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58)화 (58/60)
  • “히트였어서 그런가…… 아, 그나저나 약.”

    흐릿한 기억 속에서 권희수가 내과에서 약을 받아 왔다고 한 게 떠올랐다. 교원은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님, 제 약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 어어? 잠깐…… 그, 거실 TV 밑에, 서랍장 첫 번째…… 아니다, 두 번째 칸.”

    “꺼내 주시고 가시면 좋겠네요.”

    “기다려어…….”

    왠지 모르게 침울하게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아니, 약의 행방을 물었을 때부터 울적함이 가득했다.

    곧 권희수는 가벼운 옷을 입고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채로 터덜터덜 나왔다. 그리고 TV 밑 서랍장을 한참 뒤적이다 흰 봉투를 찾아 꺼냈다.

    “이 비서, 너…… 회사 올 때마다 억제제 먹었지.”

    “예.”

    “……주말에도 일했잖아. 맨날 먹었다는 거 아냐?”

    “이틀 정도는 쉬어서, 그때는 먹지 않았습니다.”

    교원은 팔을 뻗어 봉투를 받았다. 저번보다 억제제의 양이 적었다. 오히려 필요시 약과 히트 싸이클용 약이 들어 있었다.

    “발현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어. 회사 올 때도 가끔만 먹어. 맨날 먹으면 그거 평생 조절 안 돼.”

    “그런가요?”

    교원은 약을 세어 보다가 2주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임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회사에는 최대한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제 처분은 어떻게 됩니까?”

    무심하게 툭, 물었다. 직속 비서에서 다시 비서팀, 혹은 팀장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걸 티 내고 싶지도 않았다.

    한데 권희수의 답이 늦었다. 고개를 들자 권희수가 입술을 살짝 비죽 내민 채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요?”

    “그 전에, 왜 이렇게 됐는지 사정 좀 묻고 싶어서.”

    “왜 오메가가 됐는지요?”

    이 질문은 난감한데.

    교원은 권희수가 다 눈치챈 것도 모르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날 밤의 베타 남자가 자신이라는 걸 말하면, 권희수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깔끔하게, 직속 비서 자리는 내려놓고 어떻게 된다고만 들을 수는 없나.

    “……꼭 말해야 해요?”

    “응.”

    어떻게 보면 제 실수나 잘못 때문에 직속 비서에서 강등이 되는 건 아니다. 오메가가 된 건 권희수가 우성 알파였기 때문이고, 하필 그날 예상하지 못한 러트가 터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어찌 보면 제 잘못이기도 했다. 그걸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그, 하아…….”

    “천천히 말해.”

    “출근하셔야 하는데 뭔 천천히예요?”

    이 사람이 미쳤나, 하며 눈을 치켜뜨자 권희수가 구시렁거렸다. 교원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우성 알파와 잤습니다.”

    “……응?”

    “러트가 온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형질이 변했고, 발현됐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저의 부주의함입니다.”

    주어를 가리고 말하자. 그래 봤자 뻔히 그 ‘우성 알파’가 누구인지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교원은 뻔뻔한 얼굴을 들고 권희수와 눈을 맞췄다.

    “저도 예상 밖의 일이긴 했습니다. 바로 말씀드리는 게 맞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연봉이 깎이는 게 싫어서 숨겼습니다.”

    너무 솔직한 대답에 권희수가 얼빠진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교원은 권희수를 소파에 앉힌 후,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주었다. 권희수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교원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처분을 여쭤본 겁니다. 이제 알게 되셨으니, 직속 비서 자리는 내려놓아야 하겠지요. ……다른 사원들이 알게 되는 건 원치 않았지만.”

    “아, 아니. 아니, 난 직속 비서에서 이 비서를 뺄 생각이 없어.”

    “예?”

    이번엔 교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애초에 직속 비서의 자리에는 ‘베타’만이 오를 수 있었고, 능력 다음으로 가장 중요시하는 사항이라고 들었다.

    “사원들이 신경 쓰이면 그건 내가 어떻게 처리해 볼게.”

    “……어떻게요? 아니, 그리고 공적인 일을 사적인 마음으로 해결하시면…….”

    “아냐, 그것만이 아니, 아니, 그것도 있긴 한데.”

    손을 바짝 올려 머리를 말리던 교원이 수건의 양 끝을 붙잡고 권희수의 머리를 제게로 당겼다.

    “그것도 있긴 한데?”

    “으아, 잠…….”

    권희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교원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헛기침을 뱉었다.

    “자꾸 이러시면 권 대표님이 저를 억지로 직속 비서에 남겨도, 일 못 합니다.”

    “그니까…… 직속 비서는 형질 문제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능력이야. 지금 이 비서만큼 꼼꼼하게, 실수 없이 해낼 사람은 없어…….”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던 권희수가 어기적거리며 몸을 굽혔다. 애벌레처럼 몸을 말아서는, 힐끔거리며 제 눈치를 본다.

    교원은 그곳을 냉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1팀 팀장님도 잘하실 것 같은데…….”

    “이 비서가…… 지금까지 쉬는 날 없이 일했잖아. 그니까, 나도 좀 생각을 했는데…… 김 팀장도 겸으로 직속 비서 일을 하는 건 어떨까 했거든. 이 비서가 좀 쉴 수 있으면 해서.”

    교원은 다시 손을 움직여 권희수의 머리를 탈탈 털었다. 물기를 어느 정도 털어 내자 금색 머리카락이 축 처졌다.

    제가 생각하고 있던 걸 권희수도 생각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해서 진행하는 건 어떨까 싶……거든. 호, 혹시 누가 의문을 가질 수 있으니까 우리 사이는 비밀……루…… 하구.”

