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 말 안 해?
“할 말이 있어서 전화한 건 너 아닌가.”
해외 출장에 나와서 받아 줬으면 감사해야 할 게 아닌가. 교원은 주변을 둘러보며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비에 워낙 사람이 많아 최대한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니, 창고가 옆에 딸린 뒷문까지 도착했다.
“무슨 말 하려고 전화했어.”
- 그걸 몰라서 물어?
분명 그날 일에 대해 화풀이를 하려 전화했겠지. 교원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마음대로 안 된 게 분해? 그래서 지금 나한테 징징대려고 전화했어?”
- 하, ……야. 너 진짜 내가 만만하냐?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는데. 오히려 계약 조건 어기려고 든 건 너 아니야?”
계약서는…… 한 장뿐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야 할 계약서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고모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차의겸 측이 가진 게 전부였다. 계약 조건과 사항에 대해서는 스무 살에 한 번 보여 준 것이 다였다.
그러나 똑똑하게 기억했다. 채무자가 매달 지급해야 하는 빚을 갚지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돈을 갚는다는 조건 따위는 없었다.
평생 죽을 때까지 빚만 갚다가 뒤져도 그들에게 교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뜻이다.
아니, 애초에 강제로 몸을 팔게 하는 것은 불법이다. 어떤 식으로 가든 이 새끼가 원하는 대로 갈 일은 없었다.
교원이 이 회사에 있는 한, 권 대표는 제 사람을 지켜 줄 테니까.
- 이쪽에 법이고 뭐고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걸 믿냐? ……아, 이번에 그 권 뭐시기 그 새끼 하나 믿고 이러는 거냐?
“아니. 회장님도 물러서신 거 보면 모르겠어? ……차의겸, 멍청한 줄은 알았는데 진짜 머리가 안 돌아가나 봐? 혹시 뭐, 사고라도 났어?”
- 사고? 뭔 개소리야.
“교통사고라도 나서 뇌 한 번 빠개졌나 물은 거지.”
벽에 등을 기댄 교원이 나른하게 한숨을 뱉었다.
“모르는 모양인데, 최근에 불법 사금융 쪽으로 시끄럽던데. 너네도 그래서 그거 정리하고 회사 차린 거, 아니야?”
깡패질을 청산하고, 엔터테인먼트를 차린 게 벌써 8년 전이다. 그즈음, 사금융에 관련된 심각한 범죄가 터졌었고 정부는 이를 바로 잡겠다고 했다.
물론 사금융을 하는 깡패들을 빠르게 청산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점차 정리해 나가는 것이 교원의 눈에도 보였다.
사각지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번 깡패 옷을 벗고 회사를 차린 놈들이 과거의 일 때문에 난동을 피울까.
사고가 터지기라도 하면 기자들은 득달같이 달라붙을 것이다. 주가는 바닥에 내리꽂힐 터고, 놈의 엔터테인먼트는 파산에 이를 것이다. 그리 큰 회사도 아니었고, 심심한 언론인들에게는 재밌는 먹거리가 될 테니까.
- 씨……발, 닥쳐. 뭘 안다고 나불대?
“이 정도면 잘 아는 거 같은데.”
- 야, 교원아. 내가 그렇게 돼도 널 놔줄 거 같냐?
교원은 발끝으로 후문을 툭툭 두드렸다. 같잖은 협박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차의겸, 차 회장의 둘째 아들로 사고만 안 치면 감사한 쓰레기 자식.
차 회장은 그저 제가 싸지른 씨를 거뒀을 뿐이다. 버리려면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차의겸 정도는.
“그럴수록 너만 좆될 거 같은데.”
교원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투명한 후문 바깥쪽을 힐끔거렸다. 뒤쪽에 흡연 구역이라도 있는지 독한 냄새가 느껴졌다.
- 아니, 교원아. 순장이라고 아냐?
교원은 이 화풀이를 언제까지 들어 줘야 하나, 생각하며 벽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래 봐야 놈은 아버지 허락 없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 난 혼자 죽을 맘 없어. 내가 죽기 전에, 네 목 조르다가 죽을 거야. 너는 내 무덤에서도 도망 못 쳐.
멍청한 놈이 어디서 순장이란 단어를 배웠을까. 교원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감은 눈을 떴다.
그 순간, 소리도 없이 누군가 달려들어 얼굴에 흰 천을 덮었다. 코와 입을 틀어막는 손이 억셌다.
한 명이 아니었다. 둘, 셋…… 후문으로도 몇 명의 남자들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들이 후문으로 들어서자 지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애써 쥔 주먹을 휘두를 새도 없었다. 숨을 참았음에도 결국은 천에 묻은 것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씨발, 죽어도 너는 끌고 갈 거야.”
차의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원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누군가를 떠올렸다.
업무가 끝나면,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권희수…….
* * *
누구 코에 붙이라는 것인지, 모양만 고급스럽지 양은 코딱지만 한 음식들을 대접받고 나온 권 대표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교원의 말대로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은 김 이사가 했고, 권 대표는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명함을 주고받거나, 아는 이들에게서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거나 했다.
컨퍼런스는 지루했지만 어느 정도는 들을 만했다.
“임…… 비서? 이 비서는 어디로 가고?”
“어, 아, 아! 다 끝나셨어요?”
“어, 이 비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던 임도영이 하품을 눈가를 마구 비볐다.
“아까 전화하러 간다고 하셨는데. 이 근처에서 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아까?”
임도영은 조용히 시간을 확인했다. 컨퍼런스가 시작될 즈음에 갔다, 이 비서님은.
그리고 지금은 그때로부터…… 4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정확히, 언제?”
