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대표는 교원에게 더 가까이 오거나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지도 않았고, 능글맞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장난이 아닌 권 대표는 낯설고 무서웠다. 교원은 저도 모르게 먼저 시선을 피했다.
“위험 요소가 있다고 해도 옆에 둘 정도로 네가 열심히 하고, 노력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왜 안 믿으려고 해?”
“……다 열심히 살아요.”
“그렇게 보면 누가 안 억울해.”
“저 안 착해요. 돈 벌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거지.”
“그렇게 악착같이 올라가서 달라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TV 화면에서는 여전히, 계속해서 달라진 것 없는 세상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악행, 악습.
교원은 자신은 사느라 바빠서, 빚을 갚느라 바빠서 나쁘게 살 시간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없다. 시간도, 돈도.
“저 뭐 특별한 거 없어요.”
“특별해.”
권 대표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괴다가, 교원의 옆으로 더 가까이 가 앉았다.
“회사에서는 너만큼 능력 있고 꼼꼼하면서, 내 맞춤형인 것 같은 사람이 없어서 특별하고.”
아닌데. 교원은 저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음을 알았다. 어릴 적부터 저와 비교는 되지 않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나한테는 그냥…… 이교원이 특별하고.”
“왜요.”
“이유 없는데.”
회사 이야기를 떠나, 권 대표가 한 말에 순수하게 의문이 들었다. 교원은 침을 삼킨 뒤 꼬물거리는 제 손가락을 보며 입을 열었다.
“권 대표님이 절 왜 좋아해요.”
잘난 재벌집 아들이,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지금도 모자랄 것 없이 사는 사람이.
잠깐의 재미 때문에? ‘그 밤’에 있던 잠자리 때문에?
“전…… 끝까지 갈 사람 아니면 하고 싶지 않아요, 연애.”
애초에 교원의 인생 자체가 버려지고, 또 버려지면서 굴러온 것이었다.
어머니가 걸음마도 못 뗀 교원을 어르고 달래고 있을 때, 아버지는 그 둘을 버렸다.
바람을 피운 아버지에게 화가 난 어머니는 교원과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으며, 아버지는 구태여 교원의 친권을 가져와 놓고 보살피지 않았다.
교원은 또다시 아버지에게 버려져 고모의 집에서 자랐다.
그곳에서의 차별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저라도 친자식과 남의 자식은 다를 테니까. 그러나 고모가…… 아버지가 따로 모으던 돈을 모조리 자신의 아들에게 썼다는 걸 들었을 때는.
빚쟁이가 찾아오자 저를 고시원으로 내보냈을 때는, 고등학생이던 교원은 또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랑은 오래가는 감정이 아니잖아요. 특히 대표님은, 더 짧은…… 편이시고요. 전 대표님하고 짧게 즐기고 헤어지는 오메가들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사람을 잃을 바에야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특히나 권 대표는 저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더욱더.
드라마도 아니고, 좋은 집안의 오메가와 약혼하는 걸 지켜보거나 그의 어머니에게 헤어지란 소릴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까지 될 리도 없었다. 2, 3개월이면 권 대표가 먼저 저를 손에서 놓을 테니까. 아마 그는 헤어져도 ‘계속 일해도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라…….”
또 버려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교원은 말을 잇지 않고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목발을 짚는 것이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시간, 늦지 않으셨어요?”
“……이교원.”
“이러다 조 팀장님한테 전화 와요.”
권 대표는 가만히 몸을 일으킨 교원을 올려다보았다.
답답함에 속이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저와 정반대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까.
이전까지와는 다른 감정이라고 말해도 교원은 믿지 않았다. 그래 봤자 몇 달 사귀고 헤어지게 될 거라고 장담하는 듯했다.
사귐에 있어 권 대표는 단 한 번도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좋으면 좋았고, 그러면 사귀었다. 교원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질 않았다.
그러나 교원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이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그가 얼마나 ‘헤어짐’이 두려운 사람인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일찍이 겁을 먹는 겁쟁이인지.
그리고 저와는 다르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얼마나 무겁게 보는 사람인지.
“……하…….”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권 대표는 몸을 일으키며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뒤로 넘겼다.
다음 주면 교원이 복귀한다. 회사에도, 제 옆으로도. 아니, 제 옆으로 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납치라는 큰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교원은 괜찮은 게 아니었다.
상처가 너무 많아서, 그 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겨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녀올게.”
이런 분위기로 나가고 싶진 않은데.
권 대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집을 나섰다. 아래까지 내려가자 조 팀장이 차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좀 늦으셨네요?”
“어.”
날카롭게 대답하자 조 팀장이 눈썹 한쪽을 슥, 올렸다가 내렸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 권 대표가 앉자마자 급히 앞쪽으로 빙 돌았다. 돌면서 기사님과 눈을 마주치며 손짓으로 ‘쉿!’ 하고 침묵을 지시했다.
조 팀장이 조용히 권 대표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차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 * *
하루 온종일, 교원이 한 말이 귀를 떠돌아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교원과 지내는 시간 동안 그에 대해 알게 된 건, 그가 생각보다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단단해 보이던 건 그를 보호하던 벽일 뿐이었고, 그가 일에 열중하던 건 그 벽을 단단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김 팀장, 스케줄이 몇 개 남았지?”