    “우리 사이요?”

    “…….”

    수건을 툭, 내리자 권희수가 몹시 처량한 얼굴을 한 게 보였다. 교원이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중얼중얼, 자그맣게 말했다.

    “나는…… 나는 이 비서가 좋으니까, 사귀면, 사귀면…… 그걸 비밀로 하려구, 생각했는데…… 이 비서는 아니니까…….”

    그러다가 훌쩍, 코를 찡그리더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교원은 묘한 얼굴로 그걸 올려다보았다.

    “내가, 흑, 이 비서한테 다, 당할? 줄은 몰랐어서…… 이 비서가 몸만…… 내 몸만 이용할 줄 몰랐단 말이야.”

    권희수는…… 아주 슬픈 얼굴로, 제 큼지막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노린 것인지, 살짝 늘어진 셔츠 사이로 탄탄하고 말랑한 근육이 음탕하게 뭉쳐지는 것이 보였다.

    “정말…… 너무해.”

    교원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살짝 벌렸다가 겨우 닫았다.

    마치 제가 억지로 한 것처럼…… 아니, 권희수의 말대로 제가 고의로 그의 몸을 이용한 것 같은 상황이 아닌가?

    “아니, 그, 하…… 사귀지도 않았는데 뭘 당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도 좋아서 한 거면서.”

    마지막 말을 뱉을 때는 진짜, 진짜로 자기가 가해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권희수는 진짜로 지도 좋아서 해 놓고, 이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되냔 말인가.

    “좋아서 한 거라니…… 그건, 그건 맞지만. 흑, 아무리 그래도……우리…… 그날, 서로 응? 좀, 통한 거 아니었, 어?…….”

    “참, 그거 하나 가지고 너무…….”

    “너무해! 너무해! 진짜 너무해, 이 비서!”

    때마침 조 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교원은 볼을 퉁퉁 불린 채로 노려보는 권희수의 시선을 피하며 전화를 받았다.

    “예, 조 팀장님.”

    - 언제 내려오십니까?

    “10분 이내로 내려가실 겁니다.”

    - 알겠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시고요?

    “예. 저보다 대표님이 안 좋으신 거 같아요.”

    - 뭐, 그런……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여전히 앙칼진 고양이처럼 저를 노려보는 권희수가 보였다.

    교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목발로 권희수의 다리를 툭툭, 쳤다.

    “10분 안에 준비 마치고 내려가세요.”

    “이 비서,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야.”

    “머리 세팅도 하고 메이크업도 살짝 하시려면 촉박하시지 않습니까?”

    “사람이 말야, 그렇게 어? AI처럼 살 거면 다 AI로 대체하지. 응? 요즘 판사도 AI 판사 나와야 한다고 하잖아. AI 판사님은 분명 이 비서 유죄로 판결 내릴 거라고.”

    구시렁대는 큼지막한 어깨를 꾹꾹 밀어내자, 밀려는 난다. 그러면서도 제게로 시선을 돌려 울먹이는 얼굴이 좀 귀엽다.

    “히트는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저는 대표님과 사귈 마음이 없습니다. 신세 지게 된 것에 대해서는 뭐, 죄송하네요. 다음부턴 다른 분과…….”

    진짜 AI처럼 무심하게 말을 툭툭 던져 주니, 몸을 일으켰던 권희수가 두 발을 동동거리며 “야!” 하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안 돼! 누가, 흑, 누가 그러랬어? 나 속상하라고 하는 소리지, 그거! 내가 이 비서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어!”

    “8분 남았습니다, 대표님.”

    “진짜 미워…….”

    꼭 유치원 보내는 엄마라도 된 기분이다. 교원은 목발 끝으로 권희수를 꾹꾹 밀어내고, 그가 준비하러 들어간 후에야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오전의 푸른 햇살이 천천히 거실 안을 채워 갔다. 교원은 눈을 비비며 다친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대표님과 사귀고 싶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누구와도 사귈 마음이 없습니다.’였다.

    빚은 산더미, 무뚝뚝한 데다 누군가를 챙겨 줄 시간도 없다. 뭣보다…….

    교원은 어머니와 이혼한 후, 아버지가 저를 소홀히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혼 사유는 아버지의 외도.

    이혼 이후 모르는 여자가 저를 어머니라 부르라 했었던 기억이 아주 희미했다. 그러나 그녀도 곧 떠나갔고, 아버지는 사업을 확장시키다 그만 빚더미에 앉은 채로 죽었다.

    사랑이란 건 영원하지 않다. 2, 3개월마다 오메가를 갈아치우던 권희수가 ‘넌 달라.’라는 진부한 말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그에게 자신이 ‘그간과 다르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해도 언젠간 헤어질 것이고, 언젠간 좋지 않은 감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1년, 아니…… 아마도 입사할 때부터 좋아했을 권희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신 못 볼 사람으로.

    끼이익, 안방 문이 힘없이 열렸다. 어느새 머리부터 발끝까지 준비한 권희수가 터덜터덜 거실로 나왔다.

    “나 나갈 거야…….”

    “다녀오세요.”

    꼭 가출이라도 하겠다는 듯한 말에 콧방귀를 뀌자, 권희수가 세모눈을 하고 노려봤다.

    “집 나갈 거야.”

    “그럼 이 집 명의는 저로 바뀝니까?”

    “그거면 나랑 만나 줄 거야?”

    교원이 질색하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10분 딱 됐네요. 가세요.”

    “……흐윽, 흐어엉…….”

    권희수, 아니 권 대표가 눈가를 훔치며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두를 신을 때에도 붉어진 눈가로 저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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