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알파가 만든 오메가 비서 (30)화 (30/60)

넓은 미술관 구경을 다 하고, 거기서도 권 대표가 SNS에 올릴 사진들을 찍어 주고 나니 진이 좀 빠졌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것도 고쳐야 하는데. 권 대표가 사진 찍어 달라고 하자마자 너튜브 및 사진 강의를 들었다.

권 대표의 아웃스타 팔로워는 상당한 편이었다. 이것저것 후원이 들어올 만큼.

하긴 잘생긴 데다, 키도 크고 몸집도 서양인 체구처럼 튼실하니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운동하는 영상도 가끔 올리다 보니 남녀 가리지 않고 꽤 인기가 많았다.

“자, 브이.”

교원이 영혼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권 대표가 이를 드러내며 양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앙큼하게 윙크도 했다가 센치한 눈으로 하늘도 봤다가…….

열다섯 장쯤 찍고 나서 몸을 일으키자, 권 대표가 후다닥 달려와 사진을 확인했다.

큰 키와 넓은 어깨가 돋보이도록 구도를 잘 잡은 사진은 꽤 근사했다. 지루한 표정으로 찍더니, 구도도 다양했다.

권 대표가 캬, 하고 감탄했다.

“우리 이 비서는 사진사 해도 되겠어, 진짜.”

언제부터 비서가 사진 찍어 주는 사람이 되었나.

물론 작년부터였다. 몇 년째 제법 이용자가 늘어난 SNS, 아웃스타를 시작한다며 권 대표가 종종 사진을 찍어 달라고 조른 것이다.

한두 번 찍어 주다 보니 이제는 아예 전속 사진사라도 된 기분이다.

“조만간 퇴사하고 사진 찍으러 다니려고요.”

툭, 말을 뱉으며 권 대표를 지나치자 누군가 헛숨을 들이켰다. 뒤를 돌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래진 임도영이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권 대표가 교원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맨날 나 찍어 주려고?”

“대표님을 찍어서 뭐 합니까.”

“잘생겼잖아.”

“지겹습니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맞춰 앞장서자 임도영이 졸졸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교원은 권 대표의 팔을 떨쳐 내다,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

입을 살짝 벌리고 올려다보자 권 대표가 눈을 잔뜩 휘어 웃었다. 저가 잘난 걸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진짜 지겨워?”

“……하아.”

맥이 탁 풀렸다. 교원은 고개를 돌리며 이마를 짚었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입술을 물었다가…… 평소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을 휙, 돌려 핸드폰을 두 손으로 꽉 쥔 교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 하, 후, 하. 하고.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왔을 때, 권 대표의 속눈썹이 스칠 만큼 가까워졌을 때, 교원은 진심으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울고 싶은 심정이다.

그때, 권 대표가 교원의 손목을 잡아챘다. 몸이 빙글 돌아갔다.

“대표님?”

“우리 저쪽 올라가자.”

권 대표가 조 팀장을 향해 무어라 눈짓을 하는 게 보였다. 교원은 권 대표의 어깨에 가려져 둘이 무슨 사인을 주고받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뭐라고…….”

“나 아까 더 보고 싶은 작품 있었거든?”

다시금 계단을 오르는 긴 다리에 교원의 낯이 살짝 하얗게 물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조 팀장과 임도영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교원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가, 아주 멀찍이서 주변을 둘러싼 경호 1팀 팀원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왜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야 이 비서도 보여 주고 싶어서. 이 비서 안에 들어가서도 연락받고 하느라고 거의 못 봤잖아.”

긴 팔이 자연스레 교원의 코트 속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쏙, 빼냈다. 업무용 핸드폰이었다.

“아?”

“잠깐만 즐겨 보자고, 응?”

씨익, 이를 드러내 웃은 권 대표가 교원의 팔을 잡아당기며 다시금 센터 안으로 이끌었다.

권 대표는 휴게 공간도, 카페도 지나쳐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몇 층인지도 알 수 없었다.

교원은 권 대표의 손에 들린 제 핸드폰이 징징, 울릴 때마다 불안한 눈을 했다. 급한 일이면 어쩌려고, 완전 지 맘대로……!

“이 비서, 이 비서.”

“……네?”

“이거.”

양어깨가 붙들렸다. 몸이 휙, 돌아가자마자 눈앞에 허물어진 건물과 사람들 그리고 희뿌연 연기 너머로 네모반듯하게 지어진 도시의 건물이 보였다.

『모던 로마 캄포 바치노』-윌리엄 터너.

사람들이 존재하는 무너진 건물 부근은 절망적인 색, 그러나 그 너머 환한 햇빛과 빛이 흩뿌려지는 건물들이 찬란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야.”

교원은 멍하니 작품을 보다가 앗, 하고는 권 대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사 가시려고……?”

“뭐? 아니, 아니야.”

아, 다행이다. 권 대표가 이걸 사겠다고 땡깡이라도 부릴 줄 알았다. 교원은 한결 편안한 얼굴로 작품을 감상했다.

그리고 권 대표는 또다시 교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제 교원은 순순히 그를 따랐다.

그는 작품을 더 보지 않고 테라스로 향했다. 교원은 조금 전 살펴보지 않았던 작품들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확, 불어오는 바람에 놀라 눈을 감았다.

“여기 진짜 멋있지?”

“……네.”

