결과만 놓고 보면 서의우는 권재진을 살린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를 오해하거나 원망할 생각 없다. 그런 감정은 1회차 삶에서 모두 소진했다. 다만 지금은 권재진에게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아…… 그런가요? 그럼 뭐예요. 내 잘못 아닌 줄 안다면서, 화풀이는 나한테 하는 건가.”

    “…….”

    “재진 씨, 나 무시하지 말아요. 재진 씨가 날 좋아하도록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면서 왜 그래요. 적어도 내가 알아듣게 말해 줄 수는 있잖아요.”

    서의우의 얼굴은 새하얀 대리석처럼 단단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또한 충동이나 불안 따위 엿보이지 않았다. 자제하지 못해 절실하게 가이딩을 갈구하던 때와 달리 몰라보게 말끔하고 단정했다.

    “뭘 묻든 됐다고, 아니라고만 답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난 알고 싶어도 모르겠는 것뿐인데.”

    티셔츠 안으로 파고든 손에 차츰 힘이 들어갔다. 재진의 허리를 세게 쥐어 잡은 서의우가 팔뚝을 부르르 떨었다. 아팠다. 권재진이 몸을 비틀어 뒤집었다.

    갇힌 자세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니, 서의우에게서 떨어지고 싶었다.

    헛짓거리인 줄 알면서도.

    “뭐야, 어디 가요.”

    서의우가 사납게 읊조렸다. 팔을 낚아채 붙들어 쥐고 대리석 벽에 재진을 도로 억눌렀다.

    “할 말 없어요?”

    찌르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 권재진을 파헤쳤다. 들끓는 눈빛은 야성적이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맹수에게 뭉개지는 듯한 착각이 인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분명하게 비틀리고 어긋나자 모순되게도 권재진의 가슴에 안도감이 일었다.

    서의우와 부딪치고, 다투고, 서로를 상처 입히면…… 이 서의우가 혹여 예전의 서의우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이번에도 온갖 감정의 골을 거쳐 서로에게 닿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아무런 확신 없는 덧없는 기대일 뿐이지만.

    “……서의우 씨는 제게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겁니까.”

    소낙비에 젖은 것처럼 침체한 목소리가 재진의 입에서 나왔다. 이렇게까지 비관에 빠질 생각은 없었다만, 불가항력이었다.

    “재진 씨가 나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인지 말해요.”

    우로보로스 같은 질문에 권재진이 헛웃음을 삼켰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1회차 서의우 때문인지, 아니면 2회차 서의우 때문인지…….

    “예, 뭐……. 만나던 사람 때문이겠군요. 전 애인인지, 현 애인인지……. 헤어졌다고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런 것 때문에.”

    “여태 멀쩡하다 며칠 새 갑자기?”

    “그러게 말입니다. 갑작스럽군요. 그래서 더 감당 안 되는 거고.”

    “…….”

    “궁금증 풀렸으면 이제 놔주시지 그럽니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의우 씨는 그만 출근하시고요.”

    권재진이 재차 서의우를 밀어 냈다.

    하지만 서의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재진을 붙든 채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않고 형형한 회색 눈동자를 오롯이 빛냈다.

    권재진의 검은 눈동자, 불필요한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눈매, 경직된 코와 뺨, 감정을 억눌러 감춘 듯 굳게 다물린 입술. 이목구비 하나하나 파헤치듯 뜯어본 서의우가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의 목덜미에 핏대가 섰고, 눈동자가 서느렇게 떨렸다.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던 서의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바닥을 발톱으로 긁는 듯한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내가요. 재진 씨 도와줄 수 있어요.”

    도울 수 있다고?

    그럴 리가.

    “아뇨, 이건 제 개인사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돕고 싶어서 그래요. 재진 씨도 날 가이딩 해서 도와주잖아요.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재진의 눈가가 찌그러졌다. 서의우를 거절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험난한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잊고 있었다.

    “하……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까? 개인사라고 했습니다. 서의우 씨가 상관할 문제 아니에요.”

    “아니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권재진 씨에요. 재진 씨가 몰라서 그래요. 그냥 내게 맡겨요.”

    “그러니까, 대체 뭘 자꾸……!”

    참다못한 권재진이 눈을 치들었다. 서의우의 일렁이는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쳤다. 강렬하게 얽히고 서로를 끌어내며 나란히 격정에 도달했다.

    “나라면, 재진 씨 머리에서, 그 사람만 말끔히 도려 낼 수 있어요.”

    권재진은 화가 나 있었고, 그건 서의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만난 적 없던 것처럼 지워 줄게요. 상대의 존재 자체를 뿌리째 파내서 없애 버리는 거예요.”

    서의우가 느릿하게 입술을 말아 올려 미소 지었다. 들리는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고, 소름 끼쳤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치미는 분을 억누르고 차분히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서의우 씨. 지금 한 말…… 무슨 뜻입니까.”

    머리에서 도려 내?

    상대의 존재를 없앤다고?

    “정신계 이능이요. 생물의 뇌파에 간섭할 수 있어요. 숙련자는 개체의 사고, 행동, 오감 등을 조작할 수 있죠. 물론 기억을 읽거나 없애는 것도 가능해요.”

    “……허.”

    “활용하려면 허가도 받아야 하고 여러 제약이 따르지만, 재진 씨를 숨겨 두는 것부터가 범법 행위인데 기억 좀 건드린다고 이보다 더 잘못될 건 없겠죠.”

    서의우. 20세. 최초의 S급 에스퍼.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유례없이 강력한 다중 이능 사용자.

    “지금쯤이면 제6 거주지구에서 재진 씨 실종 사망 처리 됐을 거고, 그 애인이란 사람도 재진 씨가 죽은 줄 알 거예요. 불시에 크리처에 습격당해서 시체조차 못 찾는 피해자들 매년 숱하게 쏟아져 나오니까요.”

    어째서 서의우의 전능함을 간과하고 있었을까.

    그의 초월적인 힘에 대해 알 만큼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역시 자만이었다.

    권재진은 아직도 서의우를 몰랐다.

    서의우가 정신계 이능을 사용할 줄 아는지도 몰랐고, 하물며 그런 이능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각성자들은 허가만 받으면 일반인을 뜻대로 지배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 그런 사실이 세간에 알려졌다면 일대 파란이 일었을 테니까.

    “혼자 이렇게 미련 갖고 끙끙대 봤자 시간 낭비에 감정 낭비예요. 날 믿어요. 내가 재진 씨 기억, 살짝 건드려서 다 없애 줄게요.”

    “…….”

    “편안해질 거예요. 잡념은 사라지고 대의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로써 우린 더 견고해질 거예요.”

    “…….”

    “권재진은 서의우의 가이드로서, 서의우는 권재진의 에스퍼로서.”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