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은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피하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솔직히 말해서, 열에 취한 자신이 권 대표를 어떻게 꼬드겼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도망가던 권 대표의 얼굴이나, 식은땀에 젖은 이마, 굵은 팔뚝이 저를 끌어안은 것, 제 목덜미에 코를 박고 페로몬을 깊게 흡입하던 권 대표의 행동이 드문드문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교원은 꼼지락꼼지락 몸을 움직였다.
쌩쌩하다곤 했지만, 사실 온몸 이곳저곳이 우드득, 소리를 냈다.
날짜를 보니 첫날부터 3일이나 지난 듯싶다.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다. 다만,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권 대표가 제 옆에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다.
순간 ‘이 인간 3일이나 출근을 안 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3일간 히트가 온 것을 돌봐 준 건 고마운 일이긴 했다. 그나저나.
“……알아차렸으려나.”
우성 알파랑 잤다고 했는데.
시기상 저밖에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 같다. 권 대표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 정도는 알지 않을까.
교원은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목발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발목이 욱신거리니 이전보다 걸음이 느렸다. 손님방에 도착해 침대에 앉았다.
자연스레 노트북을 켜고, 일정표를 열었다.
교원의 일정표는 두 개였다. 권 대표의 스케줄, 사무 업무 일정표가 정리된 것과 개인적으로 사적인 일을 적는 일정표.
후자의 것을 켠 교원은 지난 3일에 ‘히트’라고 적었다가, 첫날의 칸에는 조금 더 길게 작성했다.
히트 – 양주호C.
C는 교원이 정리해 놓은 상대의 감정 단계였다.
A는 저에게 분노, 억울함, 원한을 지닌 것으로 보임.
B는 미움, 싫음 정도의 무난한 감정.
C는 아주 애매한 행동.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망설이는 듯 보이는 감정.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교원은 살면서 많은 감정에 부딪혀 왔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감정에 반응하지 않아야 했다.
그럼에도 저도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작은 감정들이 거슬리고 신경이 쓰였다. 해서 그런 것들을 문서화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저에게는 나쁘지 않은 처리 방법이었다.
그날 양주호는 꼭 찾아온 것처럼 골목길에서 저에게 다가왔다. 제 팔목을 잡고는 어딘가로 데려가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결국 사과하며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권 대표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또 차의겸인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쓰는 건 차의겸에게 어울리지 않는데.
〈나랑 여기 있어서 뭘 하려고.〉
〈그냥…… 있고 싶은데? 이유가 필요해?〉
최근 한국에 마약이 쉽게 돌아다닌다고 들었다. 뭐, 마약이 들어오기 힘들 때도 차의겸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겠지만.
약이라도 했나. 하지만 그날 저를 보는 표정은 또렷하고, 휘청거리지도 않았었다.
교원은 일정표를 노려보다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히트 – 양주호C. (차의겸A?)
그리고 출장 간 날짜도 꼼꼼히 체크하고, 출장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이 그렇게 되었지만, 그날 참가한 인사들의 얼굴은 봐 두었으니 체크해 둘 것이 꽤 있었다.
이전에 거래했었던 회사라든가, 현재 거래처에 대해 비교 분석해 놓을 필요도 있었고.
교원은 침대에 앉아 정신없이 일에 집중했다. 보고서의 초고가 완성된 시간은 오후 12시였다.
그때, 제 옆에 놓인 키오스크가 반짝, 켜지더니 현관의 벨 소리가 들렸다.
- 안녕하세요, 이교원 님. 권 셰프입니다.
“……이 키오스크 되게 유능한데.”
- 며칠 만에 뵙네요. 3일간 아프셨다고 들었습니다. 실례지만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교원은 핑크색 시스템 창에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시스템창이 하나 더 뜨더니, 지문이 선명하게 인식되는 게 보였다.
지문이 인식되었습니다. ‘권창옥’ 씨에게 문을 열어 드릴까요?
YES NO
“…….”
다리가 불편한 교원을 위해 만든 것이라더니, 정말 꼼꼼하게도 만들었다. 교원이 ‘YES’ 버튼을 누르자 현관의 도어 록이 띠로롱, 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실례합니다.”
교원은 노트북을 허벅지에서 내려놓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목발을 짚었다. 그러자 현관에서 집 안으로 들어온 셰프님이 맑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몸은 괜찮으셨어요?”
“아…… 음, 네. 아픈 게 아니라…… 좀.”
“자세히 말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말씀하셔도 바깥으로 이야기를 할 일도 없고요. 우선…… 아침도 안 드셨죠?”
“네.”
셰프는 힘겹게 일어난 교원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 목발을 가지런히 놓은 뒤 외투를 벗지도 않고 키오스크의 메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어떻게 잘 찾더니, 죽 메뉴가 쭉 정리되어 있는 창을 켰다.
“여기서 골라 주시면, 금방 해서 드리겠습니다. 저도 3일간 레스토랑에 좀 다녀왔는데, 거기서 며칠 우려낸 사골 국물이나, 뭐 괜찮은 것들 좀 가져왔습니다. 대표님께서 구비해 주시는 재료들만큼 신선하진 않지만요.”
“감사합니다.”
