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48)화 (48/60)

“발목 하나? 반대편…… 아니다, 같은 쪽 손목으로 하지.”

느릿하고 편안한, 저음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교원은 몸을 옆으로 돌려 베개에 뺨을 비볐다. 익숙한 냄새다. 잘 아는 페로몬의 향기. 편안함에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그쪽은, 일단 조금씩 터트리는 걸로 하지. 자료는 꽤 모아 뒀으니까. 아, 그것도 있으면 좋은데.”

권 대표의 집이구나. 몇 시지…… 낮인 거 같은데, 왜 여기 있을까.

교원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침대 옆 탁상으로 손을 뻗었다. 핸드폰을 쥐어 당기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43분.

“으으음…….”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끌려다닌 핸드폰은 꽤나 고생했는지 낡은 티가 났다. 교원은 어느새 해져 버린 핸드폰 케이스를 살살 손으로 쓸었다.

“목요일…… 목요일?”

벌떡 몸을 일으켜 다시 날짜를 확인했다. 일정표를 보자,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짜가 지났다.

교원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권 대표의 집이 맞았다. ……숙소가 아니라.

“내가 알기로 그 아들놈, 어, 컴퓨터에 있을 건데. ……뭐, 그 정도까지는 안 털어도 될 거 같다. 그래, 끝나면 연락해.”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권 대표의 것. 권 대표의 침대와 집, 놈의 페로몬이 덕지덕지 묻은…… 자신의 몸.

교원은 멍하니 이불을 젖혔다.

조심스레 발목을 움직이자, 어제와 같은 통증이 찌르르 올라왔다.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발목에, 침대 옆에는 목발까지 놓여 있었다.

“일어났어, 자기야?”

제 발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권 대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와 침대 위에 꺾인 무릎을 매만지며 다시 똑바로 눕혔다.

“지금 움직이면 아파. 치료는 다 했는데…… 의사가 최대한 움직이지 말랬어. 배고파?”

“아……뇨. 물 좀…….”

“응, 기다려.”

후딱 부엌으로 달려간 권 대표가 곧 물 잔을 들고 왔다. 교원은 물을 한 번에 들이켜며 칼칼하게 막힌 목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배는 안 고프고?”

“어…… 고파요. 근데, 대표님.”

“응?”

부엌으로 향하려던 권 대표가 다시 다가와 침대 아래에 앉아 교원을 올려다보았다. 쪼그려 앉은 것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자, 권 대표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무, 뭐…… 뭐, 왜?”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교원의 말에 권 대표가 마른 입술을 축이더니 살짝 고민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데리고 바로 서울 왔어. 병원 들렀다가 집으로 왔고.”

“일은…….”

“다 잘 끝냈어, 괜찮아.”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교원이 한숨을 쉬며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자 권 대표가 슬금슬금 다가와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뺨으로 올라가는 듯하더니, 주먹을 쥐었다가 아래로 내려가 교원의 손을 쥐었다.

“너 걱정할 일 아무것도 없어. 일에 영향도 안 갔고, 회사에 피해 간 것도 없어. 너만 다쳤어. ……발목에 금이 갔어.”

“괜찮아요. 금 간 건 금방 나으니까 일은 할 수 있는데…… 음.”

교원은 이참에 제가 생각하던 것을 말하는 게 좋을까 싶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대표님, 이건 건의 드리는 건데요.”

“응? 응.”

“직속 비서를 한 명 더 두시는 건 어때요? 진작 그랬어야 했을 거 같은데…… 너무 늦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권 대표의 비서는 자신만이 아니다. 비서 1팀과 2팀 모두 권 대표의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교원이 말하는 것은 함께 다닐 직속 비서, 대기업의 대표인 만큼 한 명의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불편하시면 주말만이라도요. 그니까, 예비 비서…… 같은?”

올려다보던 권 대표는 그 말에 조금도 반박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그렇게 바로 정하셔도 돼요?”

“네 생각이니까, 이 비서…… 아니, 교원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교원은 조금 민망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저를 위해서 그 밤에 바로 서울로 돌아오고, 병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온 것이 아닌가.

