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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 길들이기 (10)화 (10/154)
  • #10

    권재진이 정액 범벅에 지저분한 혀를 길게 뺐다. 그러곤 턱에 온 힘을 실어 혀를 콱 깨물었다. 힐링 팩터로 온갖 것을 치료할 수 있으니 이런다고 죽지는 않을 터였다.

    권재진은 다만, 서의우에게 똑똑히 알려 주고 싶을 따름이었다.

    ‘지금 아쉬운 게 누군데.’

    한껏 깨문 혓바닥이 너덜거렸다.

    권재진이 입에 고인 핏물을 울컥 뱉어 내자 아니나 다를까 서의우의 안색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왜…… 갑자기 왜 그래요, 일반인은 다치는 게 싫다면서요.”

    선혈이 새하얀 시트에 스며들어 시뻘건 자국으로 남았다.

    서의우가 혼란스러운 눈을 깜빡였다. 재진의 행동이 퍽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깟 혀 토막 좀 잘리는 게 놀랍다는 소리가 아니라, 여태 아픈 것이 싫다는 둥 사살당하긴 싫으니 가이딩 하겠다는 둥 나약한 모습만 보였던 권재진이 돌변하니 당혹스러운 눈치다.

    가슴 포켓에서 힐링 팩터를 꺼낸 서의우가 재진의 핏줄에 주사했다. 권재진은 가물거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몸이 기우는 대로 엎어져 침대에 고개를 처박았다.

    온 힘을 다해 깨문 혓바닥이 상상 이상으로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괴롭다.

    권재진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곤 어깨를 들썩대며 쿨럭쿨럭 기침해 댔다. 재진이 기침할 때마다 분무기처럼 핏방울이 튀었다.

    ***

    딱딱하게 말라붙은 눈꺼풀을 억지로 떴다. 아침 햇살 비치는 새하얀 침대였다.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보려니 옆구리를 단단히 붙든 팔뚝이 방해였다. 서의우가 재진을 껴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

    몇 차례 눈을 끔뻑이던 재진이 편한 자세를 찾아 서의우의 가슴팍을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익숙하고 알맞은 체온에 안정감을 느끼며 편안히 품에 기대었다. 그렇게 끌어안고서 얼마간 잠에 취해 있다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의우야, 나 물…….”

    권재진이 흠칫 굳었다.

    혀뿌리부터 혀끝까지 마취당한 것처럼 지끈지끈하고 감각이 둔했다.

    반사적으로 다시 혓바닥을 움직여 보니 퉁퉁 부어 있고, 발음도 좀 뭉그러져 나왔다.

    뒤늦게 정신이 든다.

    ‘아.’

    순간, 모든 일이 꿈인 줄 알았다.

    죽은 것도, 회귀한 것도 전부 없던 일이고, 4년 후의 그때 그대로 자신을 기억하는 서의우와 함께인 줄 착각했다.

    ‘하…… 그랬지…….’

    권재진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어지럽게 얽힌 기억을 차례로 정렬해 보니 마지막으로 혀를 깨물어 자해했던 것이 떠올랐다. 2회차서는 가이딩을 거부하지 않고 순응해 주려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 오케이. 알겠다.’

    조련이란 어려운 거군.

    ‘서의우를 너무 오냐오냐해서도 안 된다는 거지. 그래. 알겠다고.’

    솔직히, 그전까진 권재진이 순순히 서의우의 가이드가 되어 주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가이딩을 거부하지 않고, 탈출 시도하지도 않고, 서의우와 싸우지만 않으면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다.

    ‘내가 너무 낙관적이었군…….’

    서의우란 이름의 짐승은 적절한 당근과 채찍을 섞어 써야 하는 생물인가 보다.

    해 달란 가이딩 좋다고 해 줬더니 한순간에 스스로 혀나 깨무는 처지가 되다니. 재진은 그저 통탄할 따름이었다.

    ‘가이딩을 거부하지 않고 해 주긴 해 주되, 그렇다고 너무 서의우에게 휘둘리고 얕보이면 그것도 안 된다는 것인가.’

    깊은 깨달음을 얻은 권재진이 눈꺼풀을 도로 내리감으며 탄식했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건지.

    개새끼가 개새끼 짓을 한다고 똑같이 맞서 지랄하고 싸우면 3년을 허비하고,

    우리 애 하고 싶은 거 맘껏 하라고 개짓거리 허용해 주면 당하는 권재진만 고통스럽다.

    아무리 4년 뒤 죽을 미래가 두렵다지만, 그렇대도 서의우가 구멍 찢을 때마다 참아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훗날을 위해서라도 버릇을 고쳐 놔야지.

    ‘결국, 당근과 채찍 사이에서 적절한 선을 찾아야 하는 건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아, 젠장…….’

    일단, 냉수나 한잔 들이켜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지금은 목만 타고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재진이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서의우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서의우 씨. 이 팔 좀 치워 보십시오.”

    “므으.”

    서의우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웅얼대며 더 심하게 달라붙었다. 허리가 졸려서 숨이 막혔다.

    하여튼 힘은 세 가지고.

    물 생각이 간절했다만 꼼짝없이 붙들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재진은 일어나길 포기하고 도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다행히 서의우가 청소해 두었는지 권재진이 토해 놨던 피나 기타 오물도 말끔히 치워졌고 시트도 새것이었다. 피 묻은 얼굴이나 더러워진 입도 찝찝하지 않았다. 온몸까지 쾌적하다. 아예 물로 싹 목욕시켜 준 모양이다.

