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그때, 조수석에 있던 임도영이 몸을 펄쩍 뛰었다. 그러곤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거울로 눈치를 보는 게 보였다.
기회다. 교원은 가까이 달라붙은 권 대표를 밀어내며 임도영을 불렀다.
“도영 씨,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이 비서.”
권 대표가 낮은 목소리로 압박하듯 불렀지만, 교원은 애써 무시하며 임도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거의 연인처럼 가까운 거리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아, 아뇨! 그냥…….”
“그냥, 뭔데요?”
권 대표의 시선이 매우 날카롭다. 화내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만 교원에겐 부담스럽고, 칭얼거리는 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연달아 재촉하자, 임도영이 거울을 힐끔거리며 교원과 눈을 맞췄다. 숨길 수 없는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저, 저랑 이 비서님이랑…… 같은 방, 쓴다니까 좋아서요.”
“안 돼!”
수줍은 임도영의 말에 얼이 빠지려던 찰나, 권 대표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고개를 휙, 돌려 임도영의 사춘기 소년 같은 낯짝을 한 번 훑고, 다시 교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랑 자.”
“예?”
대뜸 내뱉은 말에 반문하자, 권 대표는 진지한 얼굴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자세를 똑바로 한 뒤 팔짱을 끼고, 거래처와 교섭을 할 때의 낯짝으로 턱을 들었다.
“상사 명령이야. 나랑 자.”
“……2인실은 마음에 안 차실 텐데, 요.”
“내 1인실에 네가 들어와. 쟨 2인실 혼자 쓰라고 하고.”
이 무슨 비효율적인 명령이란 말인가. 교원은 바보 같은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면 방을 따로 예약했죠. 예산 낭비입니다.”
“이 비서만 옮기는 건데 왜. 가격도 똑같은데 왜.”
툭툭 내뱉는 비논리적인 주장에 치가 떨렸다. 저 하염없이 진지하고, 근사한 얼굴로 하는 말이 고작 저런 것이란 말인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반드시 권 대표의 실체에 대해 폭로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래 직원들은 팀끼리 2인실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전 출장도, 전전 출장도요.”
한 번이라도 그에 불만을 가지기는커녕, 1인실이 얼마나 좋은지 자랑해 댔던 양반이 이렇게 나오니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교원은 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이유나 설명해 보세요.”
교원의 뚱한 표정에도 권 대표는 여전히 진지했다. 그는 팔짱을 풀고, 오른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날카로운 턱선이 더욱 돋보였다.
“내 비서가, 내 옆에 있어야지. 안 그래? 언제 네가 필요할 줄 알고.”
“……그니까, 그건…….”
“출. 장. 왔잖아. 갑자기 어디서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권 대표의 논리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었다. 그래 봤자 같은 건물이고, 그렇게 한시가 급한 일이 터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그의 말이 최악인 이유는.
“24시간 내내…… 일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단 일분일초도 빼먹지 않고 저를 굴려 먹겠다는 저 심보였다. 교원은 조금은 충격 먹은 얼굴로 권 대표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었나.
“일 끝나고 내가 너 괴롭힌 적 있어?”
있다. 아니, 많았다. 교원은 따지려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 핑, 하고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더니 교원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권 대표가 당황했다.
교원은 낯을 굳히고 눈에 힘을 주며 권 대표의 손을 붙잡았다.
“대표님이 그러신 적이 있을 리가요. 없죠.”
“……그렇지?”
“예. 그럼 이번 출장 기간 3일, 24시간 내내 업무한 것으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교원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어차피 권 대표 뒤치다꺼리는 생활이자 일상이다. 한데 거기에 돈까지 얹어 준다고. 연장 수당에 야간 수당까지…… 이보다 더 든든히 챙겨 갈 기회는 없었다.
어쩌면 상여금만큼 벌어 갈지도 몰랐다.
“잠도 자지 말고 일하라는 건 아닌데…….”
권 대표가 교원의 기세에 밀려 우물쭈물거렸다. 그러나 교원은 권 대표의 큼지막한 손을 꽉 붙잡으며 명료한 눈빛으로 눈을 맞췄다.
“그럼요, 대표님께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같은 숙소를 쓰는 만큼, 기상 시간부터 취침 시간까지 저에겐 모두 업무가 됩니다. 그리고, 본래 업무 시간이라는 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도 포함되지 않습니까.”
“어…… 그야, 그렇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권 대표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제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좌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원은 권 대표를 붙잡은 손을 조심히 그의 허벅지에 내려놓았다. 권 대표가 움찔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들기를 반복했다.
제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라온 하얀 손, 그 아래 꼼짝도 못 하는 제 손.
그리고 제게 눈을 맞대며 눈동자를 빛내는 이 비서.
“대표님께서 하신 제안이니, 괜찮으시죠?”
