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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23)화 (23/154)

#23

세상의 온 불이 꺼진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지고 수십 톤의 콘크리트에 깔린 것처럼 손발이 굳었다. 설령 뙤약볕이 작렬하는 사막의 모래 지옥에 빠진대도 이처럼 고통스럽진 않을 터였다.

“아니야.”

권재진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서의우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의 가슴을 밀어 내고 침대 구석으로 도피했다.

“아니라고 너……!”

“…….”

“너 말고…… 난…… 아, 씹…….”

권재진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불 꺼진 침실의 어둠에 표정을 감추고 거칠어진 숨을 헐떡였다. 악몽에서 벗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 얼마간 그렇게 홀로 괴로워했다.

“서의우 씨, 미안합니다…… 잠깐 이상한 악몽을 꿔서.”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재진이 사과부터 내뱉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짙어 침대 맞은편에 있을 서의우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깊은 새벽 어스름에 고요하게 내리쬐는 한 줄기 달빛으로 그의 실루엣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그렇다지만, 새카만 그림자 속 빛나는 그의 두 눈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형형한 안광이 어둠을 뚫고 꿰뚫는 창처럼 권재진을 찔러 왔다. 사냥을 앞둔 야행성 짐승을 마주한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고요? 그건 무슨 뜻인가요.”

서의우가 목소리를 늦추어 물었다.

아래로 침착하게 내리깔린 음성이 고성을 윽박지르는 것보다 수십 배는 위험하게 들렸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길래 그래요. 재진 씨답지 않게 흥분해서는……. 많이 놀란 것 같은데.”

“…….”

“꿈에서 누가…… 죽기라도 했어요? 나 말고?”

서의우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가까이 오라는 듯 베개 옆을 두드렸다. 권재진은 그에게로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침대 가에 굳어 있었다.

“괜찮아요. 이번엔 귀찮게 굴려는 거 아니에요. 재진 씨 위로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응?”

서의우가 계속 베개를 팡팡거리다가 손을 멈추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의 눈빛이 슬며시 번뜩이다가 차츰 가라앉았다. 섬찟하게 느껴지던 낌새가 갈무리되어 잔잔해지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게 억눌렸다.

“정말인데. 나도 평생 잠 설쳐 봐서 그 심정 꽤 잘 알아요.”

“…….”

“아니면 약 줄까요? 수면제 종류별로 많은데. 술도 있어요. 그것도 종류별로 많고.”

“아…… 아닙니다……. 안 먹어도 됩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재진이 슬그머니 자신의 베개로 돌아가 머리를 대고 누웠다. 서의우를 등진 자세였다.

“서의우 씨…… 약이고 술이고 그런 건 몸에 나쁩니다. 다 갖다 버리세요.”

뒤따라 누운 서의우가 자연스럽게 재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럴까요. 버려도 되나.”

“…….”

“이제 내겐 재진 씨가 있으니까, 버려도 되는 건가…….”

권재진은 대답하지 않고 도로 잠을 청하는 척 눈을 감았다. 느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아무 일 아닌 것처럼 태연한 내색을 했다.

괜한 생각을 해서 헛꿈을 꾼 것뿐이고, 자고 일어나면 싹 잊어버릴 거라고 반복해 되뇌었다.

그렇지만, 꿈속에서 들린 서의우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죽을 예정이던 사람이 살게 되었는데, 다른 예정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일까요?>

<서의우가 아직도 권재진 씨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꿈속 서의우의 목소리에 뒤이어 현실 속 서의우의 목소리도 겹쳐졌다.

<말끔히 잊어버리는 게 나을 거예요.>

<운 좋게 억지로 재회한다 하더라도…… 예전 같지 않을 테니까요.>

어느 순간부터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다.

똑같은 서의우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권재진이 두 눈을 꽉 내리감고 이불을 세게 움켜쥐었다.

서의우가 끌어안고 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몸이 차갑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디선가 찬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세찬 북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안일하게 눈속임해 왔던 겉 포장이 날뛰는 바람에 날아가고 깨닫고 싶지 않은 불길한 진실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냈다. 두려운 현실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외면하고 싶지만, 더는 외면할 수 없는 깨우침이 권재진을 갈기갈기 찢고 뒤흔들었다.

***

아침. 권재진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서의우도 엇비슷하게 불면을 겪었는지 새벽 내내 등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만, 권재진은 일부러 모르는 척 내버려 두었다.

솔직한 말로 말하자면, 도저히 서의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밤을 지새우며 끈질기게 고민한 결론이 드디어 하나로 도출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멍청한 건 나였어.’

비척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권재진이 주방으로 향했다. 유리잔에 냉수를 가득 채워 마시면서 속으로 연신 헛웃음을 삼켰다.