    재진은 멍하니 유리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서의우에게로 시선을 내리뜨렸다.

    1회차 권재진이었다면, 지금쯤 서의우를 향한 증오와 불신, 수치스러움, 모멸감 따위 감정으로 머리가 불타는 듯 뜨거웠겠지만, 2회차 권재진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때 뜬금없지만, 이 모든 게 정말 꿈은 아닐까, 다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없던 일이 되진 않을까, 그런 뜬구름 잡는 생각을 했다.

    ‘서의우……. 넌 속 편해서 좋겠다. 가이딩만 받아 내면 그만일 테니.’

    눈앞에 제비집처럼 헝클어진 서의우의 곱슬 머리카락이 보였다.

    투명한 흑발 끄트머리가 아침 햇살을 받아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각도를 바꿔 바라보면 색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권재진이 느슨하게 힘을 푼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왼쪽으로 난 가르마를 따라서 쓰다듬다가 머리카락 뿌리에 손빗을 넣어서 반대 방향으로 새로이 가르마를 타 주었다.

    이로써 나름의 구분이 될 것 같았다.

    다시는 헷갈리지 않겠지.

    꿈을 꾼 거라 착각하지도 않을 테고.

    가르마 방향만 보더라도 눈앞의 서의우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1회차와 2회차 서의우를 구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만, 딱히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그럴 기력이 없었다. 알게 모르게 정신적인 피로가 쌓여 있는지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으응…… 깼어요?”

    그즈음 서의우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재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기분 좋은지 살짝 웃는 낯이었다. 권재진은 서의우의 뺨을 세게 꼬집고 붙든 팔뚝을 치우라며 턱짓했다.

    턱짓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 척을 하는 건지 서의우는 여전히 끌어안은 몸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멋대로 엉겨 붙으며 권재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하품이나 쩍 했다.

    “좀 비키십시오, 서의우 씨.”

    “네에. 그래요.”

    “무겁습니다.”

    “네에.”

    요지부동이다.

    대답만 꼬박꼬박 잘할 뿐 단 1mm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좀만 더 자요. 나 늦잠 자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잠에 취한 서의우가 권재진의 쇄골에 대고 콧잔등을 비볐다.

    가이딩 부족으로 만성적인 불면에 시달리던 그로서는 이렇게 깊게 잠든 것이 처음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진은 서의우를 떼어 놓기를 포기하고선 순순히 몸을 내줬다.

    직접 일어나는 대신 이 새끼를 부려 먹으면 되니까.

    “계속 그렇게 늘어질 거면 물이나 떠다 주고 늘어지지 그럽니까.”

    “아까 물 달라고 했었죠, 참.”

    “……그거 들었습니까?”

    “네. 의우야, 나 물……. 이랬잖아요?”

    “…….”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권재진이 딴청을 부렸다.

    그걸 또 그새 들었나.

    푹 잠든 줄 알았더니만 자는 척이었나 보다.

    재진이 답이 없자 서의우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 유리잔이 둥둥 떠서 날아왔다. 물이 잔 끝까지 차 있는데도 한 방울도 넘치지 않고 마술처럼 재진의 눈앞에 멈췄다.

    이 저택은 정확히 서의우의 이능이 닿는 범위를 계측해서 지어졌고, 때문에 그는 저택 안이라면 어디서든 이능을 뻗칠 수 있었다. 가뜩이나 편리한 집에 살면서도 더 편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니.

    ‘이러니 애 버릇이 잘못 들지.’

    굳이 손을 뻗을 필요도 없이 염동력에 의해 물잔이 저절로 재진의 입가로 기울어졌다. 권재진은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알아서 넘어오는 물을 꼴딱꼴딱 받아 마셨다. 임무를 마친 빈 물잔이 도로 부엌으로 날아갔다.

    “태블릿하고 카드도.”

    “갖다줘요?”

    “예. 돈지랄 좀 하고 싶네요.”

    곧바로 까만 태블릿과 까만 카드가 날아와 재진의 손에 쥐어졌다. 화면을 켜고 인터넷에 접속한 재진이 뇌리에 떠오르는 명품 브랜드를 아무것이나 검색했다. Y사 공식 홈페이지가 뜬다. 메인 페이지로 들어가 눈에 보이는 품목 전부 닥치는 대로 장바구니에 넣기 시작했다.

    시계. 시계. 신발. 시계. 향수. 가방. 반려견 용품.

    빨간색 강아지 목줄 하나가 이백팔십만 원이었다. 그 옆에 보이는 강아지용 물그릇은 백오십만 원이다. 두 가지 모두 담아 블랙 카드로 일시불 결제하고 다른 명품 브랜드 J사 사이트에 들어갔다.

    스웨터. 트렌치코트. 가방. 벨트. 수영 바지. 모자. 지갑.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 죄다 장바구니에 담고 일시불 결제했다. 이번엔 가격이 얼만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며 칠천만 원짜리 두카티 파니갈레 V4 SP 바이크까지 구매한 뒤에는 꽤 기분이 나아져 있었다. 옆에서 눈을 꼭 감고 색색거리며 고운 숨결을 내뱉는 서의우의 낯짝을 봐도 화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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