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46)화 (46/60)

〈나, 새벽 밤새워서 일하고 공부해. 이러고 3, 4시간 자고 학교 가. 강의 일찍 끝난 시간 틈틈이 공부해서 성적 채우는 거야. 10시간 내내 이렇게 공부하는 애들도 있는데, 내가 그런 애들 따라잡겠다고, 너처럼 처놀기만 하는 새끼들 부러워할 시간도 없이, 시간 쪼개서 살아. 알아?〉

〈뭔 소리야. 내가 너 알바하는 걸 몰라?〉

〈씨발, 진짜…….〉

난생처음 들었다. 교원의 욕은. 늘 로봇처럼, 감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무심한 얼굴로 사람을 대하던 녀석이 저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제야 핏발이 선 눈이 보였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저를 노려보는 얼굴도.

때마침, 손님이 들어섰다. 커플로 보이는 손님은 조금 취한 듯 웃으며 “무슨 술 살까?” 하더니 걸음을 옮겼다.

〈야, 빚쟁이…….〉

〈어서 오세요.〉

인사말이 나지막하게 입 밖으로 내어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손님들은 교원의 인사를 스치며 저들끼리 떠드느라 바빴다. 교원은 몇 초간 서 있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천천히…… 하나, 둘, 셋.

세 번의 호흡 끝에 교원은 바닥을 구르는 박스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순식간에 변한 얼굴에 차의겸은 가만히 서 있다가, 편의점을 나왔다. 시간을 보니 새벽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설렌다. 수많은 노래 속에 나오는 그 감정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반응하지 않던 이교원이 저에게 반응하는 것은.

차의겸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 하하…….〉

웃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시야가 뿌옇게 물들며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제 말을 차갑게 무시하던 것도, 제 이야기를 아예 듣지 않고 저 할 일만 하던 것도 저를 아프게 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교원은 제가 그렇게 해야만 반응했다. 무얼 했어야 할까. 어떻게 했어야 제 마음에 드는 일이 일어났을까.

차의겸은 애초에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못 했다. 두 사람을 이름 짓고 있는 관계의 문제, 그리고 자신이 매일같이 비꼬듯이 교원을 거지새끼 취급하던 태도의 문제.

그것은 그가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차의겸이 자신의 언행이 ‘곱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착하게 대하고 있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까.

그의 모든 잘못은 외면에서 기인했다. 늘 혼자였던 교원을 외면하고, 자신의 잘못된 버릇을 외면하고, 내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 * *

“뭐? 수하물 검사를 받으라고?”

「개인 비행기여도 받으셔야 합니다.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야, 얘 뭐라는 거야?”

“개인 비행기여도 필수적인 절차라고 합니다, 도련님.”

차의겸이 욕설을 지껄였다. 묘하게 공항 분위기가 싸했다. 차의겸은 멍청했지만 감 하나는 좋았다. 그는 재빨리 커다란 짐을 끌고 오는 정장들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뛰듯이 공항 밖으로 나오자, 경찰관 여럿이 공항 내부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다시 차 안으로 짐을 밀어 넣고 출발했다. 차의겸은 뒤쪽에 앉아 잠가 둔 커다란 캐리어를 열었다.

교원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니, 기절해 있었다. 교원을 내려다보던 차의겸이 한숨을 푹 내뱉었다.

“일단 최대한 멀리 가. 허름해도 좋으니까 외진 숙소로 찾고.”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교원이 권 대표라는 놈의 추근거림을 밀어내기만 했어도,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만 않았어도 이러지 않았다.

아니, 교원이 출장 첫날, 전화만 받았어도 LA까지 쫓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교원이 전화를 그따위로 싸가지 없게 받지만 않았어도 납치까지 할 생각도 없었다.

아니, 납치가 아니지. 정당하게 제 것을 데려오는 것이지.

차의겸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제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하얗게 질린 채로 눈을 감은 교원은 여전히 고왔다.

성인 남성이 들어갈 사이즈의 캐리어를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교원을 넣었다가, 발이 삐져나와서 또 빼고 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짜증 나서 캐리어를 사 온 부하 직원의 머리통도 한 대 쳤다.

차의겸은 교원을 빤히 보다가 헤벌레 웃었다. 교원 앞에서는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찢어진 눈매와 날카로운 코, 얇은 입술 탓인지 웃는 것이 야비해 보였다. 실제로도 교원은 차의겸의 웃는 얼굴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진짜 예쁘지 않냐?”

“예!”

“예!”

차의겸의 말에 앞좌석의 경호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대답이 조금만 늦어도, 소리가 조금만 작아도 매번 머리를 한 대 맞거나 감봉을 당했기 때문이다.

차의겸은 꼭 백설공주처럼 잠든 교원을 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나 정작 178cm의 커다란 남정네인 교원은 인상을 찌푸려가며 악몽을 꾸고 있었다.

꿈에서는 권 대표가 나왔다. 안 그래도 190cm가 넘는 양반이, 이상한 콩을 먹고 구름이 닿는 곳까지 훌쩍 커 버렸다.

‘나랑 얘기해! 나랑 얘기해!’

‘알겠다니까요.’

‘나 보고 얘기해! 안 보이잖아! 나 보면서 얘기해!’

귀가 쟁쟁 울릴 만큼 권 대표가 징징거렸다. 권 대표, 아니 권희수라는 거인 때문에 교원은 속이 답답했다.

대화할 마음은 저쪽에게만 있는데, 자신은 월급을 받아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했다.

그래서 결국 권희수 괴물을 타고 올랐다. 단단한 종아리와 볼록 튀어나온 무릎을 붙잡고 산보다 높은 곳을 향해 기었다.

