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기가 크게 진동했다.
서의우가 뜻하지 않아도 내뿜는 힘이 공기를 찢고 침실 전체에 퍼졌다. 보이지 않는 중력이 더해진 것 같다. 몸이 짓눌리듯 위압당하고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재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쥐나 새들이 먼저 이변을 알아차리고 떼 지어 도망치는 것처럼, 권재진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렇지만 권재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으, 윽. 서의우 씨가 제게 원하는 가이딩은 점막 접촉이죠. 혀 빨고 좆 박는 거…… 일반인들은 그런 행위…… 아무렇게나 막 할 수 없습니다. 좋아야 하는 거라고요.”
그런 재진을 서의우가 수갑을 세게 틀어쥐고서 뚫어지게 응시했다. 메마른 잿빛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아 그의 심연을 드러내었다.
“알았어요. 싫은 건 잘 알겠다고요. 그러니까 나도 억지로라도 묶어 두려는 거잖아요, 지금. 난 재진 씨가 필요하고 가이딩도…….”
스무 해를 굶주린 에스퍼라는 생물은 당장 제 허기를 채우기 급급해 판단이 흐려지고 이성을 놓은 상태였다. 그의 본능이 당장 권재진을 사슬로 동여매고 범하라며 시끄럽게 외쳐 댔다. 권재진의 피부에 닿고, 점막에 닿고, 온몸을 남김없이 핥아 먹은 후에야 비로소 제정신이 들 터다.
하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니라 태양이다.
권재진이 떨리는 손으로 서의우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챱, 소리 나게 쳤다. 인심 쓰는 김에 혀도 한번 빨아 줄까 하다가 그건 그냥 관뒀다. 대신에 서의우의 허리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그러니까, 필요하면, 제가 서의우 씨를 좀 좋아하게끔 만들어 보세요.”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저를, 꼬셔 보라고요.”
***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서의우도 출근을 한다.
각성자를 관리, 감독, 교육, 파견하는 정부 기관인 센터에 정기적으로 훈련을 간다.
고작 주 2회뿐이지만.
S급 에스퍼인 그는 보다 낮은 등급의 에스퍼들과 호흡을 맞출 필요가 없어 단체 훈련에 매진하지 않는다. 대신 비상 상황에 울리는 긴급 호출에 대응해야 했다.
예를 들어, 경계 벽에 크리처 무리가 출몰했다든가 개척 지구에 게이트가 발생했다든가 하는 경우 서의우는 그 즉시 좌표 이동으로 날아가야만 한다.
그건 24시 언제 터질지 모를 재난에 계속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응급실 의사나 소방관, 경찰서처럼.
어떤 때는 보름 넘게 아무 호출이 오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호출받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 주는, 서의우에게 몹시 바쁜 주였다.
‘차라리 다행인가?’
서의우가 없는 집은 권재진의 낙원이 된다.
재진은 특송으로 날아온 식재료를 먼저 골라 주방으로 옮겼다. 다른 택배도 가득 쌓여 있긴 하지만, 식재료는 상온에 두면 상하니까.
배송품 포장을 뜯고 보냉재를 제거한 뒤 신선식품부터 차곡차곡 냉장고에 수납해 갔다. 소갈비가 참 질이 좋다.
‘갈비찜이나 끓여 둘까. 감자 큼직하게 썰어 넣어서.’
재진이 애착 식칼로 버섯, 감자, 양파, 당근 등을 썰며 고기 핏물을 뺐다. 커다란 냄비에 1차로 고기만 먼저 데친 뒤, 불순물을 제거하고 남은 재료를 다 때려 박았다. 간장, 마늘, 생강, 설탕, 맛술로 간을 하고 팔팔 끓이면 끝이다.
한창 요리 중인데 멀찍이서 플래시 터지듯 하얀빛이 퍼졌다. 작은 빛 방울을 남기고서 사그라진다. 순간 좌표 이동의 흔적. 그새 서의우가 돌아온 모양이다.
“또 음식 냄새. 재진 씨는 항상 주방에만 있네요.”
무균이동실에서 나온 즉시 서의우가 권재진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이걸 주인 따르는 개새끼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감춰 둔 먹잇감 빼 먹으러 오는 개새끼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겠지. 권재진은 지금 서의우의 맛 좋은 뼈다귀일 뿐일 테고.
서의우가 권재진의 허리에 팔을 감고 뒷덜미를 핥았다. 오싹하니 솜털이 돋고 발끝부터 허리 아래까지 긴장되지만, 재진은 내색하지 않으며 요리에 열중했다.
“불 앞에서 건드리지 마십시오. 지금 제 손에 칼 들린 거 안 보입니까.”
“보여요. 잘 보이네요.”
“이걸로 내가 몇…… 아닙니다. 모처럼 때맞춰 왔으니 갈비찜 간이나 맞는지 좀 보세요.”
재진이 집게로 잘 익은 갈비 살코기를 떼어 서의우의 입 앞에 내밀었다. 서의우는 아무 반응 없이 눈매를 나른하게 휘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반지르르한 회색 눈동자엔 식욕이 일절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아. 아직 때가 아닌가.”
재진이 중얼거리며 집게를 돌렸다. 살코기를 자신의 입에 넣고 씹어 보니 딱 알맞게 익었다. 조금만 더 끓여서 간을 배게 하면 될 것 같았다.
“때? 무슨 때요?”
“서의우 씨 밥 먹는 때 말입니다.”
