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의우가 사귀자고 하면 적당히 그러자고 응해 준 뒤, 애인이란 위치를 이용하여 골수까지 그놈 단물을 빨아먹는 거다.’
S급 에스퍼인 서의우의 전지전능한 이능력.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의우의 수백억대 계좌 잔고.
‘손가락 하나로 그 새끼를 노예처럼 굴려 먹으며 돈이나 펑펑 써 재껴야지.’
1회차 때는 도를 지나치도록 끈질긴 서의우의 집착과 청순하고 예쁜 얼굴에 홀려 어영부영 다 받아 주었지만, 2회차 인생에선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뜯어낼 건 죄다 뜯어내고,
이용할 건 죄다 이용해 먹어서,
4년 후 터질 게이트로부터 살아남고 아쉽지 않은 화려한 2회차 인생을 누려 주리라.
‘음, 이렇게 생각하니 나름 또 기분이 괜찮은 것 같다만……?’
당분간은 서의우가 아무리 정신 나간 또라이 새끼처럼 굴더라도 귀엽게 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서의우는 꽤 귀엽게 생기기도 했다.
‘하아아…… 그래, 까짓 우리 애가 좀 미쳤을 수도 있지. 그게 애 잘못은 아니잖아? 서의우는 뭐 에스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나?’
권재진이 억지로 팔을 안으로 굽혔다.
마음 같아서는 서의우 같은 놈은 우리 집 애 아니고 느그 집 애라며 모른 척 내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 애 편을 들어 주기로 했다.
‘앞으로 내가 잘 타이르고 가르치면 해결돼. 서의우는 습득력도 좋고 머리 회전도 빠르고, 세 수 앞을 내다보는 비범한 새끼니까…… 그 좋은 머리를 쓸데없이 사람 집착하는 곳에만 써 재껴서 그렇지. 타고난 잠재력은 좋다고.’
***
어느 정도 회복을 마친 재진이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몸이 성치 않지만 이쯤이면 적당히 돌아다녀 볼 만했다.
재진은 목에 걸린 넥타이를 죽 잡아당겨 풀면서 여유로운 걸음으로 복도에 나갔다.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이 기억 속 저택 모습 그대로다. 여긴 눈을 감고서도 다닐 수 있다.
권재진은 먼저 침실 옆방의 드레스 룸에 들렀다. 천장 센서 등이 자동으로 움직임을 인식하여 내부가 환하게 밝아졌다. 깔끔하게 닫혀 있던 수납장 문들도 일제히 열리며 위로 올라갔다.
맨 먼저 보이는 건 거대한 유리 장이다. 각종 무기가 잔뜩 나열된 유리 장.
영화 속 특수 요원의 은신처처럼 총기류와 칼, 수류탄 같은 손질된 무기류가 각을 맞춰 깔끔하게 걸려 있다. 권재진은 무기 선반을 대충 흘깃 쳐다보고는 옆으로 지나쳤다. 집에서 입을 만한 일상복과 속옷은 더 안쪽 선반에 있다.
대충 필요한 옷가지를 챙기고 드레스 룸에서 나오자 들어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센서 등이 반응해 자동으로 조명이 꺼지고 수납장이 닫혔다. 참 편리한 집이다. 익숙해지면 게을러진다.
재진이 길게 하품하며 다음 장소로 향했다. 찝찝한 몸을 좀 씻어야겠으니 이번 목적지는 욕실이었다.
대저택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욕실만 해도 여럿이었다. 수영장이 딸린 곳도 있고 자쿠지가 딸린 곳도 있다. 씻을 수만 있으면 어디여도 상관없지만, 기분이 썩 더러우니 가장 호화스러운 욕실을 택해야겠다.
재진은 거실까지 걸어가 상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위로 올라갔다. 참고로 이 집엔 엘리베이터만 세 대였다. 사람용, 화물용, 비상용 이랬던가.
순식간에 상층에 도착한 재진이 계단에 올라섰다. 꼭대기 층 욕실은 전망이 좋다. 바다를 발아래 둔 것처럼 바깥을 내려다보며 뜨거운 물 채운 욕조에 몸을 뉘면 제법 심신에 도움이 된다.
권재진은 욕조에 물을 채우면서 벽면에 붙은 거대 모니터를 켰다. 뉴스 채널을 틀어 놓고 거울 아래쪽에 숨겨진 손잡이를 당겼다. 마감이 깔끔해서 티가 안 나지만 여기엔 와인 셀러가 매립되어 있다.
적당히 손에 집히는 대로 와인 하나를 골라서 욕조에 몸을 담갔다. 찢어진 셔츠는 진작 벗어서 빨래용 통로에 던져 놨다. 세탁실까지 연결된 빨래 통로에 세탁물을 넣으면 자동으로 분류되어 세탁과 건조가 끝난다. 역시 이 집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재진이 병째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맛은 모르겠다. 비싼 술은 4년을 마셨어도 구분이 잘 안된다. 그냥 기분이다. 어쨌거나 재진은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흰색 반소매 티와 회색 면바지로.
서의우의 옷은 재진에게 살짝 컸다. 소매가 벙벙하고 바짓단이 바닥에 조금 닿을 정도다. 권재진도 체격이 좋지만 서의우는 더 좋아서 그렇다. 게다가 재진이 알기로 그 녀석은 앞으로 4년 동안 더 자란다.
