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42)화 (42/60)
  • 임도영은 존경하던 교원과 와인 잔을 마주했던 전날을 떠올렸다. 그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실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전에는 그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될 줄 몰랐고, 또 그전에는 그의 페로몬을 맡을 줄 몰랐다.

    그저 존경하는 마음이었다. 처음, 영업팀의 인턴으로 들어갔을 때도 교원은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어떤 직무를 맡은 사람인지도, 직급도, 이름도 모를 적에도 그랬다. 출근길이나 사내에서 그를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그건 저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 베타인 것이 아까운 사람. 교원은 그렇게 불렸다. 오메가들에겐 알파였으면 하는 이였고 알파들에겐 오메가였으면 하는 이였다.

    적당히 큰 키와 냉철한 분위기를 더하는 흰 피부, 손등에 솟은 푸른 핏줄과 사나운 눈가와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

    입사 후 능력만으로 빠르게 승진해, 대표의 직속 비서로 실수 하나 없이 업무를 하는 사람이란 얘기엔 ‘그럴 거 같다.’라고 생각했다.

    저보다 세 살이나 많은 걸 알았을 땐 조금 놀랐다. 모공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탓인지, 그는 조금 어려 보였으니까.

    같이 엘리베이터라도 타면 설렜다. 옆을 스치기라도 하면 그날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휴게실에서 그를 발견한 날은, 저질러선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를 상상하며 홀로 나쁜 짓을 범하고 말았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날의 교원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그 기억은 한 번 더 갱신되었다. 세 개나 풀어 헤친 단추, 그 사이로 보이는 흰 피부와 볼록하게 튀어나온 쇄골과 분홍빛으로 물든 골격, 자그마한 살덩어리.

    ……그래서 그런 제안, 아니 부탁을 뱉은 걸지도 모르겠다.

    “임도영 씨. 무슨 얘기한 거냐니까.”

    “아, 무것도 아닙, 아닙니다. 그, 그냥…….”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임도영에게 권 대표는 너무 높은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복도에서 마주치면 90도로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했을 인물이 권 대표였다.

    “뭐냐니까, 응?”

    권 대표가 다시 한번 임도영을 불렀다. 장난스럽게 차 시트를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 무슨 말을 했었는지 머리가 하얗게 굳었을 때였다.

    “대표님, 제가 도영 씨에게 상담하고 있었습니다.”

    “상담?”

    “예. 그래서 도영 씨는 힘들 때 술친구 해 주시겠다고 한 거고요. 왜 부하를 압박하고 그러십니까? 더 사적인 문제여도 뭐라 하실 일이 아닌데.”

    교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혼자 좋아하는 주제에 임도영을 압박하면서 질투하는 게 어처구니없어서였다.

    “조 팀장님, 숙소로 가시죠.”

    “예에.”

    슬쩍 눈치만 보던 조 팀장이 차를 움직였다. 교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정면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권 대표가 정신을 차렸다.

    “이 비서, 그…….”

    “업무에 관련된 말씀이십니까.”

    “어어? 아, 아니.”

    시린 바람마저 무서워서 도망갈 만큼 서늘한 목소리였다. 권 대표는 교원의 눈치를 보며 제 입술을 살짝 훑었다.

    “그럼 숙소에 도착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어…… 응. 미안.”

    저를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얼굴이 몹시 화나 있는 것 같았다. 권 대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저도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일을 다시 상기하자 제가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 * *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교원은 여느 때처럼 권 대표를 보좌하며 그의 짐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다름없이 권 대표의 뒤를 따라가면서 마주친 김 이사와 웃으며 대화도 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에는 임도영에게 오늘 수고했다며 어깨도 두드려 주고, 조 팀장에게도 수고했다고 말했다. 권 대표에게만 아무 말이 없었다.

    모두 내리고 권 대표와 교원만이 남자, 교원은 입을 꾹 닫았다.

    13층에 도착하자, 교원은 권 대표가 먼저 나갈 수 있도록 열림 버튼을 눌렀다. 권 대표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나갔다.

    화가 나도 교원은 업무에 출중했다. 먼저 나간 권 대표보다 앞장서서 숙소 문을 열고, 권 대표가 먼저 들어가도록 했다.

    그 상황에서 권 대표가 머뭇거리자 어서 안 들어가고 뭐 하냐, 라고 따지는 듯한 차가운 눈빛이 오가긴 했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교원은 권 대표의 짐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 하시려던 말씀은 무슨 말씀이셨습니까?”

    “어?”

    “차 안에서, 저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업무 외적인 사항으로.”

    어벙하니 바보 같은 표정을 하던 권 대표가 “아.” 하고는 목덜미를 쓸었다.

    “그, 냥 부른 거였는데…….”

    “그럼 전 쉬러 가겠습니다. 내일 오후 출국이니, 대표님도 준비하시고요.”

    교원이 제 가방을 쥔 채로 휙, 몸을 돌리자 권 대표는 손발을 어디에 둘지도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교원을 불러야 하나, 따라가야 하나,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지금 방에 거의 다 간 거 같은데 뛰어갈까, 무릎이라도 꿇을까.

    그렇게 공황 상태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니, 교원이 제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 사이로 슬림한 몸이 쏙 들어가는 걸 보자마자 권 대표는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쿵!

