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36)화 (36/60)

스물일곱.

교원이 이 나이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서로 사랑해 죽고 못 살던 부모님이 한순간에 저를 버린 뒤 한순간에 죽은 것. 연애 같은 것을 할 시간이 없던 것.

그리고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랑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오로지 성행위를 위해 만났다가 질리면 헤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 김 이사 왔어?”

“예.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냐, 아냐. 여기 앉게.”

현관의 불이 꺼졌다. 김 이사와 권 대표가 대화를 시작했다. 권 대표의 성격에 맞게, 김 이사는 서론을 접고 곧바로 본론부터 시작했다.

“이번에 BM과 미팅이 있지 않습니까. 선행기술에 대해 도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그에 대해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응.”

“이번에 BM 쪽에서 미팅에 참여하는 이사님이 안 그래도 이쪽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저희 말고도 자율 주행 관련하여 선행 기술을 가진 곳과 미팅을 잡았더라고요.”

“아아.”

손님이 와 있는데도 교원은 제 자리에 서서 꼼짝을 못 했다. 그의 머리로 1년간 권 대표와 함께했던 시간이 지나갔다.

맨 처음, 그의 직속 비서가 된 날. 나이가 어린 저를 보고도 의심하지 않고 반가워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마주 잡았던 손도, 교원이 잘 해낸 것은 곧바로 칭찬해 주던 목소리나 스물여섯의 교원을 무시하지 않던 것도.

가랑비에 젖어 가듯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면서 그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권 대표의 연애 기간은 3개월이었고, 교원이 그를 알게 모르게 좋아했던 시간은 1년이 넘어갔다.

“하지만 BM은 이미 자율 주행 차를 선보이지 않았나?”

“아직 제대로 써먹을 만큼은 아닙니다. 더 섬세하게 보완할 기술들이 필요한 상태고, 분명 그들이 가장 원하는 건 방금 제가 말씀드린 기술일 것입니다.”

교원은 조용히 몸을 돌려 거실로 돌아왔다. 김 이사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권 대표만이 힐끔, 교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관의 불은 다시 켜지지 않았다. 교원은 준비했던 찻잔과 작은 주전자를 가져와 차를 따랐다. 어차피 둘 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대화가 끝날 것이다.

김 이사는 자신감 있게 강조해야 할 부분을 이야기했다. 그는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게 가장 강점인 사람이기도 했지만, 오로지 그것만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인맥을 모두 활용해 가장 최선의, 최고의 결과를 얻어 낼 방법을 우연처럼, 마법같이 준비하곤 했다. 물론, 상대는 정말 우연으로 느낄 법하게 장치를 깔아 두고 말이다.

교원은 대화를 들으며 가장 중요한 단어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발이 넓은 사람답게 그는 사람의 동향을 살필 줄 알았다. 그래서 본론이 끝나자 그는 곧바로 말을 끊고, 허리를 폈다.

“음…….”

권 대표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커다란 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던 권 대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지.”

“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김 이사도 편안한 밤 되길 바라.”

곧바로 김 이사가 몸을 일으켰다. 대기하던 그의 비서가 그 뒤를 따랐다. 교원은 소리 없이 조용히 대기했다.

김 이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개를 꾸벅, 숙이자 권 대표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권 대표는 늘 보던 얼굴이 아닌, 사업가의 얼굴로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교원도 그 옆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얼마 안 가 문이 닫혔다.

교원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3, 2, 1.

“하아…… 내일 얘기해도 되는 거였잖아.”

사업가의 얼굴에서 평범한 남자로 돌아오는 데에는 단 3초면 충분했다. 권 대표는 소파에 늘어지며 피곤한 얼굴로 몸을 비틀었다.

“미리 알고 계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나 대충 들었어. 이 비서는 다 들었지?”

“예.”

“그럼 내일 한 번 더 말해 줘.”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교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김 이사가 적절한 때에 다시 벨을 울려 주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 저도 모르게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교원은 조용히 걸음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제가 저쪽 방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어엉?”

“침대가 하나 더 있더라고요. 1인용이지만.”

“여기 1인실 아니야? 왜 침대가 하나 더 있어?”

같이 잘 생각이었던 걸까.

교원은 눈을 가늘게 해 경멸하듯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 현관의 불이 꺼지는 순간, 교원은 재빨리 마음을 정리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든, 또 자신도 그를 좋아하든 상관없이 옳지 못한 관계였다.

뭣보다 교원은 그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3개월 혹은 6개월만 함께하고 스쳐 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계속 그의 옆을 보좌하는 비서로서 있고 싶었다.

“워낙 큰 방이라…… 예비용 침실 같은 게 있더라고요.”

“예에비?”

“예.”