말끔해진 재진이 로션을 바르고 수건으로 머리를 탁탁 털며 밖으로 나왔다. 남은 로션은 주머니에 챙겨 뒀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층으로 간다. 이번 목적지는 주방이었다. 빈속에 와인을 때려 마셨더니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뭐라도 주워 먹어야지.
이곳 주방은 설비가 호텔급이다. 화구도 8개짜리고 오븐도 용도별로 갖춰져 있다. 빌트인 냉장고도 3대나 있고 조리 도구도 최신식, 최고급, 하여튼 뭐든 비싸고 좋다. 하지만 서의우는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른다. 이 주방은 내내 방치당하고만 있었다.
재진이 조리대 하부 장을 열어 식칼을 찾았다. 잘 벼려진 칼이 차곡차곡 수납되어 있다. 그중에 권재진의 애착 식칼이 보인다. 몇 년을 함께했더니 전우 같은 녀석이다.
애착 식칼을 도마에 올려 두고 이번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있는 거라곤 밀폐 포장된 전투 식량이나 단백질 쉐이크 같은 간이 식량뿐이었다. 서의우는 이런 것만 먹어서 상자째로 가득 쌓여 있었다.
냉장실 말고 냉동실 문을 열어 보니 다행히 뭔가 처박혀 있다. 나무 상자에 담긴 비싼 등급 소고기와 보자기에 싸인 자연산 송이버섯 등이다. 분명 국가 요직에 앉은 높은 사람들이 보낸 선물을 열어 보지도 않고 대충 던져둔 걸 거다. 서의우는 이런 게 냉동실에 있다는 사실도 까먹고 있겠지.
아무튼, 달군 팬에 마시던 와인을 졸여 소스로 만들고 소고기에 버섯을 같이 볶으면 적당히 먹을 만한 게 나올 것 같았다.
재진은 고기와 버섯을 해동하고 애착 식칼로 재료들을 먹기 좋게 썬 뒤 맛있게 요리했다. 센 불에 빠르게 볶아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길 즈음엔 해가 지평선 자락으로 내려가 있었다.
노을이 진다.
새파랬던 하늘이 붉게 물든 모습이 보였다.
권재진은 고기 버섯 볶음을 트레이에 옮겨 담고 수저를 챙겨 다이닝 룸으로 갔다. 거대한 12인용 식탁에 접시를 놓고 수저를 세팅하자 밖에서 하얀빛이 번쩍했다.
스프레이를 뿌린 것처럼 미세한 빛 방울이 사방으로 퍼졌다.
순간 좌표 이동의 흔적이다.
텔레포트를 마친 서의우가 무균이동실 밖으로 나와 곧장 다이닝 룸으로 왔다. 권재진이 인기척을 내지 않았는데도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뭐, 재진도 서의우가 이쯤 되면 돌아올 줄 알고 있었지만.
“서의우 씨, 거기 앉으시죠.”
권재진이 서의우 몫의 수저를 내밀었다. 그러곤 시범을 보이듯 맞은편에 착석했다. 태연히 젓가락을 들고 고기 한 점을 집어 먹는다.
턱을 우물거리며 고기볶음을 씹는 재진의 모습을 검은색 전투복 차림의 서의우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저기, 저 좋았어요, 정말…….”
서의우는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뜬금없는 말을 뱉으며 재진의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앉으라는 말이나 내밀어 준 수저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바짝 붙어 선 그가 팔을 뻗어 재진의 얼굴을 손안에 가득 감싸 쥐었다. 식사 중인 몸 위로 칠흑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 가이드…… 드디어…… 너무 좋았어요, 이런 건 처음이에요. 가, 가슴이 막 벅차요. 기뻐서. 어떡하죠?”
서의우가 쌍꺼풀 없는 기다란 눈을 휘어 웃으며 권재진의 뺨을 쓸어내렸다. 눈웃음은 천진하고 손길은 애틋했다.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재진은 달라붙는 서의우를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버섯도 집어 먹었다.
“거기 앉으시라고요. 배 채우며 할 말 있으니까.”
“싫어요. 떨어지기 싫어요. 저 진짜 재진 씨에게 빨리 돌아오고 싶어서 얼마나 애탔는데요. 초조했어요. 봐요, 손가락 다 뜯은 거.”
“아, 그러십니까.”
서의우가 다섯 손가락을 펼쳐 쭉 내밀었다. 얼마나 씹어 댔는지 손끝 껍질이 다 벗겨지고 짓물러 있었다.
권재진은 익숙한 서의우의 기행을 적당히 흘려 넘기고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으라고 입가에 내밀어 줬다. 서의우는 눈앞의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권재진의 얼굴만 계속 더듬어 댔다.
성가시게 볼을 주무르고 귀를 조물조물 건드리더니만 급기야 입술 안까지 손가락을 밀어 넣으려고 해서 재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피해 낸다.
“가이딩 해요, 우리.”
서의우는 참 끈질겼다.
눈이 뒤집혀서 가이딩밖에 안 보이는 상태다.
그래서 이번엔 손이 아니라 입이 다가왔다. 서의우가 권재진의 동그란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쪽 소리를 내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입술에 닿는 대로 눌렸다.
“재진 씨는 내 가이드잖아요. 가이딩 해요.”
“얼마 줄 건데 그러십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