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광공 길들이기 (2)화 (2/154)

#2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저서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위의 5단계로 구분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1회차 권재진의 심리 상태도 저것과 같았다.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다가, 우울했고, 결국은 수용했다.

이게 무슨 장대한 서론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말해, 1회차 권재진에겐 미친 애인이 있었다는 뜻이다.

최초의 S급 에스퍼. 24세. 서의우.

4년 전, 비각성자 일반인이던 재진의 앞에 돌연 나타난 서의우는 드디어 자신의 매칭 가이드를 찾았다면서 다짜고짜 그를 납치해 갔다.

“내게 맞는 가이드는 당신이에요. 여태 이런 구석에 박혀 있었다니, 그러니까 줄곧 못 찾았지.”

제6 일반 거주지구에 사는 흔해 빠진 회사원인 권재진이 가이드라니?

그럴 리 없다고, 착각한 것 같다고, 아무리 ‘부정’해도 서의우는 재진의 말을 들어 처먹지 않았다. 그는 재진을 각성자만 드나들 수 있는 특수 거주지구로 끌고 가서 자신의 3천 평짜리 초호화 대저택에 감금해 두고 강제로 가이딩을 요구했다.

가이딩이란 건 당연히 신체 접촉이다.

그중에서도 얇은 점막을 통한 접촉이 가장 뛰어난 효율을 보인다.

그렇기에 각성자들은 어려서부터 일반인과는 다른 성교육을 받고 특수한 정조 관념을 가진다.

권재진을 비롯한 일반인에게 키스나 섹스 같은 행위는 응당 연인과 하는 뜻깊은 애정 표현이지만 그 잘난 서의우 개새끼에겐 효율 좋은 가이딩일 뿐이었다.

“아파, 아파, 아, 큿! 헉…… 그만……!”

쓸데없이 좆 큰 새끼 때문에 재진은 위아래 구멍에서 동시에 피가 나는 아주 끔찍한 첫 경험을 했다.

그땐 정말 어찌나 ‘분노’가 치밀던지…….

“내 가이드…… 드디어 찾았다고, 내……. 그런데, 그쪽 이름이 뭐죠?”

그 새끼는 이제야 겨우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면서, 이런 건 처음이라 가슴이 벅차오르고 기쁘다며 살살 눈웃음쳤다. 쌍꺼풀 없는 기다란 눈을 휘어 천진하게 미소 짓는 앳된 얼굴이 얼마나 소름 끼치고 역겨웠는지 모른다.

결국, 재진은 그 새끼 얼굴에 주먹을 갈겨 버리고 말았지만, 서의우는 일반인 따위에겐 맞아도 아무 타격 없다는 듯 그냥 얼굴을 대 줬다.

얼굴을 주먹으로 처맞는 접촉조차 가이딩으로 치는지 살벌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녀석의 얼굴은 시커먼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지금 떠올려도 몸서리쳐질 기억이다.

“저는 가이드가 아닙니다. 가이딩 될 리도 없고, 된다 해도 뭔가 착오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제6 거주지구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재진 씨는 돌연변이에요.”

그 후, 필요한 가이딩을 끝냈으니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재진의 요구를 서의우는 딱 잘라 거절했다.

각성자. 즉, 에스퍼와 가이드는 국가 소속이며 출생부터 엄중한 체제로 통제‧관리된다. 그리고 권재진의 경우처럼 일반인이 뒤늦게 이능을 각성하는 경우, 통제 불가능한 돌연변이이자 위험 인자로 구분되어 즉시 살처분됐다.

“내보내 줄 테니 나가서 사살당할래요? 아니면 숨겨 줄 테니 제 품에서 서의우 전용 가이드로 살래요?”

서의우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고, 재진은 현실과 ‘타협’한 뒤 그의 집에 갇혀 전용 가이드가 되었다.

그렇게 ‘우울’한 3년이 지났다.

어느새 돌이켜 보니 서의우는 재진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권재진은 그를 일정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3년이다.

처음에는 재진도 서의우를 극렬하게 증오했고, 반강제로 택한 감금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발버둥 치기도 했다. 가이딩 해 달라며 달라붙는 서의우를 거부하며 눈 돌아가게 싸웠고…… 가이딩 부족으로 폭주 직전에 내몰려 이성을 잃은 녀석에게 사흘 밤낮 범해지기도 했고…… 그냥 그 새끼를 죽여 보려 시도하기도 했고…… 한때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따져 보면 권재진이 서의우의 가이드로 각성한 건 서의우 탓이 아니다. 재진이 타고나기를 돌연변이였던 것뿐.

서의우의 집에 갇혀 살 수밖에 없는 것도 서의우의 탓이 아니다. 냉혹한 국가 정책을 피하고자 그런 것뿐.

그래도 재진에겐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고, 마침 눈앞에 증오스러운 사람이 있으니 필요 이상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뭐…… 아무튼 그렇게 온갖, 음…… 욕설과 눈물과 애원과 유혈 사태와 자살 소동과…… 그런 극적 상황을 거쳐 일상을 함께하고, 서로의 성장 과정을 공유하고, 또 그러다 보니까…… 하아 씨, 어색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다소나마 이해하게 됐다.