“……어, 어어. 너, 너무 좋지.”
권 대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 교원이 무어라 했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권 대표가 살아온 삶에서,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아무래도…… ‘그러한 뜻’이었기에. 물론 제 손이 허벅지에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권 대표는 상상의 나래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면…… 아, 아무래도 오메가는 아니니 아이는 입양해야지. 여자아이 하나, 남자아이 하나 입양해서 오순도순 살다가 손자 손녀를 품에 안게 되면 이곳에 또 와야겠다.
이곳이 이 할아버지의 사랑이 시작된 곳이라고 속삭여 주면서.
“그럼, 그런 걸로 알고…….”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권 대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 하고 물을 뻔했다.
“도영 씨는 인사팀에 그렇게 연락해 주세요. 급여에 문제 생기지 않도록, 잘 설명 부탁드립니다.”
“아…… 네.”
어쩐지 임도영의 목소리가 조금 시무룩했다. 교원은 권 대표에게서 손을 떼고 고개를 기울여 조수석 의자를 잡아 가까이 다가갔다.
“왜?”
“네?”
“뭐 걸리는 거 있으면 말해. 웬만한 건 다 들어줄 테니까.”
임도영이 눈을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따가…… 둘이 있을 때 말씀드릴게요.’
교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무리 작게 속삭였다 한들, 어릴 적부터 귀가 유난히 밝았다던 권 대표에게 안 들렸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도 눈살을 찌푸리고 임도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공항에서 게티 센터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서울처럼 도로가 막힐 일도 없었으니 그저 여유롭기만 했다.
권 대표는 창문을 내려 바깥을 보며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공항 주변의 낮은 건물들 너머로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속이 다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권 대표는 출장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외국으로 출장을 나오는 건 좋아했다. 평생 살면서 느껴 보지 못했을 다른 나라의 문화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놀러 온 것이 아님에도 양옆으로 부채처럼 크게 펼쳐진 하늘은 마음을 들뜨게 했다.
물론 들뜨다 못해 비서들을 두고 몇 번 도망치듯 놀러 간 적이 꽤 있었지만 권 대표는 사소한 일은 금방 잊는 편이다.
그래도 공항 주변이라고, 차가 꽤 많았다. 권 대표는 눈을 힐끔 돌려 교원을 훔쳐보았다.
교원은 늘 그렇듯 깔끔하게 올린 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차 안에서는 자세가 흐트러질 법도 한데, 그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권 대표는 노골적으로 턱을 괴고 교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갑자기 들어온 사원도 아니고, 1년 넘게 함께 지낸 직속 비서에게 요 근래 마음을 빼앗긴 이유가 뭘까.
본래 권 대표는 좋으면 좋다, 그게 다였다. 이유고 직급, 환경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감정에 충실히 하는 걸 좋아했다.
그에게 연애란 지루한 일상의 이벤트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왜,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타에 남성. 작고 아담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내가 내 비서 보는 것도 안 돼?”
“……하아.”
조금 찝찝해하던 교원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그의 핸드폰은 수시로 울렸다. 최대한 실수를 줄이기 위해 두 번, 세 번씩 확인하는 습관 탓일까.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각이 진 어깨와 등은 꼿꼿하게 세워져 있고, 눈가엔 피로함 하나 없었다.
“어, 내가 사 준 거 입었네?”
“아…… 네. 비싼 옷이니 이럴 때 입어야지 싶어서요.”
“잘 어울려. 진작 좀 사 줄걸.”
이전의 정장과 달리 적당히 몸 선을 드러내는 정장은 끝단이 깔끔하고 매무새가 좋았다. 단추 하나하나 섬세하게 만든 것들인데다, 고급스러운 원단의 색감이 검푸른 빛이라 교원의 이미지에 잘 어울렸다.
권 대표는 제가 사 준 옷을 입은 교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헤벌레 웃었다. 예쁘다.
출장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이 차에서 앞의 두 놈을 내쫓고 단둘이 여행을 다닐 텐데.
바람은 서울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자연과 어우러진 주택가를 지나자 트램 정거장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자 시원한 산 공기가 일행들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교원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 하얀 건물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게티 센터.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고, 그 내부에는 미술 작품을 전시해 둔 곳.
권 대표는 LA에 올 때마다 이곳에 들르기를 좋아했다.
특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드넓은 창공과 여유로움이 가득한 사람들의 분위기를.
그리고 건물 아래, 푸른 잔디와 꽃으로 이뤄진 작은 정원을.
고개를 돌리자 조 팀장은 벌써 정거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임도영과 권 대표가 양옆에 서 있었다.
“뭐 해요, 안 가고.”
교원이 한마디 하자 두 알파가 쏜살같이 교원의 옆에 따라붙어 걷기 시작했다.