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도 없이 욕실로 쫓겨난 탓에 교원은 하얀 샤워 가운을 걸쳤다. 허리에 끈을 동여매던 교원은 한 번 더 손을 씻었다.
적당한 크기에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은 뼈마디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조금 더 찬물로 손을 박박 씻어 낸 교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찬물로 씻었더니 어느 정도 정신이 차려진 듯싶었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피로해 보이는 제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권 대표가…… 아픈 게 아니라 진짜 저를 좋아한다고. 그런 감정으로.
몇 번을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때 저와 자고 난 뒤, 남성에게 호기심이라도 생겼던 걸까.
미묘하게 꺼림칙한 감정이 일었다. 그냥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아니, 좋아하는 거라 해도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그러했듯, 교원의 부모님도 그러했듯 사랑이란 건 초반의 설렘을 제외하면 텅 빈 감정이었다. 제가 확실하게 쳐 내야 했다.
크게 한숨을 내뱉은 교원은 욕실을 나섰다. 조금 늦게 나왔는데도 권 대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교원은 한숨을 쉬며 안방에 놓아둔 잠옷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가 입을 허름한 잠옷은 부끄러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저걸 또 입고 싶지도 않고…….
교원은 우선 소파에 앉아 아까 던져졌던 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조금 전 확인하려 했던 메일함 휴지통에서 ‘건강 검진 결과’ 메일을 발견했다.
권 대표가 한 건강 검진은 일반적인 검사보다 훨씬 자세한 것이었다. 교원이 특히나 정신 쪽을 확인해 달라 부탁한 까닭에, 세밀한 상담도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제목: 권 대표님 건강 검진 결과입니다.
본문: 안녕하십니까, **병원의 박철임입니다.
요청하신 권 대표님의 건강 검진 결과에 대한 자세한 결과는 유첨된 파일을 참고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소견을 덧붙이자면, 아주 작은 문제도 없이 건강하십니다. 비서님께서 걱정하신 정신적인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추가로 말씀드립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길 바라며 글을 줄이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진짜네.
교원은 파일을 눌러 자세한 결과를 한 번 더 체크했다. 정상 수치에서 벗어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뇌혈관질환도 없었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거나 불안증 등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정말, 진짜로 권 대표는 건강했다. 오히려 평균보다 튼튼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 교원은 젖은 머리 위에 얹어 둔 수건을 탈탈 털었다. 때마침이라고 해야 할까, 권 대표 발소리가 들렸다. 교원은 핸드폰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다 씻으셨습니까.”
“어, 아아! 이 비서 다 씻었어?”
조금 멀리서 권 대표가 부시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급한 움직임이었다.
“예.”
교원은 안방이 아닌 다른 방을 훑어보았다. ‘시크릿 룸’도 있었지만 다른 방에도 침대는 존재했다. 굳이 구석진 곳을 고른 이유는 페로몬 때문이었다. 일찍 일어나 약을 바로 먹을 생각이긴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잠옷은? 잠옷 안 입어?”
고개를 들자 권 대표는…… 그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기다란 토끼 귀를 양쪽으로 축 늘어뜨리고, 무릎까지 오는 잠옷을 입고 양 볼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벌써 입으셨습니까.”
“왜. 귀엽잖아. 그리고 아까 이 비서도 뭐라 못 했잖아. 빨리 입어.”
“진짜 싫은데…….”
“이 비서어.”
권 대표가 팔뚝을 잡고 늘어졌다. 교원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혐오’를 띠고 있었지만 그는 더욱 뻔뻔하게 굴었다.
“빨리, 입고 와.”
“제가 잠자리에 가서 입겠습니다.”
“아니, 지금.”
“지금 싫습니다.”
“나, 나 상사야. 말 안 들어줄 거야?”
교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사’를 들먹일 때의 권 대표는 상당히 절실했다. 고민하던 교원은 속으로 ‘시발’을 열 번 정도 왼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응! 언능 입고 와. 그리고 이 비서 공포 영화 좋아해?”
“예? ……그냥저냥 봅니다. 왜 물으십니까?”
“자기 전에 영화 하나는 봐야지. 아직 11시밖에 안 됐어.”
마음만 같아선 당장 자고 싶었다. 교원은 하나 들어주는 김에 다 처리해 버리자, 라고 생각하며 한숨 같은 대답을 뱉었다.
“그럼 영화는 대표님께서 보고 싶으신 것으로 고르세요.”
“웅!”
아주 활기차고 깜찍한 대답이었다. 교원은 권 대표를 한 번 더 힐끔, 쳐다보다가 정색을 했다.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핑크색 원피스 잠옷, 그것도 토끼 귀가 달린 공주 옷을 입고 있는 게 퍽 역겨웠다. 아주 조금 귀엽긴 했지만, 그건 제 눈에 깍지가 낀 것이었다.
