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대표는 고개를 숙이고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교원은 아예 쪼그려 앉아 권 대표의 손가락을 잡아 벌렸다. 그러자 꼬옥 감은 수줍은 눈매가 드러났다.
“대표님?”
“……나, 나.”
“예.”
“여기서 밥 못 먹겠어.”
“……예?”
두꺼운 손가락을 붙잡은 채로, 교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권 대표는 손가락을 놓아 달라는 듯 눈을 살짝 뜨고, 제 손가락을 힐끔거렸다.
“놔, 놔줘.”
“……예.”
조심스럽게 놓자마자, 권 대표가 빛처럼 빠른 속도로 일어나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10초 만에 후드티와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은 뒤 뛰쳐나왔다.
“대표님, 식사는 여기에 있는…….”
“이 비서 다 먹어!”
그렇게, 그가 방을 나가기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교원은 얼빠진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눈만 끔뻑거렸다.
“……또 왜 저러시는 거지.”
최근의 권 대표는 늘 항상 붙어 있는 교원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만 해 댔다.
교원은 몸을 일으켜 그가 한 입도 먹지 못한 식사를 내려다보았다.
뭐, 든든하게 먹어서 나쁠 건 없지.
* * *
2인분의 식사를 마치고, 조금 배가 부른 교원은 임도영에게 온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네, 도영 씨도 잘 주무셨나요? 오전 10시까지 1층 로비로 오시면 됩니다.]
[비서1팀임도영: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직원을 불러 식사를 치우고, 이를 닦고 가벼운 립밤도 발라 준비를 끝냈다. 교원은 거울을 빤히 보다가 살짝 자라난 눈썹도 정리했다.
교원은 털이 많이 나는 편은 아니었다. 눈썹은 어릴 적부터 깔끔하게 나는 편이었고, 수염은 일절 자라질 않았다.
다리에도 털이 나지 않아 베타 전용 목욕탕에 갈 때는 미묘한 시선을 받기도 했다.
〈어휴, 청년. 거 잘생겼는데 야생미가 부족하네? 울 안사람은 말이여, 내 이 야생미에 홀딱 반했었단 말이지. 지금도 봐 봐, 어?〉
그렇게 말하며 제 몸을 자랑하던 중년 남성도 종종 있었다.
교원은 어차피 반드시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아침 준비 시간이 줄어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오전 9시 23분. 교원은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핸드폰과 수첩, 미팅에 사용될 자료들과 노트북을 확인했다.
조금 일찍 나가 있을 요령으로 현관으로 향하던 때였다. 띠릭, 하고 현관에서 도어 록 소리가 났다.
“다 드시고 오셨습니까?”
“어, 어! 응. 이 비서도 다 먹었어?”
아까보단 좀 차분하게 보였다. 교원은 권 대표가 저러다 오늘 미팅에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었다.
“오늘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BM 미팅은 미루기가 힘듭니다만…….”
“응? 아니 아니, 안 미뤄도 돼. 안 아파.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신발을 벗고 들어선 권 대표가 교원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교원은 꽤나 놀랐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걱정되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번 미팅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권 대표님께서 아프시다면 직속 비서인 저에게만큼은 말씀해 주셔야 해요.”
혹여 괜찮은 척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한 번 더 물어봤지만 권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진짜 괜찮아. 그, 음…… 이 비서가 조금만 조심해 주면…….”
“제가요?”
“어, 어. 그니까, BM 미팅이 진짜 중요한 거잖아?”
“예.”
“그래서 내가 긴장을 좀 한 거 같아.”
“긴장이요?”
교원이 알기로 권 대표는 긴장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큰 행사에 가도, 어떤 유명 인사를 만나도 그는 늘 여유로웠다.
누군가에게 ‘잘못 보일 수 있다.’라는 생각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거라고 교원은 생각하곤 했다.
“이거 말아먹으면 진짜 큰일이잖아.”
“아니, 뭐…… BM 말고도 TST도 있고…….”
“그래도 BM이랑 협업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니까 여기랑 미팅 잡은 거 아니야?”
“맞죠.”
그건 그랬지만, TST사와 협업해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무슨 변명을 할 생각인지 듣기 위해 삐뚜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긴장했다, 이 말이야.”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미팅! 미팅 갔을 때 이 비서가 있으면 더 긴장될 거 같아.”
“……왜요?”
교원은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살짝 기울여 가며 물었다. 얼굴에 한가득 담긴 ‘의문’에 권 대표가 쩔쩔매며 대답했다.
“혼, 날까 봐?”
“……제가 언제 혼을……?”
“그, 냥 그런? 느낌? 뉘앙스? 그런 게 있잖아! 이 비서는 모르겠지만, 이 비서 되게, 좀 무섭게 생겼다고. 나쁜 뜻으로 말고!”