“커, 컨퍼런스 시작할 때…… 가셨는데.”
“전화 아직 안 해 봤지?”
“네, 네에.”
임도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자 권 대표가 한 손을 들어 막았다.
- 전원이 꺼져 있어…….
권 대표는 바로 전화를 끊고, 임 비서에게 명령했다.
“비서 1팀 팀장한테 연락해서 상황부터 알리세요. 이 비서님 핸드폰 위치 추적부터.”
“네, 네! 알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야, 임 비서가 깨어 있었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을 거야.”
아니, 임도영이 깨어 있었다면 이상함을 눈치채고 조 팀장에게 이 일을 전달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아챘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권 대표는 다급하게 김 이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조 팀장!”
흐트러짐 없이 대기하던 조 팀장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권 대표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는 일이 벌어진 것을 눈치챘다.
조 팀장은 순식간에 시야를 넓혔다. 대표님, 그리고 막내 비서. 둘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비서님은.”
“4시간 전에 사라졌어.”
“알겠습니다.”
즉시 인 이어로 경호 2팀에게도 연락을 했다. 어쩐지 게티 센터에서와는 다르게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건 권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권 대표는 전원이 꺼져 있음에도 계속해서 이 비서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
오늘 저녁에 교원과 대화를 하기로 했었다. 그가 자신을 거절했고, 거절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붙잡고 늘어졌다.
권 대표는 이런 관계에서 한쪽만의 감정으로 구질구질하게 잡고 늘어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걸 자신이 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조 팀장.”
“예, 대표님.”
“전에…… 유와이 엔터테인먼트, 기억해?”
“예.”
조 팀장은 차 앞을 가로막았던 양아치를 떠올렸다. 놈을 조사해 보다가, 나름 중견기업의 전무라는 걸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러나 아버지 연줄로 올라간 자리였으며, 본래는 빚쟁이 노릇을 하던 깡패짓이 뿌리였다는 걸 안 뒤에는 코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터질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잘 알지도 모르는 외국에서 터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건만.
“4시간이면 꽤 멀리 갔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근방을 조사한다. 혹, 수상한 사람들을 봤다는 사람이 있다거나 한다면 바로 연락하도록 해.”
조 팀장은 마지막으로 지시를 내린 후, 권 대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권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재빠르게 차에 올랐다.
비서 1팀 팀장에게 연락을 넣은 임도영도 그 뒤에 간신히 올라탔다.
권 대표는 곧장 알고 지내던 검사에게 연락을 넣었다.
- ……그래? 알겠어. 그런 일이면 바로 도와줄 수 있지.
「고마워. 어떤 놈이 한 일인지는 알아. 그놈도 한국인이니, 눈에 띌 거야.」
권 대표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의 속도가 제법 빨랐음에도 마음이 급해, 느리게만 느껴졌다.
알겠어, 근데 오랜만의 연락이 이런 거라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
「그간 바빴다니까.」
- 연애질하느라?
살짝 웃음기 담긴 목소리에 권 대표가 한숨을 쉬었다. 검사 일을 하는 쉘은 대학 동기였다. 어느 날 갑자기 대학을 때려치우더니, 검사를 하겠다고 뛰쳐나간 놈. 그리고 정말 해내 버린 미친놈.
「안 해. 그보다 빨리 일부터 처리해 줄래? 슬슬 화가 날 거 같거든?」
- 아하하, 알겠어. 얘가 새 애인이구나.
제법 친하게 지냈던 터라 속이 죄다 까발려지는 느낌이었다. 권 대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에 한숨을 푹 쉬자 그제야 쉘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 우선 공항 쪽부터 막긴 할 건데, 네가 먼저 가는 게 빠를 거야.
「안 그래도 가고 있어.」
- 빠르네. 역시, 새 애인인가 봐.
「닥치고 끊어, 쉘.」
- 도와주려는 사람한테 너무한데.
권 대표는 즉시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쉘: 너무해 :(]
핸드폰을 주머니에 처박았다. 권 대표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 일 이후, 그 양아치 같은 아들이 무슨 일을 터트릴 거라곤 생각했다.
즉시 그 자리에서 이 비서의 빚을 갚아 준 뒤 그쪽과의 연을 끊어 내고 싶었지만, 권 대표는 그렇게 하지 않았었다. 이 비서를 존중해서였다. 그에게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마음은 없었다.
좀 더 이야기해 보고, 도와주고 싶다고…… 그렇게 잘 얘기해서 끝내고 싶었는데.
교원이 싫다고 한다면 그냥 엔터테인먼트를 무너트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날 후로 조 팀장과 비서 2팀 팀장에게 그 회사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아 두라고 했으니, 언론에 터트리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컨퍼런스를 하는 내내 밖에서 기다리는 교원만을 생각했다. 어서 숙소로 돌아가서, 좀 더 진지하게 제 마음을 이야기하고 진실되게 고백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유치하고, 우스운 고백이 아니라…… 좀 더. 그러니까…… 이전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것은 연애가 아니라 그저 연애 놀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티 센터에서 교원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교원을 임도영이 케어하는 걸 봤을 때. 교원이 자신을 거부하고 임도영의 도움만을 받는다고 했을 때.
불처럼 끓어오르던 분노와 질투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다.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뛰고, 닿는 것도 닳을까 무서운 감정은 처음이었다.
영화, 드라마에서 표현하던 사랑은 거짓이라 생각했었다.
손발로 피가 온통 쏠린 듯 욱신거렸다. 권 대표는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식은땀이 흐르고, 두려움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제발, 아주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원아.
그렇게 되면 하늘이 너무 무정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