“아프실 땐 세 끼 꼬박 드셔야 하는데…… 다음부터는 아침부터 불러 주세요.”
물론 셰프를 부른 건 권 대표일 것이다. 교원은 셰프의 번호도 모르고, 안다고 할지라도 귀한 분을 여기까지 부를 마음은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네, 그럼 푹 쉬고 계세요.”
감당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집에 홀로 있다가, 셰프님이라도 오니 괜히 푸근해졌다. 저도 몰랐는데 권 대표가 나간 후 조금 쓸쓸했던 모양이다.
교원은 출장 보고서 초고를 바탕 화면에 옮겨 놓고, 조금 쉴 요량으로 강의를 틀었다.
최근 영상이나 소프트웨어, ui디자인 등 관심 가는 분야가 많았다. 비서 일을 때려치워도 갈 곳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것들을 배울 때까지 비서직에 있을 수 있냐는 것과, 줄어드는 연봉이 문제인데…….
교원은 권 대표가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던 걸 떠올리곤 머리를 짚었다. 골이 아팠다.
더 생각하기 싫은 마음에 키오스크에서 아무 죽이나 선택해 주문을 눌렀다.
최근 일이 너무 많이 생겼다. 오메가가 된 것부터 시작해서, 권 대표의 고백이나 차의겸의 행동이 달라진 것, 그리고 이번엔 양주호까지 추가되었다.
교원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 * *
권 대표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애새끼였다.
한국에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난 후 이어진 사흘간의 히트. 그리고 남은 이틀과 그 후의 일주일은 완전히 삐돌이 상태였다.
물론 교원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업무도 하고, 셰프님의 맛있는 식사를 즐겼다. 앉아만 있으니 살이 조금 오른 것 같아 걱정이 들 정도였다.
“다녀오세요.”
“……흥.”
“어제 김 팀장님께 들었습니다. 미팅하다가 잠시 화장실 간다고 하시더니 도망치셨다고요.”
“……흥!”
“다음 주부터는 제가 출근할 수 있습니다만, 아직 목발을 짚어야 해서. 아, 그리고 비서팀으로 강등될 테니까 어차피…….”
그 말에 쿵쿵, 발을 구르며 출근하던 권 대표가 몸을 휙, 돌렸다.
“강등! 안 한다고! 했! 잖아!”
“하지만, 저만 그 규칙에서 열외되는 건 너무 편파적이잖아요. 저에게도, 대표님에게도 안 좋아요.”
권 대표는 잠시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로 교원의 옆으로 와 앉았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왜요.”
“이 비서가 지금까지 해 온 게 있으니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새침하게 돌렸으면서 목소리는 진중했다. 교원은 상체를 굽혀 턱을 괴었다.
가만히 권 대표의 뒤통수를 쳐다보자 점점 귀가 발갛게 물드는 게 보였다. 교원은 소파를 더듬어 리모컨을 쥐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남에게 관심 없어요. 제가 그간 뭘 했든, 어떻게 했든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면 싫어합니다. 애초에 본인인 그 자리를 가질 생각이 없었어도요.”
교원은 비서 2팀 팀장을 떠올렸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에게 무례하게 굴던 오메가. 그런 그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분명 반발할 것이다.
“미움받는 건 익숙하지만, 공공의 적이 될 마음도 없습니다. 부담스럽고.”
TV를 켜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교원은 무심한 얼굴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덤덤해진 흉악한 범죄, 부조리한 정치, 언제 통과됐는지도 모를 기이한 법안.
여러 이야기가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교원의 귀로 들어왔다.
“……그렇게 안 될 거라니까.”
“전 대표님 안 믿습니다.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제게 생길 거란 믿음도 없고요.”
저와 달리 드라마처럼, 영화처럼 살아온 권 대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제게 사고가 생길 때도 주인공처럼 아슬아슬한 상황에 나타나 구해 주던 권 대표는, 항상 패배자의 자리에서 시작한 교원을 이해하지 못할 터다.
그는 아마 불만이 터져 나와도 저를 계속 직속 비서로 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을 감당해야 하는 건 오로지 교원 자신뿐이었다.
뉴스는 연이어 끔찍한 이야기만 보도했다. 교원은 무표정하게 그것을 보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눈동자만 데굴, 굴렸다.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너에 대해 부정적이야.”
“예?”
교원은 자신이 부정적이고, 자해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네 걱정 많이 해. 네가 없으니까 이제야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아. 세상이 그렇게 차갑기만 하진 않아.”
교원은 가만히 눈을 깜빡, 깜빡했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너 대신에 할 사람은 있겠지. 회사는 이 비서 없어도 돌아가긴 할 거야.”
권 대표가 한숨을 쉬었다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래도 이 비서만 한 사람을 찾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 모든 직원이 찬성하지 않는 게 무서워? 떳떳하지 못한 것 같고, 부조리한 것 같아?”
그는 한 번 더 시계를 확인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교원 씨, 당신이 지금까지 노력했고, 잘해 왔으니까 내가 이러는 거야. 그냥 너 좋다고 옆에 붙여 놓으려는 게 아니야. 나도 사업하는 사람이라서 손해는 안 볼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