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47)화 (47/60)

“놔.”

“싫은데.”

“강제로 하려고?”

차의겸을 보았을 때, 교원은 그럴 거라 직감했다. 그가 페로몬으로 저를 짓누를 거라 생각했다.

그게 늘 그가 하던 말이었으니까. 아닌 척 굴면서도 저 더러운 눈으로 샅샅이 몸을 훑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내가?”

“지금도 싫다는데 강제로 만지고 있잖아.”

“아, 그렇네?”

허리에 손을 감싸려던 차의겸은 결국 손을 치웠다. 교원은 무슨 수작인지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린 채로 노려보았다.

“어쩌자는 건데?”

“글쎄. 딱히 생각은 없는데.”

“여기 데려온 이유가 뭔데.”

“네가 내 전화 씹어서.”

“……전화로 하려고 했던 말은?”

교원이 이마를 짚었다. 늘씬하고 긴 다리를 쭉 뻗은 차의겸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교원을 올려다보며 빙글 웃었다.

“한국 언제 오냐고.”

“내일. 됐지?”

고작 그딴 것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나. 교원은 여전히 짜증을 담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제 됐지? 연락되는 핸드폰, 하나만 줘 봐.”

그러자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돌리던 차의겸이 “아, 음, 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싫은데, 그건.”

“지랄하지 말고, 줘. 내 핸드폰 망가졌잖아.”

“안 망가트렸어. 배터리만 나간 거야.”

그렇게 대답한 녀석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내가 네 물건 망가트린 적 있어?”

“…….”

“없지? 내가 더 때린 적이 있냐, 강제로 뭘 하길 했냐. 저번 주 일도 네가 순순히 온 거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교원은 이불을 완전히 걷어 내고, 발목을 살살 움직이며 말했다.

“페로몬으로 그 지랄 해 놓고 그런 소리가 나와?”

“아…… 그건, 솔직히 본능이었어. 딴 놈이랑 하는 꼴은 못 보겠고, 나랑 한다고 생각하니 흥분돼서.”

우발적 범행 같은 소리. 교원은 금이 간 듯한 발목에 한숨을 쉬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권 대표가 걱정 좀 덜고, 그냥 내일 한국 갔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백방으로 찾으려 들고 있겠지.

미국 땅이 얼마나 넓은데, 잠도 안 자고 저 하나 찾고 있으려나.

식은땀에 젖어 제 걱정을 하며 손에 얼굴을 묻는 권 대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안 되겠다. 나 나가게 비켜 봐.”

“지금? 그 꼴로? 너 못 움직일 텐데?”

“상관없어.”

뺨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차의겸이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교원은 천천히 무릎에 힘을 줘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침대 위에서 끌어당기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통증이 일었다.

“아, 씹…….”

“안 된다니까. 그리고 나가 봤자 어차피…… 안 돼.”

겨우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려놓았다. 숨이 차올랐다. 교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확 불어오는 찬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차의겸이 침대 머리맡, 바로 위에 있는 창을 열었다. 커튼을 양옆으로 완전히 걷어 내자 새까만 어둠이 드러났다.

“뭐…….”

무슨 의미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는데, 바람에 나뭇잎 여러 개가 서로 부딪치고 스쳐 솨아아, 소리를 냈다.

교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깥을 살폈다. 침실의 불빛에 반사된 맨가지 하나가 보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드문드문, 컴컴한 어둠을 가로지르는 여러 가닥의 가지들이 길게 뻗어져 나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교원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숲?”

“어, 맞아. 자다 깨서 그런가. 사태 파악이 늦다, 교원아.”

“무슨, 숲…….”

“자세히 알 건 없고, 최대한 멀리 왔어. 구석진 곳으로.”

창을 등진 차의겸은 상당히 뿌듯한 듯 입가에 힘을 주어 웃고 있었다. 비열한 얼굴에 화가 치밀었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다.

이 상황에서 화를 내 봤자 악화만 될 뿐이다. 다행인 건 차의겸은 저에게 손댈 의사는 없어 보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듯 차의겸은 관음증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제 곁을 빙빙 돌아다녔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찾아오기도 했고, 학교 앞으로 와 집까지 데려다준 적도 있었다.

이유는…… 빚쟁이가 도망칠까 봐, 그게 아닐까. 교원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기절한 덕에 머리도 아프고, 짜증은 가슴 안쪽에서 불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자꾸만 권 대표 얼굴이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우는 거 아냐? 그 인간.

권 대표라면 그럴 수도 있을 듯하다. 교원은 한 손으로 눈가를 짓누르며 입을 열었다.

“……차의겸.”

“어.”

“내가 진짜, 부탁할게. 갑자기 왜 생활에 끼어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업무 중이야. 돌려보내 줘.”

차분하게,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을 짓씹듯이 뱉었다. 차의겸에게 부탁을 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간 차의겸은 제 신경 밖에 있었으니까.

저번 주의 일은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 권 대표 덕분에 벗어났었고 지금은 제힘으로 벗어나야 할 때였다.

“그냥 전화 한 통만 하게 해 줘. 부탁할게.”

부탁, 그 단어를 쓸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왜 이 미친 새끼 때문에 제 하루가 망가지고, 일에 지장이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과연 먹힐까.

그러나 뒤이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좀 곤란하긴 한데…… 난 오늘 너랑 여기 있고 싶거든. 근데 전화하면 그 대단하신 대표님이 오실 텐데 말야.”