정확히 말하면 연인들이 조금 므흣한 것을 즐기기 위한 방이었다. 예약 당시, 직원이 ‘시크릿 룸’이 있다더니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다. 무조건 제일 비싼 룸을 예약하려다가 이렇게 됐다.

교원은 다음에 호텔을 예약할 때는 ‘시크릿 룸’이 있으면 다른 곳으로 예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야, 그럼 나랑 커플 잠옷 입고, 영화 보다가 꺄악! 하고 안기고, 막, 그런 거 없어?”

“……무슨 소리이신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대상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사람을 부를까요.

교원은 그 말을 삼켰다. 권 대표는 가벼운 연애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성매매는 일절 하지 않았다. 상대와 감정을 교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일단 씻고 와. 씻고.”

권 대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교원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러곤 가장 큰 욕실로 향했다.

조용히 작은 방에 딸린 곳에서 씻고 싶던 교원은 발에 힘을 줘 눈을 치켜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표님도 안 씻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난 저기서 씻으면 돼. 이 비서가 여기서 씻어.”

“저 속옷도 아직, 앗, 잠시만요!”

욕실로 휘리릭, 던져 넣은 권 대표가 밖에서 문고리를 콱 잡고 놓질 않았다.

“안에 샤워 가운 있거든! 이 비서 저쪽 욕실에서 씻으면 커플 잠옷 안 입고 도망칠 거잖아!”

“하, 아니, 입을 겁니다. 입을 테니 좀 열어 주시죠?”

“안 믿어. 안 믿어.”

“저 씻을 때까지 이러실 겁니까?”

“누가 끝까지 버티나 보자고.”

교원은 허, 하고 헛숨을 흘렸다.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알겠습니다. 씻고 올 테니 대표님도 씻으세요.”

“못 믿어. 얼른 씻어.”

이 인간이.

교원은 문을 심각하게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권 대표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심각해질 생각은 없었다. 그냥, 평소에 하던 것처럼 그를 밀어내고 거절하면 될 일이다.

자신이 오메가가 됐던 그날 밤 일을 권 대표는 아직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의 베타가 저라는 걸 알아차려도 이제 자신은 오메가였다.

교원은 사락사락, 정장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맨살이 모두 드러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 절망적인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도 저에게 마음이 있다는데 기분 나쁠 수가 있겠는가.

다만 그가 어서 감정을 접길 바랄 뿐이다. 짧고 가벼운 연애를 하고 끝낼 마음은 없었다. 교원은 1년 동안 아주 천천히, 스며드는 줄도 모르고 권 대표에게 빠져들었다.

이게 사랑은 맞을까, 그것도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다른 감정일 수 있었다. 그냥 좀, 좋아하는 인간 유형이었다든가, 존경…… 존경할 건 없으니 그건 아닐 것이다.

교원은 샤워 부스로 가 물을 틀었다. 온도를 조절하고 정수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았다.

그때,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권 대표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물소리가 점차 커졌다. 후드득, 떨어져 샤워 부스 바닥을 적셨다.

욕실 문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조금 전까지 문고리를 잡고 있던 권 대표는 네발로 바닥에 엎드려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약삭빠른 이 비서가 도망칠까 봐 문고리를 잡고 있었는데, 욕실은 방음이 되질 않았다.

옷 하나하나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명했다.

이 비서는 옷을 벗는 소리도, 공기를 조심스레 가르는 그 숨소리 하나하나도 단정하고 간결했다. 키스 한 번 안 해 봤을 표정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교원의 한숨 소리, 정장을 옷걸이에 걸어 두는 소리, 샤워 부스로 걸어가는 메마른 발바닥.

모든 게 4D 영화관에서 본 것처럼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아니, 아예 코앞에 있는 것 같았다.

권 대표는 느릿하게 기어 거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코와 입을 가린 손을 떼어 내자 손끝에 선혈이 묻어 있었다.

“……미치겠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왜 상대가 옷을 벗는 소리에 이렇게 흥분한단 말인가.

제어하지 못한 페로몬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권 대표는 저도 씻으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멍하니 상상의 나래에 젖어 들었다.

아마 샤워 부스는 수증기로 인해 뿌옇게 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투명하니까, 그 밖에서도 이 비서의 실루엣 정도야 보일 것이다.

몇 번 건드려 보았던 허리는 단단하고 가늘었으니 몸은 아래로 갈수록 늘씬하게 빠질 것이다. 딱 맞는 슈트를 입었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었다.

엉덩이는 분명 자신이 만나온 여성들과 전혀 다를 것이다. 골반도 없고, 살집보다는 근육으로 이뤄져 있을 것이다. 가느다란 몸은 뻣뻣하고 마른 장작 같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봤지만 그래도 좋았다. 멍하니 상상에 빠져들던 권 대표는 결국 코피가 바닥에 툭, 떨어지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새빨간 얼굴로 허둥지둥 코피 자국을 닦고 욕실로 뛰듯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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