무섭게 생겼다?
차갑게 생겼다, 냉정해 보인다는 말은 들었어도 무섭게 생겼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교원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께서 그러시다면 제가 조심하는 게 맞겠죠. 중요한 자리인 만큼, 저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응. 고마워.”
권 대표가 한시름 놨다는 듯 몰래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교원은 제가 그렇게까지 무서운 인상인가 싶어 제 볼을 쓸어내렸다.
“그럼 준비가 다 끝나면 말씀해 주세요. 직원들은 오전 10시까지 로비에서 모이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30분까지 오시면 되니, 느긋하게 준비하셔도 됩니다.”
“응, 알겠어!”
권 대표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교원이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심각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중에 사과해야지, 권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며 급하게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쾅, 닫았다. 닫자마자 권 대표는 제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큼지막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손으로…… 이 비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연스러웠겠지? 이상하지 않았으니 이 비서도 아무 말을 안 한 거겠지?
권 대표는 왼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푸욱, 내뱉었다. 그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에도 같은 공간에 이 비서가 자고 있다는 걸 생각하느라 잠을 거의 못 잤다.
그 밤, 이 비서였을 베타와의 밤을 몇 번 떠올렸다가 화장실도 여러 번 들락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최근 이 비서에게 가는 마음이 점점 진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 달 전쯤, 그 장면을 본 후로 그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이 비서를 꼬시려고 차도 사 주고, 옷도 사 주고, 일도 열심히 하고 잘해 주기도 했다.
한데 왜 그가 그날 밤의 베타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그의 얼굴도 볼 수 없는지 모르겠다.
연애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이 비서를 볼 때마다 끌어안고 뽀뽀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고지식한 성격답게 정자세로 서 있는 것조차 앙큼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아침을 먹을 때는 어떠했는가. 빨간 혀를 드러내고 달콤한 토스트를 조각내 한입에 쏙 넣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미친.”
거기다 고개를 숙였을 때, 왜 쪼그려 앉아서 저를 올려다본 것일까! 은근히 작은 골격을 조그맣게 웅크리고 저를 올려다보는데, 아주 작은 고양이를 발견한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미친 거다. 이건, 제가 아니라 이 비서가 미친 거였다.
사실 이 비서는 엄청난, 엄청난 밤의 황제 뭐 그런 거였던 건 아닐까. 회사에서는 냉철한 대리님, 밤에는 남녀를 휘어잡는 뭐, 그런 거.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앙큼한 짓을 하겠는가.
“미쳤어. 어떻게 거기서 나를 올려다볼 생각을 해.”
연애 세 번? 웃기고 있다. 스물일곱 번이라고 해도 부족할 것이다. 권 대표는 조금 전 저를 의심스레 올려다보던 눈빛을 떠올렸다가, 후하후하, 하고 숨을 뱉었다.
한 달하고도 약 일주일 전, 그날부터 시작된 거다. 이 비서가 저를 잡아먹으려는 계획은.
그날은 외부 업무가 없는 날이었다. 해서, 권 대표는 그때 잠시 썸을 타다 사라진 그녀―이 비서가 전근을 보낸 오메가 여성, 김세영―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놀았다.
제 방에 수도 없이 들락거리며 일을 독촉하는 이 비서가 올 때만 후다닥, 일을 했다.
이상하게 이 비서는 처음부터 다른 비서들과 달랐다. 다른 비서들이 하는 말은 귓등에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 비서의 말은 귀에 콕콕 박혔다.
휘둘린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 비서가 제 직속 비서로 온 뒤 회사의 매출이 오르고,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도 올랐기에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하나 권 대표는 너무 냉정하고 칼 같은 이 비서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표정으로 일을 하는 것이나,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명령하듯 부탁 조로 말하는 게 그랬다.
물론 시간이 지나다 보니 그것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이 비서라는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그 덕분에 제 게으름이 좀 고쳐지기도 했고, 중요한 날에도 늦지 않고 도착하기도 했으니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여하튼 그리 생각해 왔다. 1년간.
그리고 그날은 이 비서에 대한 생각이 많이, 아주 많이 달라지게 된 날이었다.
“웅, 세영 씨.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가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 가려던 권 대표는 그 안에서 권 전무가 나오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권 전무가 화장실을 쓰고 나오면 냄새가 아주 고약했기 때문이다.
해서, 권 대표는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은 현장 업무를 자주 나가는 직원들이 사용하다 보니 조용했고, 화장실도 깨끗했기에 종종 권 전무가 사용한 후라면 오곤 했었다.
권 대표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화장실 입구까지만 해도 그랬다. 들어서려는 순간, 누군가의 전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분명 제가 들어서려는 남자 화장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난감함과 함께 조금의 짜증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