    곧장 무릎으로 바닥을 찍어 내린 탓에 큰 소리가 울렸다. 권 대표는 저도 그 소리에 당황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교원을 올려다보았다.

    “교, 교원아!”

    교원은 황당한 얼굴로 권 대표를 쳐다봤다가, 입을 뻐끔거렸다.

    엄청난 소리였다. 권 대표가 아니라 좀 약한 사람이었다면 무릎이 깨졌나, 하고 걱정했을 정도로.

    “내가 잘못했어!”

    “……뭐, 뭘요. 그, 아니, 하……!”

    교원은 제 뺨을 쓸었다가, 입을 틀어막았다가 마지막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곤 급하게 권 대표에게 다가왔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일어나세요.”

    “내, 내가 미쳤어. 미안해. 내가 막,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잖아. 내, 내가 부하를 협박하고, 어이없는 걸로 혼내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응?”

    “아니, 일단 좀 일어나서……!”

    “나, 나 요즘 네가 너무 좋거든? 그래서 임도영이랑 따로 만난다니까, 내가 순간 눈이 돌았어. 걔, 걔 알파잖아. 너는 그, 베타라 모르겠지만 알파들은 말야!”

    후다닥 뱉어지는 말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교원은 권 대표를 일으키고자 끌어당기다가, 권 대표의 어깨에 손을 짚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고백을 그렇게 해요.”

    “……응?”

    권 대표가 동그래진 눈으로 교원을 올려다보았다. 제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인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미치겠네…… 화 풀 테니까, 일어나세요.”

    “응? 으응…….”

    권 대표는 엉거주춤 일어나 교원의 손길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무릎이 몹시 아팠다. 바닥 재질이 뭔지, 진짜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꿇었을 땐 느끼지도 못했던 고통이었다. 권 대표는 교원이 화를 풀었다고 하니 다행이긴 한데, 진짜 화를 푼 건지 말로만 푼 건지 알 수 없어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진짜 화 풀렸어?”

    “네…… 고의로 그러시지 않은 거, 압니다.”

    “다행이다. 많이 화난 거 같아서…….”

    교원은 권 대표의 무릎을 쳐다봤다. 옷감이 살짝 헤졌다. 딱 그 무릎 부위만 그랬다. 얼마나 세게 박았으면 옷감이 헤질 정도일까. 미친 새끼.

    “왜 무릎을 꿇고 그러세요, 사람이…….”

    한숨을 내뱉는 교원의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권 대표가 헤헤, 하고 웃었다. 화만 풀 수 있다면 열 번은 더 바닥에 무릎을 박을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갑자기 방금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랐다. 권 대표의 표정이 점점 하얗게 물들었다.

    〈나, 나 요즘 네가 너무 좋거든? 그래서 임도영이랑 따로 만난다니까, 내가 순간 눈이 돌았어.〉

    그리고 교원의 말도.

    〈무슨, 고백을 그렇게 해요.〉

    헤실헤실 웃던 권 대표가 하얗게 질린 채로 얼어붙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교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를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으응? 으으응, 아니이.”

    그리고 또 분홍색, 빨간색. 얼굴이 스케치북이라도 되는지 색이 번쩍번쩍 바뀌었다. 교원은 해진 바지로 시선을 내리곤, 구급상자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좀 더 숙여 무릎을 손바닥으로 덮자, 권 대표가 딸기 같은 얼굴로 내려다보며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교, 교원아. 있잖…….”

    “예?”

    러블리한 분위기로 넘기려는 찰나였다. 교원이 권 대표의 무릎 사이에 꿇어앉았다.

    “흡…….”

    “많이 아프세요?”

    권 대표는 급하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교원은 그렇게 아픈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고 바지 밑단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위로 몇 번 접어 올리다가, 안 되겠다 싶어 권 대표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교원, 교원아.”

    “예. 일단 바지부터요.”

    교원은 조급해하는 권 대표를 달래며 허리띠를 풀었다. 우선 상처부터 본 후에 다독여 줄 터인데 왜 이리 안달을 내는지 모르겠다.

    슥슥, 허리띠가 빠져나가고 소파에 힘없이 놓였다. 권 대표는 더 빨개질 수 없을 만큼 벌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번쩍 떴다.

    이런 좋은 경치를 안 볼 수는 없었다. 교원이 생각보다, 아니 제가 전에 생각한 것처럼 상당히 진도가 빠르고 여우 같은 베타라는 건 의외였지만 평생 가지고 갈 장면이 아닌가.

    어쩌면 권 대표의 밤을 책임질 50번째 기억이 될지도 몰랐다.

    툭, 지이익.

    고요한 거실에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교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권 대표의 바지를 척척, 벗겼다.

    아무래도 아래에서 위로 걷어 내는 건 힘들어 보이고, 지금 권 대표에게 일어나서 벗으라고 하기엔 무릎이 너무 아파 보였다.

    조금 전에도 그 튼튼한 사람이 절뚝이지 않았던가. 어쩌면 찢어져 피가 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례하겠습니다.”

    교원의 손이 결국 권 대표의 허리에 놓였다. 바지를 벗기고자 ‘허리 드세요.’라고 말하려는데, 권 대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너무, 너무 빨라! 진도가, 진도가 너무 빨라, 교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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