‘서의우가 아니라 내가 멍청이였다고…….’

불길한 진실. 두려운 현실. 외면하고픈 결론.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권재진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예정된 미래를 바꾸는 것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미래를 바꾸는 것.

2회차 인생이 1회차와 달라지도록 바꾸는 것.

‘죽어야 할 사람이 살 정도로 정해진 궤도가 틀어진다면 그 외 나머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자그만 나비의 날갯짓 하나로도 먼 곳에서 태풍을 일으킬 수 있듯, 권재진의 생존이 미래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 몰랐다.

지난 1회차에서 벌어졌던 일이 2회차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수 있고, 1회차에서 없던 사건이 2회차에서 새롭게 일어날 수도 있다.

도미노처럼 죄다 어그러지는 거다.

‘다시 말해, 서의우가 내게 품었던 연애 감정도……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겠지.’

그가 권재진에게 고백했던 미래도 달라질지 모른다.

권재진을 집착적으로 옭아맸던 것, 갈구했던 것, 스스로 저지른 과오를 후회했던 것, 뉘우치고 반성하며 깨달았던 것, 마음을 깨닫고 부딪혀 왔던 것…… 그 모든 예정되어 있던 미래가.

‘모조리 뒤집힌다면…….’

아니, 이미 뒤집혔다면……?

‘내가 바꿔 버린 거다. 전부.’

이는 처음부터 권재진이 뜻했던 결과다.

서의우와 전쟁하지 않고, 가이딩에 순응하여 불필요하게 버려질 시간을 단숨에 단축했다. 그를 설득하고 인내하여 고생 없이 빠르고 간단하게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판단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권재진이 건너뛰어 버린 그 시간은 사실 서의우와 권재진 두 사람이 함께 쌓아 온 애증의 시간이었다.

4년간, 그들은 서로를 대상으로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감정을 느꼈고, 피할 수 없는 냉엄한 딜레마 속에서 그 감정들을 억지로 계속 삼키고 소화하며 앞으로 나아가 왔다.

서의우는 권재진에게 절박함과 절실함, 도를 지나친 집착과 강압, 충동, 격정, 욕정, 그리고 후회, 반성, 겸허함, 미안함, 슬픔, 괴로움, 외로움을 느꼈다.

권재진은 서의우에게 부정, 분노, 증오, 역겨움, 답답함, 한스러움, 허탈함, 타협, 체념, 우울, 기막힘, 수용, 안쓰러움, 가여움, 이해, 포용, 너그러움, 해방감, 그리고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관계의 정립을 느꼈다.

이런 감정을 다 뛰어넘고서, 그래 놓고서,

‘어떻게 서의우가 날 예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대할 거라 자만했던 거지……? 대체 무슨 판단으로……?’

어쩌면 권재진이 여태껏 해 온 모든 노력이 서의우에게서 멀어지는 지름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도망치려 하지 않은 것.

조건부지만 순순히 가이딩 해 준 것.

서의우를 의우야라고 부른 것.

재우고 먹이려 한 것.

그리고…… 가르마 방향을 반대쪽으로 바꾸어 놓으려 한 것마저도.

권재진은 서의우를 처음부터 끝까지 1회차와 다르게 대했다. 그랬던 주제에 정작 서의우는 1회차 서의우와 똑같아지길 바랐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모순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권재진이 바꿔 놓은 미래는 그 자신이 생존하는 미래일뿐더러, 권재진의 서의우가 사라진 미래이기도 했다.

권재진이 회귀한 탓에,

권재진이 살아남으려 애쓴 탓에,

서의우를 잃었다.

‘……난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서의우의 말대로, 미련을 버리고, 말끔히 잊어야 하는 건가……?’

연인 관계가 아니라, 에스퍼와 가이드 관계로, 그냥 그렇게…… 담백하게……?

‘…….’

오랫동안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재진의 눈빛이 어느 한순간 휙 돌변했다. 까만 눈동자가 매섭게 희번덕거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부르르 떤 재진이 두 손바닥에 고개를 푹 처박았다.

마른세수하고서는 눈앞에 놓인 물잔을 집어다 화풀이하듯 멀찍이 내던졌다. 카펫 깔린 마룻바닥에 요란하게 부딪혀 깨질까 싶었지만, 던져진 물잔은 땅에 닿기 직전 허공에 멈추었다.

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떠오른다.

……서의우가 붙잡았겠지.

권재진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나른한 놈의 속삭임이 들렸다.

“재진 씨 왜 그래요, 화났어요?”

서의우가 탄창에 총알을 채우며 느긋하게 걸어왔다.

투명한 유리잔이 서의우에게 복종하듯 그의 앞으로 날아가 멈추었고, 서의우는 속에 담긴 냉수를 한 모금 마시며 미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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