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제 식재료만 사면 되려나.’
재진은 배송 가능한 백화점 온라인 식품관 사이트에 접속해서 프리미엄 식재를 능숙하게 골랐다. 요리를 안 해 먹는 서의우 때문에 1회차에서도 장보기 및 식사 준비는 권재진의 담당이었다.
캐비어. 트러플. 투쁠러스 등급 한우 갈비. 전복. 대게. 바닷가재.
그걸로 모자라 명품 선물관에 들어가 참다랑어 뱃살 세트와 영광 굴비 세트, 인삼 장인 보증 13년근 수삼 세트까지 샀다.
결제를 마치고 히죽히죽 웃고 있으려니 언제 깼는지 서의우가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뭐 좀 샀어요?”
그가 몽롱한 회색 눈동자를 들어 태블릿 화면을 힐긋 보았다. 재진은 화면을 꺼 버렸다.
“그냥 적당히. 배송 오면 알 겁니다.”
서의우가 고분고분 고갤 끄덕였다. 이 새끼는 권재진이 땅을 사든 집을 사든 관심도 없을 터였다. 가이딩만 해 주면 그만이겠지.
“서의우 씨는 잔다더니 벌써 깼습니까?”
“아, 그게…….”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던 서의우가 고갤 뻗어 재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두어 번 소리 내어 키스하곤 뒷맛을 보듯 혀를 내어 자기 아랫입술을 핥았다.
“…….”
“뭡니까 또.”
“그냥…… 너무 좋아서요.”
“예?”
“잠드는 게요. 내가 이렇게 푹 잘 수 있다는 게…… 너무 갑자기 그래서 좀 무서워졌어요.”
“…….”
“사람들은 누구나 잠들 때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요? 눈 감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불안해요. 침대가 이렇게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좀 이상하고요.”
서의우가 나른하게 속살거렸다.
느긋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지만, 권재진은 그의 동공에 날 선 긴장이 스쳤다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요. 센터 훈련소에서 단체 생활을 하잖아요? 그러면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곳에 누워서 자야 하는데, 난 그게 참…….”
고문 같았겠지.
성장기인 서의우의 몸에 비해 한참 좁다란 닭장 같은 3층 침대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불을 켜거나 뒤척거려 다른 동료들 수면을 방해할 수도 없고, 캄캄한 어둠에 홀로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만 했겠지.
“음, 아니다. 별 얘기 아니에요.”
서의우가 담백하게 고갤 저으며 말을 끊어 냈다. 권재진은 상체를 일으켜 서의우의 눈을 가까이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어째서 이 간단한 걸 놓치고 있던 걸까.’
S급 에스퍼 서의우는 만성 가이딩 부족으로 심한 불균형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불면이다.
‘전제부터가 틀렸군. 가이딩만 해 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어.’
더 근본적인 원흉은 그의 불균형에 숨어 있었다.
‘사람이 잠을 못 자는데 어떻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겠냐고. 그야 당연히 누구라도 눈이 돌겠지…….’
서의우가 미친놈처럼 구는 건 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서다.
잠만 푹 자게 되더라도 서의우는 지금보다 한결 말귀가 통하게 될 터.
실제로 권재진의 1회차 인생을 돌이켜 보니, 서의우가 제대로 수면을 취하게 되는 시점부터 좀 인간다워졌던 것 같았다. 그만큼 권재진에게 더 집착하게 되었던 것도 같지만…….
‘애를 제대로 재워야 해.’
당장 굵직하게 떠오르는 그의 불균형은 총 3가지다.
그리고 그중 첫 번째가 바로 불면이고. 나머지는 차례로 해결하면 된다.
‘푹 재워서 제정신으로 돌려놓는 거다.’
깨달음을 얻은 권재진이 새까만 눈동자로 서의우를 직시했다. 흔들림 없이 단단하고 고요한 눈이었다.
옅은 긴장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기분 좋은 고양감이 느껴진다.
‘그래, 이것 봐라. 우리 애가 나쁜 애는 아니라고. 좀 극단적인 구석이 있어 그렇지.’
바로 그때, 서의우에게로 웬 커다란 종이봉투 하나가 날아왔다.
서의우가 부스럭대며 안에 든 내용물을 하나씩 꺼냈다. 물건이 드러날수록 권재진의 낯빛이 점차 바뀌어 갔다.
수갑에,
사슬에,
재갈에,
카테터에,
소변줄…….
기가 막힌다.
권재진이 헛웃음을 뱉었다. 기절한 틈에 마련해 온 건가? 너무 어이가 없으려니 화가 나지도 않았다. 정녕 2회차에서도 수갑 논쟁을 벗어날 수 없는 건가 싶어 골이 아플 뿐이었다.
‘하…… 말도 안 돼. 왜 또 이 지경인데.’
황당하다.