에스퍼로 태어난 서의우는 내면에 폭주를 향한 근원적인 공포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S급 에스퍼인 그가 폭주하게 되면 여간해선 막기 어려운 재앙 사태가 벌어진다. 수많은 사람이 확정적으로 죽거나 다친다. 그런 만큼 서의우는 유아기 때부터 자신의 폭주 상황을 두려워하도록 다른 에스퍼들에 비해 훨씬 치밀하고도 체계적인 정신 교육을 반복적으로 받았다. 보통 사람 기준으로 보자면 그건 그냥 세뇌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러니만큼 서의우는 가이딩을 절실히 갈구할 수밖에 없었고, 오랜 세월 제대로 된 매칭률을 지닌 가이드를 찾지 못해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가이딩을 유사 약물로 대체하여 버텨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에 줄곧 두통, 발열, 어지럼증, 호흡 곤란, 불면증, 식욕 부진 등의 만성적인 부작용을 끌어안고 살아왔기도 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겨우 그를 제대로 가이딩 해 줄 상대를 찾아냈으니, 눈이 뒤집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였다.

그러나 권재진은 일반인으로 태어나 일반인으로 자랐기에 접촉에 거리낌 없는 서의우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호감 없는 상대와 살을 맞대고 비비적대 봐야 불쾌하기만 하다.

권재진은 일반인의 정조 관념이 뭔지 어떻게든 서의우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키스와 섹스도 연인 사이에서만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오랜 노력 끝에 서의우는 재진의 생각을 이해해 주었고…… 대뜸 고백 공격을 감행했다.

“연인끼리 하는 행동이라 성행위에 거부감 있는 건 알겠어요. ……그렇다면 저희가 연인이 되고 나면 문제가 해결되겠네요. 저랑 사귀죠.”

저 미친 또라이 새끼가!

당연히 진담이 아니라 생각해 단칼에 거절했지만, 서의우 그 새낀 정말 끈질겼다.

나중엔 권재진 쪽에서 그냥 조건 없이 가이딩 해 줄 테니 제발 사귀자 소리만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서의우가 원하는 만큼 박혀 주고 빨려 주며 가이딩 해 줬는데도 그 새끼는 요지부동이었다.

1년 내내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사귀자고 했고, 재진이 좋다고 했고, 특별하다고 했고, 뭐…… 그래서…….

사실 서의우가 낯짝 하나는 진짜 봐 줄 만하기도 하고…….

그렇게 조화로운 이목구비는 세상에 없기는 하다…….

아니 딱히 얼굴 때문에 사귀게 된 건 아니긴 하지만…….

얼굴…… 얼굴인가?

얼굴 때문이었나?

모르겠군…… 씨…….

아무튼, 그렇게 둘은 연인 사이가 됐다.

HAPPY END.

……이렇게 깔끔한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렸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느 볕 좋은 한낮. 마당에 게이트가 터졌고, 거기에 휘말린 권재진은 사지가 찢겨 죽었다.

BAD END.

여기까지가 회귀하기 전, 권재진의 1회차 인생 이야기였다.

***

아릿한 두통이 차츰 가라앉았다.

재진이 억지로 눈살을 찡그리며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침실이 보였다.

서의우의 3천 평짜리 호화 대저택.

양쪽 벽면이 거대한 통유리로 둘러싸여 있고 그 밖에는 잔잔하게 파도치는 밤바다가 있었다. 천장도 동그란 돔 형태의 유리로 덮여 있어 깨알같이 빛나는 별이 침대 위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참고로 저 유리는 전부 특수 처리된 고강도 방탄유리다.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권재진이 저기에 대고 직접 총질해 본 적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아, 일어났어요?”

그때, 재진의 다리 사이에서 익숙한 낯짝이 불쑥 솟았다.

서의우가 밑에서 바지를 벗기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벨트를 젖혀 열고 지퍼를 내린 뒤 무릎 아래까지 정장 하의를 끌어 내린다.

“…….”

권재진은 아래가 벗겨지든 말든 말없이 서의우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지난 생애 4년 동안 지겹도록 마주했던 얼굴이다.

저 특징적인 짙고 굵은 눈썹이 반가울 정도로 여전해 보였고, 깊게 팬 눈두덩이 안쪽에 나른하게 내리깔린 눈꺼풀도 마찬가지였다. 혀를 빨릴 때마다 뺨에 닿아 간지럽던 길고 얇은 속눈썹도 기억과 똑같다.

무엇보다도 저 회색빛 눈동자가 그리울 만치 그대로였다.

서의우의 회색은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 색이었다. 때론 푹 빠질 것처럼 깊고 다정해 보이다가도 때론 비틀리고 어긋난 균열처럼 섬뜩하게 느껴지곤 했다.

……저 새끼와 눈을 맞추고 서로 온갖 감정을 삼켜 내며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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