게다가 직속 비서가 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권 대표의 사생활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더 생긴다는 것인데 그에 관해서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저는 그저, 오메가가 되었으니까…… 이런저런 일을 대비해서, 그리고 이왕이면 주말에 시간을 아예 빼서 주말에도 일할 생각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감사합니다.”

“뭐가?”

“그냥 다요.”

비서를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상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른 비서들과의 모임에서 들었던 것들은 오히려 상사들이 비서를 괴롭히기 바쁜, 그런 지독한 일들뿐이었다.

뭐, 챙겨 주는 만큼 저도 그를 챙겨 줘야 한다는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익숙해졌으니까.

“그럼 뭐 좀 먹을래? 내가 죽 만들어 뒀는데…….”

교원은 몸을 일으키려는 권 대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권 대표가 멈칫, 하고 등을 보인 채로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왜?”

권 대표는 터질 듯한 심장 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제 소매를 잡은 손이 귀여워서, 꼭 강아지 손 같아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대표님, 있잖아요.”

“응?”

교원은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렸다. 저에게 온전히 믿음을 준 사람에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저 이제 오메가에요. 직급이 내려가겠죠?

저희 어제 얘기하기로 한 거, 해요?

대표님은…… 그날 밤, 저랑 잔 거 알아요?

세 가지의 질문이 머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교원이 망설이고 있자, 권 대표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적막이 가라앉은 지 꽤 시간이 지난 후, 교원이 입을 열었다.

“제가…… 거짓말을 했다면, 어떠실 거 같아요?”

두 가지는 거짓말, 한 가지는 회피. 회피 또한 어찌 보면 대화를 까먹었다는 거짓말과도 같았다.

“거짓말 싫어하시잖아요.”

교원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고 물었다. 그러나 권 대표는 방금 전처럼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유가 있었겠지.”

“…….”

“이 비서는 나쁜 의도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아니, 그게 나쁜 의도였더라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이유였을 거야.”

소매를 쥔 손 위로 커다란 손에 얹어졌다. 권 대표는 다시 쪼그려 앉아 교원과 눈을 맞췄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해. 말 안 해도 좋고, 이 비서 편한 대로 해. 이건 내가…… 이 비서를 좋아해서도 맞지만, 이 비서가 그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믿는 거야. 나한테 이유 없이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거든.”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맑았다. 그 안에 불안해하는 제 얼굴이 비쳤다.

“……저 너무 믿지 마세요.”

저도 모르게 입술이 비죽 나왔다. 그러자 권 대표가 바로 입가를 끌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아! 절대 안 믿어. 요즘 이 비서가 자꾸 나를 골탕 먹이려 해서, 특히 이 비서가 고르는 식사 메뉴는 안 믿어.”

“제가 언제 골탕을…… 잠깐, 대표님이 죽 끓이셨어요?”

“응.”

“저 그냥 주문해서 먹을게요. 괜찮아요.”

“다음 달부터 요리 학원 가는 거 알지? 그 전에 맘껏 먹어 두라고 잔뜩 끓여 놨는데?”

“그걸 어떻게 먹어요? 학원 결제만 해 놓고 아직 안 가셨잖아요.”

“출장 끝나고 가려고 했지. 하여튼 학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요리를 맛볼 수 있게 해 줄게. 나 이번 거 자신 있어.”

“먹을 자신은 없는데…….”

손에 힘을 빼자 권 대표의 손도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그 온기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원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차의겸은 어떻게 됐을까. 바로 도망친 것 같긴 한데, 거기서 안 잡힐 수 있나. 아니, 일단 피해자가 난데 조사는 안 하나?

조금 전, 말하지 못한 세 가지의 거짓말에 차의겸 생각까지 하자 머리가 욱신거렸다. 교원은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쥐어 차의겸의 번호를 창에 띄웠다. 걱정은 아니었다. 미묘한 관계이니만큼 걱정도, 잘됐다는 후련함도 없었다. 그냥 조금 궁금했다.