권재진은 가이딩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서의우의 집에서 탈출하려고 온갖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창문을 깨부수려 총질해 대지도 않았고, 기습처럼 뛰어나가 서의우를 칼로 찌르려 하지도 않았다. 그가 자는 사이에 목을 조르지도 않았고……. 그랬는데…… 왜.
‘설마, 내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바꿀 수도 없다는 건가?’
권재진이 눈가를 찌푸리며 바닥을 내려 봤다.
발을 받치고 있는 바닥이 무너져 내리며 새카만 어둠으로 떠밀린 것 같다.
‘정말 미래가 변하지 않는 거라면…… 난 또 4년 뒤에 죽는다고? 허망하게?’
그럴 순 없다.
권재진이 파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씨근덕거리며 서의우를 강하게 쏘아보았다.
“서의우 씨, 지금 그…… 뭐 하자는 겁니까?”
은빛 수갑을 든 서의우가 말간 눈으로 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주변 공기가 일렁거리며 흔들렸다.
“뭐긴요. 보다시피요. ……역시 묶이는 건 싫은가요? 기분 나빠요?”
“그런 게 좋으면 정상은 아니겠죠. 싫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어요. 가이딩 해 주겠다더니 갑자기 혀나 깨물고……. 그러니까 너무, 무섭잖아요, 제가.”
“서의우 씨가 뭐가 무섭다는 겁니까. 무서워도 제가 무서워야지.”
“재진 씨 죽으면 어떡해요.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번에…… 아니면 그 다음번에라도 성공해서 숨이 끊어지면……. 그럴 바엔, 차라리.”
혼잣말하듯 고요하게 읊조린 서의우가 서슬 퍼런 눈으로 재진을 바라보았다. 권재진이 서의우를 어찌 조련해야 할지 난감한 것처럼, 서의우도 권재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뇌가 깊은 모양이었다.
“그건 서의우 씨가 먼저 잘못한 겁니다.”
재진이 엷은 한숨을 내쉬며 빠른 속도로 중얼거렸다.
“제가 내건 조건 안 지키셨잖습니까. 아픈 건 싫다고 말했는데 토할 때까지 목구멍에 처박았고, 풀어 주지도 않은 뒷구멍에 또 박아 대려 하고.”
“난 그냥 가이딩이 필요했던 것뿐이에요. 애초에 그 터무니없는 두 번째 조건에 동의한 적도 없고.”
“저도 그냥 홧김에 혀 깨물어 본 거지, 딱히 죽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힐링 팩터로 고쳐 둘 거 다 알았고. 이렇게라도 해야 서의우 씨가 제 말을 들을 것 같았으니까.”
재진이 아직도 감각이 둔한 혀를 움직여 최대한 분명하게 문장을 구사했다. 당장 서의우가 권재진의 해명을 믿든 말든, 잘못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보세요, 서의우 씨는 최초의 S급 에스퍼죠. 에스퍼들 중에서도 최상위 이능을 지녔습니다.”
“그래서요?”
“그러니 서의우 씨는 출생 직후 각성자 판정 받은 이래로 사람 상대하는 일에 난항을 겪은 적이 없을 겁니다.”
그의 수준에 도달하는 가이드를 찾지 못해 괴롭기야 했겠지만, 그건 가이딩 부족으로 인한 괴로움일 뿐. 인간관계 문제는 또 다르니까.
“누구도 당신의 적수가 될 수 없고, 누구도 당신을 거스르지 못했겠죠. 모두가 당신에게 호감을 품고, 경외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했을 거라고요. 그래서 서의우 씨는 스무 살 먹도록 애새끼인 겁니다.”
“애새…… 뭐?”
“지금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의우가 혼란스러운 눈을 깜빡였다. 권재진은 그의 반질반질한 회색 눈동자를 안쓰럽고 가엽게 쳐다보며 가르침을 주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제게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하십시오.”
“…….”
“아양을 떨든, 애교를 부리든, 제가 원하는 걸 들어줘서 환심을 사란 말입니다!”
저깟 수갑? 재갈?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권재진이 여태 그런 것에 얽매여 있었다면 1회차 인생에서 서의우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도 않았을 터. 나중에는 서의우도 제 잘못을 깨우치고 후회하기도 했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기에 까짓 괜찮았다. 1회차에서 그랬듯, 2회차에서도 대범하게 넘어가 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서의우 씨가 원하면 가이드들이 순순히 다리를 벌렸겠죠. 구멍 찢어지든 말든 눈 하나 깜짝 않고 대 줬을 겁니다. 근데 저는요? 보다시피 일반인 출신 반쪽짜리 돌연변이 가이드라서 그렇겐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
“아픈 건 싫고, 다치는 것도 싫고, 도구처럼 험하게 다뤄지는 것도 싫고, 제 의사 무시하고 서의우 씨 좆대로 구는 것도 싫습니다.”
“그러니까, 재진 씨 말은…… 가이딩이 싫다는 거네요. 그 얘기를 이렇게 돌려서 할 필요가 있나요? 뻔히 드러난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