“내가 괜찮다고 할게.”

차의겸은 선뜻 내키지 않는지 망설였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적이었다. 교원은 고개를 돌려 차의겸을 쳐다보았다.

“이러다가 진짜 감봉이야. 연봉 협상, 제대로 하라며.”

“아, 그거야 당연하지. 네가 많이 벌어야 너도 편해질 거 아냐?”

순진한 듯한 대답에 치가 떨렸다. 교원은 당장 주먹으로 놈을 치고 싶은 걸 참고 거북할 만큼 또렷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나랑 여기 있어서 뭘 하려고.”

“그냥…… 있고 싶은데? 이유가 필요해?”

“나는 일하는 중이잖아.”

“내가 있고 싶다는데, 그게 중요해? 교원아.”

상체를 앞으로 숙인 차의겸이 손을 잡아 왔다. 속을 게워 내고 싶을 만큼 짜증이 일었다. 교원은 말없이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 지금 너랑 하고 싶어.”

“…….”

“근데 네가 싫다고 해서 참아 주는 거잖아.”

선심 쓰는 듯한 말에 점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구슬리면 될 것 같은데.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몸이 뒤로 넘어갔다. 차의겸의 손이 무릎 아래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다시 침대에 정자세로 눕혔다.

“그냥 내 맘대로 해?”

커다란 그림자가 몸 위로 드리워졌다. 차의겸은 두 손을 교원의 양 뺨 옆에 짚고 고개를 숙여 눈을 맞췄다.

놈의 잿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이마를 간질였다. 교원은 굳은 얼굴로 침을 삼켰다.

“한 번이면 돼?”

교원의 말에 차의겸이 미간을 찌푸렸다. 차의겸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다시 교원을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한 번이면 되냐고.”

차의겸의 표정이 점점 굳는 게 보였다. 억지로 웃고 있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썹 사이가 엉망으로 찌푸려졌다. 여유롭던 표정이 황당함과 분노에 젖어 들었다.

“하룻밤 같이 보내 주면 더 이상 귀찮게 안 구냐고, 차의겸.”

비틀어진 칼을 다시 제대로 꽂듯, 교원이 비수를 날렸다. 그러자 양옆의 팔에 힘이 들어가 매트릭스가 꿈틀거렸다.

분노로 떨리는 팔뚝이, 핏줄이 선 목이 보였다.

“야, 이교원. 너…….”

그때였다. 조용히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고, 차의겸의 비서가 다급한 얼굴로 들어섰다.

“뭐야.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

“경찰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한 대의 차량이 아닙니다. 여러 대가 정확히 여기로 향하고 있습니다. 차 전무님이라도 빨리.”

“뭐? 여길 어떻게 알고 와?”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요!”

씨발, 차의겸이 욕을 짓씹듯 뱉었다. 그리고 교원의 팔뚝을 쥐었다가 이를 악문 채로 손을 놓았다.

그가 일어서자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말 좆같이 하지 마, 이교원. 오냐오냐하니까 끝도 없이 기어오르지.”

“꺼지기나 해.”

“다음엔…….”

창가로 경찰차의 조명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양 비서가 안달이 나 차의겸을 보고 있자 그가 몸을 돌려 성큼 걸어 나갔다.

“다음엔 봐주는 거 없어.”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고서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교원은 그제야 팔다리에 힘을 빼며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여러 대의 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교원! 교원아아!”

열린 창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교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요란하게 안 온다고, 멍청한 대표 새끼야.

안심함과 동시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작은 침실 안에 새액새액, 조용한 숨소리가 퍼졌다.

* * *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권 대표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교원을 곰돌이 인형처럼 끌어안았다.

“그, 거…… 대표님. 이 비서 좀 가만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발목 심하게 다친 거 같은데.”

“가만히 안고 있어서 괜찮아.”

훌쩍, 권 대표는 눈물을 닦고 교원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또 훌쩍이고 교원을 보았다.

예쁜 얼굴이 피곤함에 절어 거뭇거뭇했다. 속이 너무 상했다. 늘 생기발랄하고 상큼하던 이 비서는 어디 가고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가해자는 도주했지만 곧 잡힐 것이다. 그리고 권 대표는 가해자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사람을 납치해 놓고 돈을 뺏지도 않고, 강간을 하지도 않았다. 경찰관은 이게 대체 무슨 사건인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표했다.

그야 인질인지, 뭔지 피해자는 얌전히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고 가해자는 사라졌으니까.

이런 짓을 할 놈은 권 대표가 아는 한, 한 놈뿐이었다.

유와이 엔터테인먼트, 차 회장의 아들. 저번 주에도 교원을 불러냈던 놈. 잿빛 머리에, 찢어진 눈매.

권 대표는 다시 교원을 꽉 끌어안고 말랑한 볼에 쪽쪽, 뽀뽀를 했다. 도둑 뽀뽀를 해 놓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교원을 건드린 것에 대한 보상은 단단히 치러줄 생각이었다.

우선 차의겸, 그 새끼는 발목부터 모든 관절을 부러트려 놔야 속이 편할 것 같다.

“하아…….”

“…….”

조 팀장은 권 대표를 힐끔거렸다. 덩치는 산만 해서는 이 비서를 끌어안고 눈을 감은 모습이 꼭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소녀처럼 예뻤다.

납치라는 심각한 사건 때문에 졸였던 가슴이 흐물흐물, 비에 젖은 빨랫감처럼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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