“저는 그런 때 없어요. 음식물 섭취 잘 안 해요.”
“예, 그러니까 아직이라고.”
안 먹는다니까. 서의우가 빙긋 웃으며 재진의 귀를 물었다. 자근자근 씹으며 난 이거 먹을래요, 라고 뭉그러진 말을 뱉었다. 재진이 성가시다는 듯 귀를 털어 냈다.
“그 쫌. 치우세요. 요리 좀 합시다.”
“나중에 하고. 가이딩부터 해요. 나한테 좋은 방법이 떠올랐거든요.”
“서의우 씬 쫄쫄 굶는 게 좋은지 몰라도 전 밥을 먹어야 합니다. 계속 굶으면 죽어요.”
“힐링 팩터 쓰면 되는데…….”
“내가 그 소리 왜 안 하나 했습니다. 싫으니까 얌전히 기다리기나 하세요. 기다릴 동안 할 일 없으면 저기 현관에 택배 잔뜩 쌓여 있으니 그거나 좀 날라 주시든가요. 2층 방으로다가 좀.”
“2층이요?”
“제일 채광 좋고 넓은 가운데 방 있잖아요. 그거 제 방으로 쓸 겁니다. 짐 옮겨 주십시오.”
“아아…… 네, 뭐 상관은 없는데요…….”
서의우가 재진의 턱을 잡아 쥐고 입술을 맞췄다. 혀를 깊게 맞물려 젖은 살덩이를 느른하게 빨았다. 얼마간 그러고 있자 갈비찜 냄비가 금세라도 끓어 넘칠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권재진이 애착 식칼 끄트머리로 서의우의 가슴팍을 쿡 밀었다. 서의우는 피하지도 않고 칼끝이 제 몸을 찌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능으로 만든 보호막을 겹쳐 두른 그의 육체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짐. 옮겨 달라니까.”
“응, 지금 전부 옮겨 주고 있어요. 근데 이건 뭐예요?”
갑자기 거실 한복판에서 박스 포장 뜯기는 소리가 났다. 권재진과 서의우는 모두 주방에 있지만, 서의우가 염동력으로 택배를 옮기다 말고 상자 하나를 뜯어 버렸는지 그 소리는 거실에서부터 들려왔다.
“오토바이?”
서의우가 두 눈을 고요하게 내리깔고 재진을 내려다보았다.
갈비찜 냄비는 여전히 시끄럽게 끓어 넘치는 소리가 났다.
“이거 타고, 어디 가게요?”
“가긴 어딜 간다고요.”
“내가 싫어서, 나한테서 도망가려고요, 멀리?”
권재진이 팔을 뻗어 가스 불을 끄려 했다. 팔이 닿지 않았다. 서의우가 몸을 단단히 껴안고 있어 무게 중심을 움직일 수 없었다.
“관상용입니다. 디자인 마음에 들어서 샀어요. 애초에 연료도 없어 시동도 못 겁니다.”
“연료 있던데요? 휘발유.”
“아, 그렇습니까? 따로 시킨 적 없습니다만. 구성품인가…….”
“…….”
서의우의 눈이 점점 가느스름해지더니만 결국 가자미눈을 떴다.
이번엔 거실에서 박스 찢기는 소리가 아니라 강철 합판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재진이 성가시다는 듯 투덜댔다.
“제 물건 망가뜨리지 마십시오. 안 나가. 집 밖에 안 나간다니까.”
“정말요? 수갑 안 묶어도 되겠어요? 한 번은 넘어가도 두 번은 못 봐줘요, 나.”
“아니 그럼 도망갈 사람이 태평하게 요리나 하고 있겠습니까? 물건을 저렇게 잔뜩 사고? 의심하기 전에 저를 좀 보십시오.”
“으음…….”
“눈은 똑바로 뜨시고요. 그러고 쳐다보면 뭐 귀엽게라도 보이는 줄 아십니까?”
사실 좀 귀엽게 보이긴 한다.
조화로운 이목구비와 희고 수려한 낯짝을 가지고 저러니 얼굴이 꽤 재밌었다. 역시 잘생기면 뭘 해도 재밌나 보다.
“……그래서, 재진 씨는 요리하고 쇼핑을 좋아하나요?”
“예?”
“나더러 재진 씨 꼬시라면서요. 권재진 씨가 뭘 싫어하는지는 잘 알겠는데, 뭘 좋아하는지는 아직 전혀 모르겠어서.”
“아…… 예, 뭐.”
“잘못 짚었나……. 좋아하는 게 있긴 해요?”
“잘 찾아보면 있긴 합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
서의우가 새 부리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더니 가스 불이 저절로 꺼졌다. 서의우가 껐겠지.
서의우가 권재진의 뺨과 코끝, 그리고 눈꺼풀에 연이어 뽀뽀했다. 권재진의 검은 속눈썹 한 가닥이 그의 아랫입술에 달라붙었다. 휘파람 불 듯 입김을 뱉어 속눈썹을 털어 낸 서의우가 대뜸 물었다.
“의우야, 해 봐요.”
“뭐요?”
“의우야. 그렇게 불러 보라고요.”
권재진은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뱉었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위협인 줄 알면서도 애착 식칼로 서의우의 가슴팍 군데군데를 쿡쿡 찔렀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는데, 짐 다 옮겼으면 비키십시오. 저 밥 먹을 겁니다.”
“가만 보면 재진 씨 참 이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