“두 개입니다. 잠시 후에 승화 엔터 이사장님과 미팅 있으시고, 5시에는 일요일에 진행되던 알파 모임이 금요일로 당겨져 진행될 예정입니다.”
권 대표는 피곤한 얼굴로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이 피곤의 원인이 교원인데도, 교원이 있는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삐져서 얼굴도 안 볼 생각이었지만 오늘 대화를 하는 바람에 제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뭐 그리 상처가 많은지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두 번째 거, 안 간다고 해.”
“……예? 하지만 안 나가신 지 꽤 되셔서…….”
“안 간다면 안 가. 그리고 나 미팅할 동안, 김 팀장이 이걸로 꽃다발 큰 거 하나 사와.”
권 대표가 품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 김 팀장은 그걸 받으면서도, 다시 한번 물었다.
“두 번 더 빠지면 제적이라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같은 말 또 하게 할 거야, 김 팀장?”
“……아닙니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미팅 끝나면 김 팀장은 개인 업무 해도 좋으니 더 따라올 필요 없고. 조 팀장?”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조 팀장이 움찔거렸다.
“예, 예?”
“끝나자마자 저번에 그거, 보고해.”
“아, 알겠습니다.”
김 팀장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간 이 비서님이 어떻게 해낸 것인지 몰라도, 권 대표는 상당히 까다롭고 까칠했다.
먹는 것부터 미팅 장소, 입는 옷이나 가벼운 후식까지 그날 컨디션에 맞춰 달라졌다.
게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3일 내리 마음대로 일을 빼먹은 다음 날에는 기분 좋은 듯하다가, 그 뒤로는 일주일 내내 이런 식이었다.
스케줄은 맘대로 조정하고, 표정은 무섭게 굳힌 채로 내내 딱딱한 태도였다.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자리를 벗어나기 일쑤였다.
자리를 벗어난 권 대표를 찾으러 조 팀장과 이곳저곳을 헤매는 것이 일과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듯했다.
게다가 그의 경호를 오래 맡아 왔다는 조 팀장은 “그래도 다행히 중요한 일은 하시네요.”라며 허허, 웃는 게 아닌가.
해서 “원래 늘 이러십니까?”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나마 최근, 약 한 달 동안은 정상인처럼 굴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 팀장은 진심으로 이 비서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런 상사를 두고 퇴사하지 않는 그의 인내심에, 들끓는 분노를 내리누르는 차분함과 냉정함에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김 팀장은 아주 잠시나마 직속 비서의 꿈을 꾼 자신의 뺨을 툭툭, 치며 권 대표가 준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얼마 안 가, 1층에서 승화 엔터 이 사장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녀는 지친 얼굴을 애써 밝게 만들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김 팀장이 나간 사무실에는 조 팀장과 권 대표만이 남아 있었다. 적막이 아닌, 한숨에 한숨을 겹친 커다란 한숨과.
“아휴우우우…….”
“…….”
“하아아아…….”
“…….”
“허어어어…… 후우…… 하아아아…….”
결국 참지 못한 조 팀장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왜요, 왜. 또 무슨 일이십니까? 삐진 척만 하신다면서요? 이 비서님이 꼼짝도 안 하신다면서요?”
“아니, 조 팀장. 꼼짝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오늘 아침엔 완전히 날 밀어냈어.”
“……또 고백하셨습니까? 대체 몇 번을 차이셔야 고백을 그만두실 생각이세요?”
조 팀장이 살짝 경멸에 찬 눈으로 권 대표를 쳐다보았다.
“요즘은 그걸 ‘고백 공격’이라고 합니다. 고백을 받은 당사자가 ‘고백당했다’라고 생각하며 거절도 귀찮은 데다, 상대가 끔찍해질 정도라고 해서요.”
“뭐? 야, 내가 얼굴이 있는데 끔찍할 정도야?”
“잘생겨도 싫을 수 있죠. 그리고 이 비서님 마음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권 대표가 손에 얼굴을 푹, 묻었다. 오늘은 거절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뻥, 차 버렸다. 물리적인 힘이었다면 아마 지구 밖까지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이 비서는 나 좋아해, 근데 거절하는 거라니까.”
“……제발…… 그런 착각…….”
“착각이 아니라니까?”
“그럼 왜 거절하시는데요…….”
당분간 경호 2팀과 근무 시간을 바꿀까. 조 팀장은 몹시 괴로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이 연애에 미친 남자가 꼭 모태 솔로처럼 굴고 있었다.
“처음엔 부끄러운 줄 알았거든? 근데 그게 아니야. 내가 바람둥이라고 생각해서 못 믿는 거 같아.”
“아.”
“아? 아라고 했냐?”
“아니, 그냥…… 그렇구나, 하는 뜻이었는데요.”
“감히?”
“……바람을 피우시는 건 아니지만, 거의 그 수준으로 연애를 하시는 건 맞지 않습니까.”
조심스레 정곡을 찌르자 권 대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듣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였다. 조 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꽃다발 혹시…….”
“왜. 나 오늘 화해 요청할 건데.”
“프러포즈도 아니고 화해하는데 꽃다발…….”
“오메가들 그거 좋아해.”
“이 비서님은 아닐 거 같은데…….”
권 대표가 눈을 치켜뜨자 조 팀장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연애 상담해 달라더니, 매번 끝은 이랬다. 제멋대로 할 거면서 뭔 놈의 상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