그러나 차의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가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적긴 하지만, 전화를 할 때마다 즉각 받던 녀석이 신호음이 아무리 흘러도 받질 않자 조금 걱정이 들었다.

교원은 핸드폰을 접어 침대에 다시 올려 두었다.

며칠 쉬어야겠지. 근데 쉬는 동안…… 뭘 하지.

교원은 간혹 있는 쉬는 시간엔 자기 계발을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뉴스, 기사 등을 살펴보곤 했다. 회사 운영에는 경제도 사회도 중요했으니까.

근데 제 노트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고, 달라 해도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쉴 때 뭘 하지. 취미? 운동? 드라마나 영화를 보나…….

“자자, 식탁으로 가서 먹자. 울 애기, 형아 손 잡아요.”

“싫습니다.”

교원은 팔을 뻗어 목발을 짚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처음 써 보는 목발은 생각보다 어려워 몸이 휘청거렸다.

“글쎄, 튕기지 말고 형아 손 잡으라니까.”

“아저씨처럼 왜 이러세요, 진짜.”

“네 나이에 내가 아저씨는 맞긴 한데.”

결국 허리가 감싸지고, 목발은 사용도 못 했다. 권 대표는 교원을 안아 들다시피 해 식탁에 앉혔다.

잔뜩 만들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한 솥 가득 죽이 들어 있었다. 계란, 새우, 전복, 야채 등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죽은…… 솔직히 말해 쌀알이 완전히 뭉개져 거의 수프에 가까웠다.

“간…… 보셨습니까?”

“당연하지. 맛있어.”

권 대표가 깜찍한 앞치마를 벗으며 제 금발을 위로 휙, 넘겼다. 참으로 찬란하고 예쁜 광경이었다. 교원은 차라리 권 대표 얼굴만 보는 게 배가 부르겠다, 생각하면서도 수저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계란은 잘 풀지 못해 엉겨 있고, 새우는 너무 익혔는지 크기가 상당히 줄었다. 전복은 나름 썰어서 올리긴 했는데 사각으로 토막을 내는 바람에 다른 재료들과 어우러지질 못했다. 뭣보다 냄새가…… 달다. 코가 찡하도록 달았다.

“먹어 봐, 언능.”

“…….”

교원은 독약이라도 먹는 얼굴로 수프를 조심스럽게 떴다. 어쩌지, 이거 한 그릇 다 먹어야 하나. 나름 상사가 부하를 위해 차려 준 건데 손을 한번 댔으니 다 먹어야 하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죽을 입가에 가져다 대자 단내가 더욱 진득하게 풍겨 왔다.

“읍……!”

교원은 눈을 질끈 감고 열심히 불어 식힌 수저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익힌 쌀은 씹는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콧물과 가래 사이의 식감이라고 할까. 뭉근한 식감에 단단할 만큼 익어 버린 새우가 씹혔다. 교원은 억지로 씹는 척을 하다 삼켰다.

“어때? 괜찮지? 레시피 보고 열심히 따라 했는데.”

“……저…….”

교원은 조금 망설였다. 뭐라고 말해야 권 대표가 가장 상처를 덜 받을까.

“응? 어때?”

“……물을 너무 많이 마신 듯싶습니다. 배……부릅니다.”

아무리 권 대표가 바보 같다지만 이 정도도 눈치를 못 챌 사람은 아니었다. 식탁 위에 적막이 감돌았다. 교원은 시선을 돌려 바닥을 내려다보았고, 권 대표는 정말, 진짜로 허망한 낯으로 제 죽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보기엔 꽤 그럴싸해 보이지. 고급 재료들이 들어갔으니까…….

“하, 한 수저로 배불러……?”

“많이…… 부르네요.”

실은 위장이 쪼그라든 것처럼 배고팠지만, 위장도 지금만큼은 눈치 빠르게 소리를 숨겼다. 아마 배에 사는 거지도 ‘이건 아니지.’ 하며 숨까지 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럼 저녁에 먹을…….”

교원은 턱을 괴었다. 권 대표는 조용히 냄비를 들어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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