교원은 안쪽 방으로 들어와 잠옷을 들어 올렸다. 둘 다 큰 사이즈로 산 듯한데, 저에게는 종아리 아래까지 내려올 듯싶다.
교원은 한숨을 몇 번 더 쉬었다. 그리고 목욕 가운을 벗었다. 부드러운 가운이 스륵, 하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잠옷을 들어 올렸다가 “아.” 하고 작게 신음을 뱉었다. 속옷을 안 가져왔다. 교원은 다시 목욕 가운을 집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이 뒤에서 느껴진 것은.
“아, 이 비서 그거……!”
흡,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완전히 엉덩이를 보인 채로 몸을 숙인 탓이었다. 급하게 쪼그려 앉자, 권 대표가 후다닥 벽으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그거 안쪽에 리……본, 있다고. 뒤에서 묶, 묶어야 해서. 마, 말해 주려고 온 거야.”
“……예, 그, 남자끼리 뭐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부끄러, 워 안 했거든.”
권 대표, 아니 권희수는 그대로 거실로 도망쳐 소파에 엎어졌다. 엎어진 채로 온몸을 구부려 거북이처럼 쪼그렸다. 시간이 좀 흘러서, 옷을 입는 데에 애를 먹고 있을까 봐 간 거였다. 기필코 조금도 흑심은 없었다. 정말, 정말이었다.
사락사락, 교원이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저, 속옷이 방에 있어서……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어, 어어…….”
“왜…… 그러고 계십니까?”
“몰라도 돼…… 입고 와…….”
온몸이 후끈거렸다. 권희수는 커다란 손에 제 얼굴을 묻고 마구 뛰는 심장 소리에 벅차게 숨을 뱉었다. 교원이 건너편 방으로 이동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갰다.
“설마.”
교원의 몸을 본 순간, 다른 곳보다 먼저 보인 곳이 있었다. 허벅지 안쪽, 북두칠성과 비슷한 모양으로 난 점.
새하얀 다리에 선명하고 진하게 난 점만이 눈에 보였다. 그것만 눈에 띄었다. 오롯하게―다른 은밀한 부위를 아예 안 본 건 아니었지만―선명한 점은 분명 자신이 ‘베타 남성’과 잠을 잤을 때 보았던 그것이었다.
흐릿했던 기억이 점점 선명해지면서 확실해진 건 딱 하나, 그것이었다. 허벅지 안쪽에 여러 점이 있었고, 그것은 꼭 북두칠성 별자리를 닮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도 그걸 보며 신기해했었다. 점을 빤히 보니 부끄럽다는 듯 다리를 오므리던 것도 기억이 났다.
술자리의 마지막에 이 비서와 단둘이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이 비서를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밤의 일이 있기 전부터 이 비서에게 눈길이 가고 있었기에, 제가 끼워 맞추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이 비서가 저와 잠을 잤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기억 속 남성은 저와의 관계를 느꼈고, 머뭇거리다가도 적극적으로 팔을 내밀어 제 목을 끌어안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 비서일 리가 없다고, 그리 생각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뒤엎어졌다. 그날 밤의 기억과 달리, 최근 교원에게 마음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근데 그날 함께 있었던 게 이 비서라고. 저와 달리 술에 많이 취해도 기억을 잃지 않는 이 비서라면 그걸 기억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는 그걸 알면서도 제게 평소와 같이 대했단 말인가. 아니, 그러고 나서 그 남자를 찾는 걸 도와주고, 애인 행세도 했단 말인가.
그 밤 이후로 이 비서가 제게 다르게 행동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저만이 달라졌었다. 권 대표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비서를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연스레 그 밤의 기억에 교원의 얼굴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수줍어하며 저를 밀어 내던 팔은 이교원의 것이었고, 제게 안겨 오며 꼼지락거리던 귀여운 손도 이교원의 것이었다.
또 코로 열기가 쏠리는 게 느껴졌다. 권희수는 급하게 코를 틀어막고 욕실로 향했다. 그가 교원보다 훨씬 늦게 샤워를 끝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이유로 인한 사고가 한 번 더 일어났다. 권희수는 엉거주춤 걸어 욕실에 도착하자마자 크게 한숨을 뱉었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귀엽고 깜찍한 핑크색 잠옷의 중심이 도톰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하, 씹…….”
지금까지 그 어떤 상대에게도 이런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첫사랑을 하는 수줍은 어린 소년처럼, 어쩔 줄 몰라 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는 늘 관심이 가면 관심을 주었고, 그게 연애 감정으로 이어지면 만남을 지속해 사귀었다. 그리고 사귄 뒤에는 상대가 행복해하는 얼굴이 좋아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안절부절못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비었던 적도 없다.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몰라 불안한 적도 없었다.
그날 밤을 보낸 교원은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가 꼬시려고 들이대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교원.
그 차갑고 냉철해 보이던 이 비서는 과연 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까.
낯선 불안감에 권희수는 무릎에 고개를 품었다. 그러다 제 아들내미를 보고는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일단 해결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