눈을 뜨자 LA의 모든 전경이 눈 안에 들어왔다. 반쯤 해무가 끼어 있었음에도 커다란 도로와 빽빽하게 찬 나무들, 저 너머 높은 건물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바람과 함께 새파란 하늘이 온몸을 감싸듯 시원하게 시야를 넓혔다.

“……그런 얼굴도 할 줄 아네.”

“……네?”

“하도 로봇처럼 굴어서 말이야.”

테라스에 팔을 걸친 권 대표가 전경을 뒤로하고 교원을 내려다보았다. 매끄러운 입술이 부드럽게 달싹였다.

“이 비서.”

“네.”

“연애 몇 번 해 봤어?”

뜬금없는 질문에 교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교원은 딱 잘라 말했다.

“두 번…… 정도. 짧게 했습니다.”

“얼마나 짧게?”

일주일. 손도 안 잡았고, 뽀뽀도 안 했다. 제 모든 첫 경험은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다 훔쳐 갔다.

“며칠 정도요.”

그렇게 대답하고 교원은 말없이 저도 테라스에 다가가 정자세로 섰다. 권 대표가 계속해서 저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나 사실 어릴 때.”

시선이 거두어졌을 때, 권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림 그렸어. 고등학생 때까지.”

교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놀라거나, 맞장구를 치거나,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넓은 LA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몇 번 데려왔던 곳이지만 테라스엔 처음 와 봤다.

“근데 그거 딱 중학생 때까지 하기로 했던 거거든. 내가 싫다고 고등학생 때도 한 거야.”

교원의 학창 시절은 늘 똑같았다. 등교, 공부, 하교. 학원에 갈 돈은 없으니 매일같이 남아 공부했었다.

“그때 매일 맞았는데…… 열아홉에, 야자 시간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징징, 권 대표의 손에 들린 교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권 대표는 말없이 교원의 핸드폰을 종료했다.

미친놈이…….

“여하튼 나 그때 깁스하고 목발까지 했거든?”

“네.”

교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모두 권 대표 회사 일인데, 지가 지 회사를 방치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애들이 엄청 쳐다봤어. 솔직히 쪽팔렸는데 안 쪽팔린 척했어. 그러고 앉아 있는데 진짜 살기 싫어졌어.”

“…….”

저 생각 없어 보이는 권 대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게 놀라웠다. 사춘기 시절에도 똑같이 놀러 다니는 양아치일 줄 알았는데.

“그때 노을이 지더라고. 아까 내가 보여 준 그림처럼, 천천히 지는데…… 운동장에는 학원 가는 애들이 줄줄이 걷고 있고, 학교 너머로는 높은 건물밖에 없어서 하늘이 보이질 않는 거야.”

교원은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돌려 권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권 대표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왜 그랬는진 잘 모르겠는데…… 그때 그림 그만뒀어. 이 비서는 똑똑하니까 이유를 아나?”

권 대표가 손에 턱을 괴고 빙글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교원은 여전히 정자세로 서서 그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전경으로 돌렸다.

“갇혀 있는 것 같아서요?”

“응?”

“해가 지고, 건물에 둘러싸인 학교를 보면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거 같기도 합니다. 원래…… 다 그렇잖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살기 위해서 뭐라도 하고 살고.”

교원에게는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누가 더 불행한가, 라는 걸 따질 생각은 아니다. 그때의 권 대표, 아니 열아홉의 권희수는 그 나름대로 고통스러웠을 테니까.

“허무하셨을 거 같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셔도 결국 목발을 짚고 학교로 돌아가야 했으니까요.”

교원은 그냥,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돈이 된다는 건 다 공부했다. 시간이 많이 드는 의대 쪽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고 공대 쪽으로 진학해 개발자 쪽으로 공부했었다.

어쩌다 비서 일을 하고 있긴 했지만.

“이 비서 국어 1등급이야?”

“당연한 걸 물으십니다.”

“해몽에 재능이 있네.”

“저야 못 하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잠시 눈이 마주쳤다. 권 대표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 쪽팔려. 왜 말했지.”

“지나간 일이 있기에 지금 대표님이 계시는 것 아닙니까. ……그 일이 없었다면 조금 번듯한 분이 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좀.”

“아, 요즘 잘하잖아. 나.”

“안 그래도 얼마나 갈지 조 팀장이랑 내기해 보려고요. 아, 그리고 건강 검진 결과도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교원은 날짜를 헤아렸다. 이번 주 내로 보내 주겠다고 했는데, 언제쯤 오려나.

골똘히 생각하자, 권 대표가 얼굴을 덥석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거 진심으로 본 거야? 그리고 진심으로 결과 기다리는 거 맞아?”

아무렴, 괜히 스케줄까지 다 미루고 검사를 했겠는가. 교원은 진심으로 권 대표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권 대표의 페로몬 향이 진득하게 올라왔다. 교원은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사람이 원래 죽을 때가 되면…….”

“되면?”

뒤로 휘어진 등 아래, 커다란 팔이 불쑥 들어왔다. 권 대표는 교원의 허리를 제 쪽으로 확 잡아당기며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되면, 뭐?”

“……달, 라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팔 좀 치워 주…….”

“근데 죽을 때가 된 게 아니면 어쩔래.”

그 순간 주변의 시선이나, 테라스 너머의 찬 바람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교원은 벗어나려다 휘청거렸다. 급히 테라스를 붙잡았지만 권 대표는 여전히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교원아, 말해 봐. 내가 왜 이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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