허벅지는 얼마나 단단한지, 마치 돌산과도 같았다. 그러다 다리가 세 개임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왜 다리가 세 개입니까?’

‘흐흐, 그야…… 올라오면 말해 주지.’

‘됐습니다, 안 궁금합니다.’

어쩐지 꺼림칙했다. 교원은 끝내 권희수의 가슴 언덕까지 올라와 잠시 쉬었다. 그리고 구름 너머의 쇄골을 붙잡고 올랐다.

그제야 하얀 이를 씨익 드러낸 권희수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이제 나랑 얘기해.’

‘네,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부르셨어요.’

교원은 땀은 닦으며 구름 위에 앉았다. 구름은 푹신하고 보드라웠다. 그때 권희수가 무어라 말했다. 제대로 듣지 못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구요?’

그러자 권희수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더 다가와서는 안 될 만큼, 키스가 아니라 교원의 머리를 먹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그니까, 요즘 네가 좋…….’

머리가 지끈거렸다. 양쪽 관자놀이에 날카로운 나사가 파고든 것처럼 몹시 아팠다.

교원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숨을 헉, 뱉었다.

“아윽, 흐…….”

“뭐야, 왜 이래?”

“약 부작용입니다. 용량을 많이 쓴 것이 문제인 듯싶습니다.”

“뭐? 누가 그렇게 하래?”

네가, 시발.

양 비서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했습니다.”

“진통제 가져와. 야, 이교원. 괜찮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에 두통이 더 심해졌다. 왜 이 목소리가 들리지?

속이 역겨울 만큼 싫어하는 목소리였다. 껄렁껄렁거리는 듯, 말에 운율이 있고 까칠하게 찢어지는 굵은 음성의 끝자락.

피에 저주라도 새겨진 듯 그간 가장 싫어했고 또 평생 싫어할, 차의겸의 목소리였다.

“너…….”

“깼냐? 야, 물. 이거 진통제.”

우선 받아먹은 교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주변을 살폈다. 전혀 모르는 곳이다. 골똘히 생각해 봐도 모르는 곳이었다. 공기도, 냄새도, 눈앞의 사람도.

“여기 어디야.”

“숙소.”

“그게 아니라…… 너 왜 여기 있어? 미쳤어? 나 출장 중인 거 몰라?”

“알아.”

가구나 멀찍이 보이는 가격표, 무어라 적힌 것들을 미루어 봐서 한국은 아니었다.

다행인 건 여권을 숙소에 두고 왔으니 다른 국가로 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즉, 납치되기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는 뜻이었다.

“……차의겸. 저번부터 자꾸 업무 방해하는데, 감봉이라도 당하면 책임질 생각 있어?”

“아니, 내가 왜 책임져.”

아직 컨퍼런스 중일까. 권 대표를 생각하니 잠깐 꿈이 떠올라 불쾌해졌다. 하마터면 꿈에서 그 인간에게 먹힐 뻔했네.

“이번 연봉 협상 아직이야. 근데 네가 두 번이나 이 지랄을 하면 내가…… 아윽!”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키는데, 순간 찌릿한 통증이 발목에서부터 등허리까지 쭈뼛, 올라탔다.

“조심해, 조심.”

“뭐야. ……네가 한 거지?”

“아, 되게 사람 나쁘게 몰아가네.”

차의겸이 눈을 치켜뜨며 교원을 노려봤다. 하지만 마지막 기억도 차의겸,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것도 차의겸인데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삐어도 단단히 삔 것 같은 발목은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를 지를 만큼 아팠다. 어쩌면 금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교원은 붕대가 감긴 발목을 빤히 쳐다보았다.

“살짝 쳤어, 살짝.”

“그래서 네가 한 게 맞네.”

“뭐, 나 두고 튈까 봐 그랬지.”

깡패 새끼. 교원은 욕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손을 뻗어 발목을 매만졌다. 시큰시큰 쓰려 오는 데다, 퉁퉁 부은 것을 보니 움직일 수 없을 듯 보였다.

교원은 제 옷가지를 뒤적이다 또 핸드폰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왜 제 핸드폰인데 다른 남정네들이 지들 것처럼 이리저리 뺏고 난리일까.

“핸드폰, 내놔.”

“여기.”

각오하고 손을 내밀었는데, 차의겸이 아무렇지 않게 교원의 손 위에 핸드폰을 얹어 주었다. 그러고는 교원의 옆으로 기어들어 와 누웠다.

“……뭐 하냐?”

“자려고. 너 때문에 한참 고생했거든.”

“개수작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핸드폰은 불통이었다. 전원을 아무리 눌러도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나간 건지, 핸드폰이 맛이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차를 몇 번을 갈아탔는지 몰라. 훔친 것만 네다섯 대는 되고. 네 대표님 능력 있더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냥, 잠깐 사랑의 도피 좀 하러.”

차의겸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교원은 핸드폰을 손바닥으로 내리치고, 리셋 버튼을 눌러 보다 포기했다.

아마도 놈의 비서일 사람이 문 앞을 지키는 듯 인기척이 느껴지고, 발목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은 켤 수 없고, 바로 옆에는 깡패 새끼가 커다란 덩치로 저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 피곤해.”

“…….”

교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벽에 뺨을 기댔다. 이렇게 무기력해진 건 처음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 적은 없었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또 사고를 쳐 버리고 말았다. 자의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회사에 손실을 줬으니 감봉은 불가피했다.

이참에 오메가가 된 것도 말해 버려?

“야, 근데 그 대표 말야.”

“…….”

“너 오메가 된 거, 아직도 모르냐?”

커다란 손이 슬그머니 허벅지를 쓸었다. 차의겸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교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차의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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